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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박물관] 동래장터와 부산의 민속

younghwan 2013. 7. 11.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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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는 조선시대 부산지역의 중심지역으로 동래읍성과 동래도호부 관아가 설치되었던 지역이다. 조선 태종대에 일본과 무역창구였던 왜관이 부산포에 설치된 이래로 부산은 일본과의 인적.물적 교류의 중심지로 현 용두산공원에 설치된 초량왜관에는 일본인들이 머물면서 무역거래를 하였다고 하면, 그 상대방이 되는 조선 상인들은 주로 동래에 머물면서 양국간 무역에 종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과 일본간의 무역은 관에서 주도하는 공무역, 왜관내에서 거래되는 사무역, 국가의 감시를 피해 행해지는 밀무역의 형태가 있었는데, 조선은 일본에 쌀, 인삼, 중국에서 수입한 비단 등을 일본에 수출하였으며, 일본으로부터는 화폐로 통용될 수 있는 은을 비롯하여 구리 등의 광물과 염료 등을 수입하였다고 한다.

 동래에 거주하면서 왜관에서 일본과 무역에 종사했던 상인들을 동래상인 또는 남상이라 불렀는데 동래부 관아의 허가를 받은 상인들로 공식적으론 20~30여명이 정원이었다고 한다. 조선의 특산품인 인삼을 주로 수출하고 일본으로부터 은을 수입하였다고 한다. 은은 명나라와 청나라의 기축통화로서 일본에서 수입한 은은 중국 국경이었던 의주 상인들을 통해 중국으로 수출되었다고 하며, 그 중간에서 인삼의 생산과 유통은 개성상인들이 주도했다고 하며, 이들은 대표적인 조선시대 상인집단이라 할 수 있다.

부산의 변천
부산은 삼한의 독로국으로 추정되기도 하며, 삼국시대 초기에는 금관가야의 일부였다. 5세기 이후 신라가 이곳으로 세력을 확장해 옴에 따라 신라의 영향 아래 들어가고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거칠산군에서 동래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018년(고려 현종9)에 울주의 속현이 되었다고 1405년(태종5)에 동래현으로 되었다. 1407년(태종7)에 부산포가 개항되고, 1547년(명종2)에 현에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906년에 구포읍이 동래부로 편입되고, 1910년 10월1일에 동래부가 부산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45년 8월15일 광복이 되고, 1949년에 부산부가 부산시로 바뀌었고, 1957년1월에 구제가 실시되어 중구 등 6개의 구가 설치되었다. 1963년 1월1일에  부산직할시로 승격되면서 구포읍.사상.북면.송정리가 편입되었다. 1978년에는 대저.명지가 편입되고, 1989년에는 가락.녹산.천가 등이 편입되었다. 1995년1월1일에 부산광역시로 개칭되고, 양산 동부 5개 읍면을 편입시켜 기장군으로 하고, 진해시 웅동2동 일부를 강서구로 편입시켜 현재 15구 1군으로 되었다. <출처:부산박물관>

동래장터
동래장은 2일과 7일 열리는 5일장으로 읍내 중심에 있으면서, 동래부를 상대로 그 주변 농촌에서 생산된 각종 물품이 집산되었다. 이는 당시 동래장에서 사고 팔던 물품들에서도 잘 나타난다. 동래장의 널리 알려진 특산물은 유기와 담뱃대였다. 동래에는 담뱃대 수공업장이 많아서 그 수공업장에서 나온 담뱃대가 장날을 통해 전국으로 퍼졌다. 또 기장의 미역과 갈치, 철마의 산나물, 구포의 배와 삼베, 연산동의 참외, 금사동의 죽제품, 해운대의 멸치, 양산의 단감, 김해의 채소, 언양의 미나리도 유명했다. 그 밖에도 인근 바다의 각종 어물이나 옹기.사기그릇.옷감 같은 것도 많이 거래되었다. 동래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동래상인(내상)은 개성상인(송상), 의주상인(만상)과 함께 전국에서 으뜸가는 거상이었다. 이들은 많은 자본과 탄탄한 조직을 갖추고 상권을 장악했으며, 국내 상업뿐만 아니라 대일무역도 주도했다. 개항이 되면서 지금의 초량 용두산 쪽에 일본인들의 중심지가 형성되고 일제시기에 들어와 그곳 상권이 확대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교통이 불편한 동래장은 점차 그 기능이 축소되어 갔다. <출처:부산박물관>


주막은 술과 함꼐 밥을 팔고 숙박업도 겸하는 곳이었다. 대체로 주막은 장터, 큰 고개 밑의 길목, 나루터 등 교통의 요지에 많이 있었다. 인심이 야박하지 않은 옛날에는 주막에서 술 한잔을 마시면 두부나 부침개 따위의 안주 한 점은 거저 집어주고, 술이나 밥을 먹으면 잠도 공짜로 재워주는 인정이 있었다. 주막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정보의 중심지였고, 문화의 수준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곳이어서 문화의 전덜처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피곤한 나그네에게는 휴식처가 되었고, 여가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유흥을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출처:부산박물관>


동래유기가게. 유기는 놋쇠로 만든 일상용품이나 기구들을 말한다. 특히 조선시대 동래지방은 유기와 담뱃대가 명물로 손꼽혔다. 백동으로 만드는 수저와 밥그릇은 동래의 것이 가장 모양이 좋았으며, 유기에 색깔과 무늬를 넣는 정교한 세공은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또한 동래담뱃대는 동래장의 주된 특산물로서 조선시대 울산 병영의 무기제작창에서 만든 연관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담뱃대의 생산이 가장 성행했던 시절에 연관공들이 부르던 담바구 타령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과 해방 후 스테인레스 및 플라스틱 용기의 양산으로 유기는 차츰 가정에서 밀려나고, 담뱃대도 궐련으로 바뀌고 담배가 고급화되면서 이제는 민예품으로서 명맥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조선후기의 농업은 농법의 개량, 즉 볍씨를 논에 직접 뿌리는 직파법에서 모내리를 하는 이앙법의 전환으로 수확량을 두 배나 늘일 수 있게 되면서 급속히 발전해 갔다.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지역에서는 이러한 이앙법이 조선 초기부터 행해졌으며 조선 중기 이후에는 일반화 되어 있었다. 또한 시비법과 농기구도 점진적으로 개량화되고 다양해졌다. 대표적인 농기구로는 호미.낫.쇠스랑.써레.지게.가래.쟁기 등이 있었고, 소를 이용한 우경법도 발달하였다. 주요 농산물은 벼.보리.기장.콩이었으며, 감자.고구마.고추.호박.토마토 등 신작물의 도입 및 인삼.연초 등의 재배를 통한 생산의 전문화와 다양화도 촉진되었다. <출처:부산박물관>


부산은 한난의 두 해류가 교차하는 곳으로 옛부터 수산자원이 비교적 풍부하기 때문에 수산업이 농업 다음 가는 산업으로 일찍부터 각광을 받고 있었다. '지리지'에 나타난 부산의 수산물 종류는 조선 후기로 올수록 어업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다양해진다. 부산의 수산물 가운데 특히 대구와 청어는 옛부터 유명한 특산물이었다. 이 외에도 상어.방어.은어.복 등의 어류와 전복.굴 등의 패류, 그리고 유명한 기장미역.김.청각.다시마 등의 해조류가 유명하였다. 염업도 성행하여 동면.남촌면.부산면.사하면에 염분이 있었으며, 특히 명지 염전은 그 당시 가장 유명한 염전이었다. <출처:부산박물관>

부산의 민속
민속은 삶의 모습이다. 부산지방 전통 민속이 오늘의 부산사람의 삶에도 전승되고 있지만, 시대환경이 바뀌어 사라진 것이 많다. 그 중에서 민속의 꽃인 민속예능과 삶의 철학이 배인 의식(의례)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 전승하고 있다. 바다에서 고기 잡으며 노래한 것이 좌수영어방놀이와 다대포후리소리가 됐고, 고된 농사를 서로 도와가며 노래한 것이 수영농청놀이라른 민속놀이가 됐다. 그리고 풍농과 태평을 기원하는 부산만의 가면극인 수영.동래야류를 놀았다. 부산사람의 굵은 선과 투박하며 소탈한 성격을 반영하듯 잔 가락을 넣지 않는 굿거리장단과 원칙적인 큰 형식만 있는 자유분방한 덧배기춤이 민속놀이의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동래지역은 기방에 한량들이 출입하면서 덧배기춤에 교방춤의 성격이 가미되어 다른 지방보다 세련되고 예술적으로 승화되었다. 부산의 민속놀이에는 맺고 푸는 마디가 있는 장단과 거기에 따라 추는 신명나는 춤바람이 있어 민속놀이를 절정으로 이끌었고, 들놀음의 신랄한 양반 풍자에서 보듯이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성격이 있다. 그리고 동래 줄다리기의 경우 부산.수영과 울산 사람들을 동원할 정도로 개방적이며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는 대동놀이로 규모가 컸다. 현대사회에서 부산의 민속놀이와 의례는 애향심을 고취시키고 공동체 의식을 다지는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민족문화 발전의 바탕이 되고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좌수영어방놀이


동해안별신굿


동래학춤


수영야류


수영야류 놀이에 사용했던 탈과 복장



사자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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