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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박물관] 임진왜란 당시 무기와 부산지역 사람들의 항쟁

younghwan 2013. 6. 28.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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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한 전쟁이다. 당시 조선은 개국이래로 큰 전쟁이 없었고, 중종반정 이후 지배계층은 정통 성리학을 주창한 유학자들 중심의 관료주의 사회로 바뀌어 있었다. 반면에 일본은 오랜 세월에 걸친 내전을 종식하고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였으며, 왜군은 내전동안 쌓은 전투경험이 많은 무장세력들이 국가적으로 잉여자원화되어 외부로의 분출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임진왜란은 고니시가 이끄는 병력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부산지역에서는 정발장군이 지키던 부산진성, 동래부사 송상현의 동래읍성, 다대진첨사 윤흥의 다대진에서는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함락되었고 경상좌수영은 수사 박홍이 도망가면서 큰 저항없이 궤멸되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과 조선의 군사력을 비교해보면 일본이 포르투갈로부터 전수받은 신식무기인 조총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전통적으로 조선이 강했던 활에 비래서 크게 앞섰다고 볼 수 없으며, 수군 함선을 비롯하여 화포 등 전통적으로 왜구에 침입에 대비하였던 무기들은 일본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크게 고전했던 것은 전체적으로 조선군은 전쟁경험이 전혀 없었으며, 관료주의가 심하고 유학자 출신 관료들로 이루어진 지방 수령들은 일본과의 전쟁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선조를 보필하던 중앙의 관리들 중에는 류성룡을 비롯하여 전략적으로 뛰어난 식견과 상황대처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때문에 명나라와 협조하에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청나라가 침입하여 인조가 항복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병자호란 당시의 지배계층, 특히 중앙의 고위관료들과 대비가 되는 부분이다.


임진왜란 시기 부산사람들의 항쟁
임진왜란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자발적으로 의병에 가담하여 왜군의 토벌에 앞장섰던 부산사람으로는 24명의 별전공신이 있다. 1592년 4월 15일 동래성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항전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키거나 참가하여 대왜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붕 임진왜란 후 녹권에 실린 원종공신은 66명이었다. 동래부사 이안눌이 1609년 여러 노인에게 문의하여 66명 중에서 뛰어난 24명을 선정하였다. 이들을 별전공신이라고 하며, 24공신이라고도 한다. 수영에는 동남해의 해상방어를 담당하는 수군 총지휘관이어던 경상좌수사의 진영이 있었다. 그러나 수사 박홍의 도망으로 수영성은 쉽게 적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에 수영거주 민중과 수졸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7년 동안이나 유격전으로 수륙양면에서 적과 항전하였다. 이들 중에서 뛰어난 활약을 했던 사람을 수영25의용이라 한다. <출처:부산박물관>

조선시대의 무기
임진왜란은 전쟁에 참가한 조선, 명, 일본 삼국의 무기가 비교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은 원래 여진족의 기병전술에 대항하는 장병전술에 치중한 결과, 단병접전에 뛰어난 왜군에 고전하였다. 때문에 임진왜란을 계기로 활과 화살위주의 무기체계에서 조총 중심의 포수를 위주로 하면서, 창검과 궁시가 보조하는 전술로 전환하였다. 조선시대의 무기는 첫째, 재래식 병기로 활과 화살.편전.쇠뇌.창.도검.환도가 있었다. 둘째, 화약병기로 소화기와 대형 화포 등 여러 종류가 있었다. 그러나 개인 화기인 조총은 일본이 앞섰다. 또 작열탄인 비격진천뢰, 로켓형 화기인 신기전, 전차의 일종인 화차가 있었다. <출처:부산박물관>


수레와 총통, 복제품, 조선


별황자총통, 중백자총통, 총통, 돌로 만든 대포 탄알


화살촉(동래 수안동 출토, 조선 15~16세기), 촉돌이와 깍지 (19세기)


조총


장창, 동래읍성 해자 출토, 16세기


활, 화살과 화살통, 19세기


칼, 동래 수안동 출토, 15~16세기


투구, 동래읍성 해자 출토, 투구 안쪽에 '동래진상'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찰갑, 16세기, 동래읍성 해자 출토


복원된 찰갑


진시무사초고, 1592년, 서애 류성룡

류성룡이 당면한 업무를 임금께 올리는 글의 초고
금일의 사세는 이미 위험과 핍박이이르러 다시 손댈 곳이 없습니다. (중략). 신이 진달할 일이 있습니다. 국가의 일이 위급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지만, 만에 하나라도 믿을 희망은 인심입니다. 인심이 만약 와해된다면 더욱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무릇 군공과 작상 및 면천과 면역 등의 일을 모두 획일적인 규정을 만들어 유사가 그날로 시행함으로써 옛사람이 '상을 줌에 때를 넘기지 않는다'는 뜻에 맞게 하소소 그리고 군대와 민간인으로 왜적을 잡아 얻은 것은 다소를 막론하고 비록 금수.우마라도 왜적을 잡은 사람에게 즉시 주어 관이나 또는 남이 빼앗지 못하게 한다면, 어리석은 백성들도 일신의 이익이 왜적을 죽이는 데 있음을 알고 다투어 일어나 왜적을 쏠 것이니, 적의 형세는 거의 적어지며 쇠약해질 것이빈다. (중략) 강원도는 경상.함경 두 도의 사이에 끼여 있기 때문에 산림이 험하여 도내 군정은 비록 많지 않지만, 산골짜기에서 사냥으로 생업을 삼는 산척이라 하는 사람의 수가 적지 않습니다. 만약 많은 상으로 사 모으고 그 집안 권속을 넉넉히 구제하여 흩어져 있으면서 복병이 되어 낮이나 밤에 출벌하여 토벌한다면 북로로 왕래하는 적은 머리와 꼬리가 끊어지니 동남의 형세가 서로 통할 수 있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서울을 수복하는 형세는 역시 3개의 진로로 나누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양주, 포천, 적성, 영평, 가평 등 여러 고을의 군대를 고언배 같은 한 장수에게 소속시켜 동쪽을 차단하고, 교동.강화.고양.교하 등 여러 고을 군대도 하나의 장수에게 소속시켜 서쪽을 차폐하며, 한강 이남의 광주.과천.수원 등 여러 고을의 군대도 하나의 장수에게 소속시켜 남쪽을 차단합니다. 3방면의 군대가 합세하여, 서로 호응하여 적이 적으면 군대를 나눠 복병을 설치하고, 적이 많으면 군대를 합하여 공격 토벌합니다. 또한 중신을 시켜 그 지역에 절제로 통행하게 함으로써 으병과 관군이 서로 흩어지지 못하게 하고, 진퇴와 지속을 함께 한 뒤에야 형세가 장성하여 왜적을 비로소 도모하겠습니다. 따라서 강원도의 군대는 동쪽의 군대와 합세하고, 강화의 의병은 서쪽의 군대와 합세하며, 충청.전라의 군대는 남쪽의 군대와 합세합니다. 그래서 혹은 그 앞에 유인하고, 혹은 그 뒤에서 공격하여 기회를 보고 편리함을 이용하며 마음을 가지런하게 하고 힘을 하나로 뭉쳐 사방에서 구름같이 모여든다면, 적은 그물 속에 토끼와 같아질 것입니다.(중략) 변란이 생긴 이래로 한 사람도 국난에 죽은 신하가 없고 모두들 달아나 도망가는 것으로 계책을 삼았습니낟. 심한 사람은 도내의 정병을 모아 스스로 자신을 호위하다가 적이 온다는 보고만 들으면 먼 곳으로 도피합니다. 이 역시 급히 계칙해서 상과 벌으 가한 연후에야 인심이 거의 숙정하고 권장하게 될 것입니다. 경상도는 적병의 연수입니다. 드건대 '그곳의 인심은 적을 토벌하는 데 매우 떨쳐 일어나지만, 단지 큰 흉년이 들어 군량과 백성의 양식이 텅비어 남은 것이 없다'고 합니다. 만약에 경상좌도가 붕괴된다면 경상우도를 보전할 수 없고, 경상우도가 붕괴된다면 호남을 보전할 수 없으며, 호남이 붕괴된다면 충청도도 차례로 적의 침략을 받으니, 팔방에 한 치의 말끔한 땅도 없게 될 것입니다. 금년도 전라도는 매우 풍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바라건대 호남의 곡식을 차례로 수송하여 경상우도를 구제하고, 또 좌도와 서로 돕게 하시며, 또한 별도로 곡식을 모집하는 관리를 두어 시급하게 구분 처리하여 많은 사람이 죽는 시급함을 구제한 뒤에야 남방을 거의 보전할 것입니다.(중략) 적은 표독하고 난폭하여 삶을 가볍게 여겨 돌격전에 능하고 철환과 창검이 모두 예리한 기구라 우리 군대가 당할 수 없습니다. 사방에서 군대를 주관하는 사람들도 형세를 이용하여 유리한 데로 인도하지 못하고, 언제나 오합지졸을 모아 많은 것으로 귀함을 삼으며, 약산한 날에 천천히 달려가되 망을 보는 데 자세하지 못하고, 척후도 멀지 않습니다. 그리고 적의 간첩은 매우 많아 이목이 사방에 흩으져 있으니, 우리의 동정을 저들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군사는 언제나 싸우기만 하면 매양 패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정예한 군사를 뽑아 그 복색을 섞어 입히되 자기 편만 서로 식별하도록 하여 먼곳과 가까운 지역에 흩어서 배치합니다. 그리고 몰래 서로 약속한 다음 혹은 낮에 혹은 밤에 출몰이 일정하지 않게 하면서 저으로 하여금 우리 군대의 다소를 헤아리지 못하게 하소서. 서울 같은 곳도 사방 수십리 이내에 모두 이같이 하소서. 성내에 이르러서도 역시 계책을 세워 불을 지르며 겁을 주어 적이 어수선하여 주야에 휴식하지 못하게 한다면 10여일이 지나지 못하여 적의 기세가 크게 꺾일 것이니, 이보다 더 나은 계책은 없습니다. (중략). 왜적과 우리 백성이 성에 섞여 거처하므로 거의 서로 잊고 있으니, 이 형세를 이용할 만합니다. 만약 잘 계획하여 밤을 이용해서 공격하되 안팎이 서로 응하고 몇개의 고을이 함께 발동한다면 함흥의 소굴에 있는 적 따위도 소탕하여 뒤집어 엎을 수 있고, 그 나머지 군사도 차례로 평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먼저 영세한 적을 잡음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사실을 알아서 미리 대비하게 하였고, 각처의 관군도 서로 둘러앉아 보기만 하고 힘껏 싸우지 아니하니, 특히 가슴이 아픕니다. (중략). 신은 내세울 것이 없는 사름으로 일찍이 황공하게 대신이 되어 국가의 일을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만번 죽어도 아까움이 없습니다. 지금 아뢰는 것은 장님의 말이어서 모두가 합당하지 않습니다. 조정이 반드시 벌써 시행하였는데, 신은 미처 듣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국의 일이 하루하루 더 위태함을 볼 때 마음이 꺽이고 뼈가 끊기는 듯하여 밤낮으로 눈물을 흘립니다. 사소한 것은 모조리 아리지 못하고 삼가 그 대개만을 모아 우러러 채택에 대비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구구한 정성을 조금이라도 가엾게 여겨 보살펴 주소서.
- 서애선생문집, 5권 - <출처:부산박물관>


부산포해전, 부산포해전은 1592년 9월1일 이순신 장군의 전라수군이 여수에서 부산포로 이동하여 왜군과 싸운 해전이다. 함대의 수가 일본군에 비해 1/3밖에 안되는 수적인 열세와 왜군이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불리한 여견 속에서 적선 100여척을 격파한 대첩이었다. 이 전투로 일본 수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한편으로 전라수군과 경상수군이 연합하여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출처:부산박물관.

부산을 지킨 사람들
임진왜란 시기에 부산은 왜군의 최초 침입지, 장기간 주둔지로서 많은 피해를 입은 지역이었다. 때문에 왜군에 항전한 인물들이 다른 지역보다 많았다. 송상현은 1591년 동래부사로 부임하였는데, 전쟁이 일어나자 '싸워 죽는 것은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전사한 인물이다. 부산진첨사 정발은 흑의 장군으로 불리었으며, 왜군에 맞서 가장 용감하게 싸훈 장군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다대진첨사 윤흥신은 왜군을 맞아 다대진을 지키다 전사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서 부산포에 진격하여 100여척의 일본 선박을 쳐부순 장수였다. 사명당 유정은 승병을 일으킨 승려로서, 강화회담의 사절로 활약하였으며 부산진성 축성에도 기여하였다. 녹도만호 정운은 부산포해전에서 이순신의 선봉장이 되어 활약하다 전사한 인물이다. 이 밖에도 부산진성.동래성.다대진성.부산포해전에서 항전하다 죽은 부장들과 관리. 민간인. 무명용사들이 있었다. 한편 큰 전투 외에도 각지에서 의병으로 활약한 별전공신과 수영의용 등이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표충사 제영, 충무공 가승서, 조선


열녀금섬사당편액, 부산 충렬사의 이열녀각 안에 있는 편액 중 하나이다.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의 측실로 왜정에 항거하다 순절한 한금섬의 제향을 받들기 우해 위패를 대신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송산현 천곡집, 1895년. 송상현의 시문집으로 2권1책의 목활자본이다. 1895년(고종32)에 9대손 달호가 편집.간행하였다.


송상현 신도비명 탁본첩, 17세기 후반. 글은 송시열이 지었으며,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당대 최고의 문사 2인이 합작하여 만든 비의 탁본으로 임진왜란시 순국한 송상현의 위상을 엿보게 한다.


포충속후록, 조선, 포충록은 동악 이안눌이 동래 출신 24공신의 집안에 의용이라는 편액을 걸게하여 그 공적을 포상한 것이고, 이후 후손의 등가에 따라 포충속록을 내렸으며, 세월이 지나자 그 후손들에게 은전을 베풀기 위하여 또 다시 포충속후록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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