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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은 고려말 이후 왜구가 한반도 해안지역에 출발하여 약탈하면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국방상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조선이 개국한 이후 왜구를 토벌하는 등 강.온 양면으로 여러 조치를 취하면서 일본과의 교역을 위해 부산포, 염포(울산), 제포(진해)에 왜관을 설치하였다. 이후에 한반도 남해안은 일본과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다가 중종대에 일본이 삼포왜란을 일으키는 등 긴장관계가 조성되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이 임진왜란 전 조선수군의 전력을 강화하고 새로운 무기의 개발 등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중기 내력의 산성이나 읍성 등은 전쟁에 대비하지 못하였으며, 각 지방의 군사체제와 전쟁에 대한 준비는 미흡했던 반면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했던 수군의 상황은 상대적으로 양호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임진왜란 개전 이후 연안항로에서 우위를 가져갈 수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전기 왜관이 설치된 삼포 중 하나인 부산포가 있었던 부산에는 행정의 중심이었던 동래를 중심으로 부산포영.다대포영.해운포영.서평포영 등 여러 진이 설치되었으며 군사적 성격이 진성이 많이 축조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부산에 함락한 왜군은 부산진성, 다대진성, 동래읍성에서 전투를 벌렸으며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진 첨사 정발, 다대진 첨사 윤흥신을 비롯한 군.관.민들이 일본을 공격에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면서 왜란 극복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조선후기에 기록화를 통해 이들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이후 일본은 거침없이 북상하여 보름만에 한양을 점령했는데, 신립장군이 크게 패한 충주에서 전투 외에는 큰 저항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일본이 부산지역을 공격할때 참혹하게 살육을 하여 다른 지역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하였다고 하나, 당시 일본의 침입에 대응한 지방관을 비롯한 지배계층의 모순을 잘 보여주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부산지역의 관방
조선의 국방체제는 5위의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구성되었는데, 1457년(세조3)에 지방군제인 진관체제가 완성되었다. 진관체제는 각 도에 절도사를 육군인 병영과 해군인 수영에 파견하고, 관내의 군사요충지에 몇 개의 거진을 두고 그 밑에는 여러 개의 진보를 두는 방식으로 편성하여 지휘권을 독립적으로 갖게 한 것이다. 동래현은 울산에 있는 경상좌병영 관하의 경주 진관에 속하는 진 중에 하나였고, 수군의 경우 주진인 경상좌수영 아래에 부산포영.다대포영.해운포영.서평포영 등 여러 진이 있었다. 1655년(효종6)에 동래부는 독립된 진으로 승격되어 양산군과 기장군까지 관리하게 되었다. 그 외 지방에서 발생하는 군사적인 긴급 사태를 중앙에 급히 알리기 위한 봉수제와 그 내용을 문서로 알리기 위한 역원제가 있었다. <출처:부산박물관>

부산지역의 성곽
부산은 일본과 가까워 왜구의 침략을 가장 먼저 막아야 하는 국방상의 요지였기 때문에 군사적 성격의 진성이 많이 축조되었다. 또한 군현의 주민보호와 군사.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가지는 읍성, 유사시 성에 피난하거나 항전하기 위해 쌓은 산성이 있다. 부산에는 현재 30여 개의 성곽이 분포되어 있다. 대표적인 성곽으로는 가장 오래된 성으로 알려진 삼국시대의 배산성지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부산진성지, 군사.행정의 중심지인 동래읍성, 전국에서 가장 큰 산성인 금정산성, 경상좌도의 수군 본영인 좌수영성지 등이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기와, 동래읍성지 출토 유물, 조선


전돌, 접시, 좌수영성지 출토유물


백자접시, 토제품, 골제 인식표, 좌수영성지 출토유물


분청사기귀얄문대접, 그물추, 연목기와, 금단곶보 출토유물


아이봉수대 출토 유물


횡령산 봉수대, 해발 427m의 산정상에 위치한 횡령산봉수대는 국경이나 바닷가에 위치하는 연변봉수로 동래부에서 관할하였다. 서쪽으로 구봉봉수, 동쪽으로 간비오산봉수, 북으로 계명산봉수로 연락되며, 부산에서 간비오산봉수와 함께 가장 오랫동안 이용된 봉수였다.


부산지역 봉수전달경로


전국 봉수전달경로

조선시대 한일관계
조선은 개국 후 국가기반이 안정되자 1404년 일본과 정식 국교를 맺었다. 하지만 고려 말 이후 기승을 부리던 왜구가 사라지지 않자, 왜구들이 더 이상 약탈하지 않고도 생필품을 사갈 수 있도록 세 포구(부산.진해.울산)에 왜관을 두었다. 이 곳으로 일본사절과 상인이 들어와서 외교와 무역을 하였다. 왜관에는 선창, 숙소, 창고 등 각종 시설들이 들어서고, 장기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점차 늘어났다. 조선의 왜관 통제가 강화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왜관의 일본인들은 쓰시마주의 지원을 받아 1510년 삼포에서 난을 일으켰다. 이후 크고 작은 왜란.왜변이 계속 일어나, 양국 외교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이윽고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부산은 왜군의 최초 침입지, 강화회담 사절의 통행로, 왜군으 잔류지, 정류재란 침입로 등으로 오랫동안 많은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끝나고 양국이 다시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사절과 상인의 교류를 위한 왜관이 마련되었다. 조선 후기 왜관은 유일하게 부산에 마련되었다. 부산에는 대일 외교와 무역에 필요한 각종 시설들이 들어서고 수많은 일본 사절과 상인이 부산을 찾았다. 조선사절이 일본에 갈 때도 부산에서 출발하였다. 부산을 관할하는 동래부사의 역할이 중요시되고, 이 지역 해안 방어를 총괄하는 좌수영의 좌수사, 부산진.다대진 등 각 진을 다스리는 첨사도 역할이 더욱 커졌다. 왜관을 통해 일본의 사정을 알 수 있었고, 조선문화.풍습이 일본인에게 전해지기도 하였다. <출처:부산박물관>


임진왜란 전의 국내외 정세
16세기 후반 동북아시아는 농촌시장과 화폐경제의 발달, 국제교역의 증대와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변혁기로 정치적 상황도 혼란스러웠다.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는 명에 대한 조공과 명의 회사가 합법적인 무역을 바탕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을묘왜변 이후 조선과의 무역이, 영파의 난 이후 며나라와의 무역이 각각 폐지되어 경제적 타격을 입게 되고,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는 붕괴되어 갔다. 조선에서는 네 차례의 사화 후 붕당정치가 시작되었지만 점차 무비가 해이해졌다. 명나라는 북로남왜의 침입으로 국력이 쇠퇴하였다. 일본은 상풍화폐경제외 대외무역의 발전 속에 전국시대의 통일을 이루었지만 정치.경제.군사적 혼란은 여전하였다. 이러한 일본 국내의 어려운 문제를 조선에 대한 전쟁을 도발하여 해결하려 하였다. <출처:부산박물관>


임진왜란 당시 동아시아 3국 국력비교


징비록, 서애 유성룡, 1647년. 과거의 잘못을 후일의 거울로 삼는다는 뜻으로 임진왜란의 치란재상이었던 유성룡이 임진왜란에 관한 전말을 적은 수기이다. 유성룡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저술하였으며 1647년(인조25)에 간행하였다. 책의 내용은 임진왜란 이전의 대일관계와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황, 이후의 기사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 당시의 근본사료로 임진왜라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부산박물관>


임진장초, 복제본, 국보 76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중 1592년(선조25) 4월1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재임시로부터 1594년(선조27) 1월10일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직할 당시까지의 출전경과, 왜군의 정황, 군사상의 건의사항, 진중의 겨이 및 준비상황 등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글로 써서 임금에게 올린 장계의 초본이다. <출처:부산박물관>


조선정벌행군도, 복제본, 17~19세기,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탄 안택선을 중심으로 한 일본군이 조선을 치러가기 위해 시모노세키해협을 끼고 서쪽으로 가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풍속화

전쟁의 경과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25)에 왜가 조선에 침입하여 1598년(선조31)까지 7년 동안 있었던 전쟁이다. 1592년의 왜군 1차 침공을 임진왜란, 1597년의 2차 침입을 정유재란이라 한다. 1592년 4월14일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보름 후에 한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승리, 의병의 활약, 명나라 군사의 참전 등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1593년 6월 이후 전쟁은 소강상태였다. 명나라는 일본과 교섭을 강행하였으나, 도요토미가 조선 정벌욕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결력되었다. 회담이 결렬되자 왜는 1597년 7월 재침입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관군 정비, 의병의 활약 등으로 접전을 이루다 이순신의 해상권 장악으로 왜군이 물러나고 전쟁은 끝났다. <출처:부산박물관>


임진왜란 당시 주요 전투 및 이동경로


어제어필


선조국문교서, 보물 961호, 조선의 14대왕 선조가 1593년 임진왜란으로 파천하여 의주행재소에 있을 때 백성에게 내린 교서로서 닥지에 한글로 쓰여 있다. 이 문서는 임진왜란사의 귀중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국문학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회본조선정벌기 17~19세기


동래부순절도, 복제본,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15일 동래성에서 일본군의 침략을 받아 싸우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을 비롯한 성민들이 항전 내용을 그린 기록화이다. 부산진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동래성으로 쳐들어간 일본군을 맞아 부사 송상현이 군사들과 함께 성 위에서 싸우는 상황과 길을 빌리자는 팻말을 든 일본군을 향하여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는 팻말을 성밖으로 던지고 죽음의 결전을 벌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동래읍성 앞 전투장면


객사에서 동래부사 송상현이 국왕에 절을 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고, 북분 바깥으로 전황을 알리기 위해 떠나는 전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임진전란도, 복제본, 1592년 4월14일 부산진성을 함락한 후 왜군의 다수 병력은 동래로 진격하고, 나머지 병력은 다대진을 포위하였다. 다대성민의 일치단결로 1차 침공은 격퇴하였으나, 15일 왜군의 재공격에 의해 다대진성은 결국 함락되었다. 임진전란도는 1834년 동래부 군관 이시눌이 임진왜란 당시 첨사 윤흥신과 아우 윤흥제가 다대진의 군.관.민을 지휘하여 왜군과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출처:부산박물관>


부산진순절도, 복제본, 부산진순절도는 1592년 4월13일(음력)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끈 조선 침략 선봉군이 부산포를 내습해 다음날 부산진성을 침입하자, 부산진첨사 흑의장군 정발 이하의 군인과 주민들이 장렬히 싸우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1760년 동래부사 홍명한이 화원 변박을 시켜 옛 순절도를 모사한 것이다. 그림에는 남문 위에서 검은 옷을 입고 분전하는 정발 장군의 모습, 건물 안에는 장군을 따라 죽은 애향, 성곽 주변에서 양군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또 부산진성 주위까지 왜군의 선박이 접근해 있어 당시의 지형을 알 수 있다. <출처:부산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