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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박물관] 고려시대의 부산

younghwan 2013. 6. 19.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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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시대 김해지역과 함께 가야연맹을 이끌었던 금관가야의 중심지역이었던 동래를 중심으로 한 부산지역은 통일신라시대를 지나면서 중앙집권체제에서 일개 지방으로 그 위상이 떨어졌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경주와 가까웠던 지리적 잇점이 사라지면서 부산은 정치중심이었던 수도 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지방으로 바뀌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동래군은 지방관이 파견되는 군현으로 동평현과 기장현을 속현으로 두는 비교적 큰 고을이었나, 고려시대에는 그 지위를 상실하고 인근 울주의 속현이 바뀌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고려말 왜구의 침입을 제외하고는 일본과의 교류나 전쟁이 많지 않았기때문에 중요한 역사적 현장에서 멀어진 변방지역에 불과했다. 이런 까닭에 부산에는 고려시대와 관련된 유적지들이 많지 않은 편이며, 경제력 또한 크지 않았기때문에 큰 사찰 또한 많지 않았다. 부산은 고려말과 조선초를 거치면서 왜구의 침입이 극심해지고, 이에 따른 일본과의 교류창구로서 그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부산의 고려시대 유적지로는 지방관아였던 동평현과 기장현의 읍성을 비롯하여 여러지역에 청자를 굽던 가마터, 만덕동의 만덕사 절터 등이 남아 있다. 출토된 유물 또한 역사성이나 예술성 등이 뛰어나지 않은 편이며, 당시 지방민이 살았던 모습을 보여주는 유물정도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부산
고려(918~1392)의 후삼국 통일 이후 부산은 정치 중심에서 먼 지역이 되었으며, 고려 초기에는 울산, 양산 등 주변지역에 비해서도 상대적으로 열악한 조건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지금의 부산에 해당되는 동래의 사례에서 확인된다. 통일신라 시기에 이미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이었던 동래군은 고려 초 그 지위를 상실하고 1018년(현종9)에는 울주(울산)의 속현으로 편제되고 있었으며, 동래군의 속현이었던 기장현과 동평현은 각각 울주와 양주(양산)의 속현이 되었던 것이다.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고려태조는 귀순한 지방세력가에게 포상의 의미로 출신지 군현을 승격시켜 지위를 높여주고 그 관할구역을 확대시켜 주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동래군의 지위격하는 강한 징벌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후삼국 분립기 부산이 후백제의 영역에 포함되어 고려와 대치하는 양상을 띠었던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중기 이후 동래지역의 토착세력인 정씨 일족들, 그 중에서도 특히 의종때 정과정곡으로 유명한 정서와 같은 비중있는 인물을 배출하는 등, 부산지방은 서서히 정치적 소외에서 벗어나게 된다. 양주와 울주에 분산 소속되어 있던 동래지역이 12세기 초의 인종대에는 지방관이 파견되는 독립군현으로 승격되었던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또한 부산지방은 해안과 큰 강을 끼고 있는 지리적 여건에 의해 대몽항전기와 삼별초 항쟁기, 서.남해안의 왜구 발호시기를 거치면서 점차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으며, 이후 조선시대에는 왜와의 통교를 위한 관문으로 역사의 전면에 떠오르게 된다. <출처:부산박물관>

행정제도
고려의 지방 행정제도는 군현제도를 근간으로 하여 중앙에서 외관을 파견하는 중앙집권적 체제였는데, 이러한 고려의 군현제는 체제정비를 거처 5도양계와 일반 주현 및 속현으로 정비되었다. 고려시대 부산지역에는 동래현과 동평현, 기장현의 세 현이 있었는데, 그 중 동래현은 본래 중앙관이 파견되고 동평현과 기장현을 속현으로 둔 독립군현이었으나, 그 지위가 격하되어 1018년 울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이후 다시 독립군현으로 승격된다. 한편, 동래현과 기장현에는 특수 행정구역으로 여러 개의 향과 부곡이 있었는데, 동래현과 동평현 소속의 생천향, 조지도.조정.형변.부산 등의 부곡과 기장현 소속의 고촌.결며.사량촌.사야부곡이 그것이다. 이러한 특수 행정구역은 고려말 사회변동과 하층민의 저항으로 조선초기에 이르면 대부분 일반촌락으로 상승하게 된다. <출처:부산박물관>

동평현성지
부산진구 당감동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동평현성지는 고려시대에서 조선초기까지 사용되었던 성곽으로, 동평현의 읍성이다. 동평션은 삼국시대에는 대증현이었는데, 757년(경덕왕16)에 동평현으로 이름을 고쳐 동래군의 속현이 되었으며, 1018년(현종9)에는 다시 양주(양산)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중기 이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축성되었다. 발굴에 의해 판축기법으로 2차례에 걸쳐 축조하였음이 밝혀졌으며, 각종 청자, 분청사기, 명문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출처:부산박물관>


동평현성지 출토 유물, 고려 11~13세기


녹청자, 고려 11~13세기, 동평현성지.기장 고읍성지, 녹청자는 잡물이 많은 태토에 암록색.녹갈색을 띤 거친 유약을 입힌 조질청자이다. 일반적으로 햇무리굽청자와 함께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초기청자로 분류되어 왔으나 많은 유적지에서 녹청자가 발견되어 비교가 가능해짐에 따라 11세기경의 지방 청자로 파악되고 있다.


청동숟가락, 청동합


청동잔


청동병, 고려 11~14세기, 출처미상


동경, 고려 11~14세기, 출처미상

기장고읍성
기장읍 교리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통성으로, 통일신라 시기에 축성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조선시대 기장읍성이 축조되기 전까지 사용되었던 성곽이다. '대종지지'에 의하면 고려후기에 왜구의 침입으로 성이 함락, 파괴되자 1392년(공양왕3)에 재축조하였는데, 이때 성의 규모는 길이 3,208척이었다고 한다. 성벽 기단부에 평평한 돌을 2~3단 쌓고 그 위에 흙과 모래로 판축하였으며, 성벽 바깥쪽 퇴적토에서 소문청자 2범이 출토되었다. 읍성 주변의 집터와 민묘에서도 다량의 소문청자와 함께 음각, 양인각, 상감청자가 출토되었다. <출처:부산박물관>


인장, 동제봉인


녹청자대접, 청자 소형접시, 고려 11세기, 기장 교리유적 출토유물


병, 고려 11세기, 기장 교리유적 출토유물

만덕사지
부산 북구 만덕동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만덕사지는 중앙부의 장방형 축대(금당지)를 중심으로 만덕1동의 대부분을 차지한 큰 규모의 절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산박물관에서 금장지를 중심으로 3차(1990~2002년)에 걸쳐 발굴 조사한 결과 다량의 고려시대 막새.평기와.치미.전.자기류와 함께 다양한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다. 주변에 흩어져 있던 3층석탑 1기는 현재 부산박물관에 복원전시되어 있다. 출토유물의 내용과 특징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 또는 고려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잔, 청자화형접시, 고려 10~11세기, 부산 만덕사지,


햇무리굽 청자, 고려 10~11세기, 부산 만덕사지, 중국 월주요의 영향으로 생산된 우리나라의 초기청자로 넓은 굽이 햇무리처럼 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완이나 대접이 대부분이며 9~11세기에 제작되었다. 대표적인 산지는 중서부지방에 집중되어 있는데 경상도 지역에서 발견된 예는 극히 드문 편이다. 이 완은 만덕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초기청자연구의 좋은 자료이다. <출처:부산박물관>


서까래기와, 귀목문암막새,


'기비사'명 기와, '송선사'명 기와,


귀목문수막새, 연화문수막새, 고려 10~14세기, 만덕사지 출토


기와 얹은 모습


망새, 고려 11~12세기, 부산 만덕사지, 망새라 큰 건물의 용마루 양끝에 얹는 큰 장식기와를 말하며, 보통 올빼미와 같은 날짐승의 꼬리모양을 하고 있어 치미라고도 한다. 건물을 보다 웅장하게 보이게 하여 권위나 위엄을 상징하며 길상과 벽사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만덕사지 출토 치미는 큰 새의 날개 일부만이 남아 있는데, 날개에 크고 작은 꽃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불교공예
불교공예품은 일반적으로 사찰에서 불교의식을 행하거나 스님들이 수행할 때 필요한 불구가 중심이다. 그 종류는 일정하지 않지만 경전의 내용에 따라 크게 범음구.장엄구.공양구.승구.밀교법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범음구로는 범종.법고.목거.운판.금고.경.법라 등을 들 수 있고, 장엄구에는 사리구.천개.수미단.불감.번.화만 등이 있다. 공양구에는 향.등.꽃.음식공양구로 나눌 수 있고, 승구에는 불의와 승의.염주.발우.석장.불자.죽비 등이 있으며, 밀교법구에는 금강저와 금강령 등이 속한다. 보통 금속으로 만들어지나 나무.가죽.천.점토를 재료로 사용한 예도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청동반자, 고려 15세기


'상주 안수사'명 동종, 고려 11~12섹, 상주 안수사. 충북 제천부근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고려시대 동종이다. 종의 앞면에는 상주 안수사 사찰이름과 함께 조성연도와 내용이, 뒷면에는 발원자와 장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신라 종을 계승한 고려 종의 전형으로 비천상을 대신한 보살상으로 되어 있으며, 그 위로 닫집이 표현되어 있다.


청동명문향로(고려 13세기), 동제정병(고려 11~13세기)

불상
불상이란 불교 교리에 의해 예배대상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으로 엄격히 말하자면 부처의 존상만을 의미하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는 부처의 상은 물론, 보살상.천왕상.명왕상.나한상 등 불교의 예배대상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불상은 나발로 표현된 머리 위에 육계가 얹혀 있고 이마 중앙에는 백호가 있으며 몸에는 장식품 없이 대의를 통견 또는 우견편단으로 걸친 성자의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보살상은 화려한 보관을 쓰고 귀걸이.목걸이.팔찌.영락 등으로 몸을 장식하며 천의와 군의를 걸친 인도 귀족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취하고 있는 자세나 손의 모습, 지물 등에 따라 부처는 석가여래.아미타여래.약사여래.대일여래 등으로, 또 보살은 미륵보살.관음보살.지장보살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금동여래좌상, 고려 11~13세기


석조여래좌상, 고려 11~14세기, 이 불상은 광배와 대좌는 없어지고 불신만 남은 것이다. 파손으로 선명하지는 않지만 손모양은 배 앞에 두 손을 모은 선정인으로 보인다. 이 손 모양은 석가가 보리수 아래 금강좌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취한 수인으로서 이 좌상은 석가모니불로 추정된다. <출처:부산박물관>


정서의 '정과정'
고려 때의 문인 정서가 지은 가요로서, 우리말로 전하는 고려가요 가운데 작자가 확실한 유일한 노래로 주목된다. '고려사' 악지에 제작동기와 이제현의 한역시가 수록되어 있고, 훈민정음으로 풀이된 우리말 노래는 16세기에 편찬된 '악학궤범'에 전한다. 작자인 정서는 동래 호장이었던 정문도의 증손인데, 문음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벼슬이 정5품인 내시낭중에 이르렀고, 17대 인종비 공예태후의 여동생과 혼인함으로써 인종과 동서지간이 되어 오랫동안 왕의 총애를 받아왔다. 그러나 정서는 이질인 의종이 즉위한 뒤 왕제인 대녕후 경의 추대사건에 가담했다는 참소를 받아 본관지인 동래로 내려왔는데, 중앙정계를 떠나 본관지에서 생활하게 된 정서는 동래현의 남쪽 10리쯤 되는 곳에 정자를 짓고 참외를 심어 스스로 호를 과정이라 하였다. 그리고 자연을 벗삼아 세월을 보내면서 왕의 부름을 기다리다가 왕을 그리는 애틋한 정을 읊은 노래를 불렀다고 한느데, 작자의 호를 따서 후세 사람들이 이 노래를 '정과정곡'이라 하였다. 유배지에서 신하가 임금을 그리워하는 정을 절실하고 애달프게 노래하였다하여 '충신연주시자'로 널리 알려졌으며, 그 때문에 궁중의 속악 악장으로 채택되어 기녀는 물론 사대부간에도 학습의 대상이 되었다. <출처:부산박물관>


악학궤범. 1493년(성종24)에 예조판서 성현, 무령군, 유자광 등이 조선시대의 의궤와 악보를 정리하여 엮은 악규집이다. 제향.조회.연향 때 악기를 진설하는 법과 아악의 악보와 악장 등 조선 초기의 음악에 대한 전반적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부산지역의 청자
부산지역에서 청자가 출토된 유적은 만덕사지로 대표되는 사찰유적과 동평현성지.기장고읍성지 등의 성곽유적, 기장 교리의 집터유적과 분묘유적.온천동.덕포동 등지의 가마 유적이 있다. 대부분이 지방산의 조잡한 소문청자이지만,만덕사지에서는 3차 조사시 대표적인 초기 청자인 해무리굽청자완 1점이 출토되었다. 음각이나 양인각, 상감 등도 있으나 소문청자에 비해 그 분량이 적으며, 기종에 있어서도 광구병이나 매병, 항아리, 잔, 뚜껑 등이 소량 출토되기는 하나 대접.접시류가 주류이다. 부산지역은 강진.부안 등 상품 청자가마가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지역과 원거리에 위치함으로써 제작기술의 전파가 쉽지 않았을 뿐 아니라, 뚜렷한 소비계층이 없어 중.하품만이 소량 생산되었다. <출처:부산박물관>


청자병, 고려 10~11세기, 명장동 유적 출토유물


청자소문접시, 청자바리, 고려 11세기, 문현동 유적 출토유물


백자접시, 백자대접, 백자탁잔


백자주자, 고려 11세기, 일반적으로 고려시대의 자기는 청자가 많이 알려져 있지만 백자, 흑유자 등도 소량 제작되었다. 고려백자는 청자의 발생보다 약간 늦은 10세기 중엽 경기도 용인과 같은 내륙지방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조선의 경질백자와는 달리 태토가 약간 무른 편으로 연질백자라 하여 우윳빛이 도는 유백색 유약이 시유되었으며 표면에는 미세한 빙렬이 그물처럼 나 있다. 그러나 고려백자는 청자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으므로 기형, 무늬, 기법 등 그 특징이 모두 청자와 대동소이하고 다만 재료에서만 차이를 보일뿐이다. <출처:부산박물관>


고려청자
청자란 가마에서 구운 후 유약의 색조가 푸른 빛을 띠는 도자기의 일종이다. 중국월주요의 영향을 받아 통일신라 말기부터 생산되었고, 고려에 들어와 더욱 발전하였다. 서남해안, 특히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을 중심으로 많이 생산되었다. 초기에는 순청자를 중심으로 생산이 이루어졌으나 점차 장식기법이 다양하게 발전하여, 12세기 중엽에는 상감기법을 청자제작에 응용하는 독창적인 방법이 등장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1231년 이후 계속된 몽고의 침입으로 사회가 불안해지자 태토와 유색, 기형 등이 모두 급격히 퇴보하기 시작하지만, 상감기법은 이후 분청사기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출처:부산박물관>


청자상감국화문사이호(고려 13~14세기), 청자병,


청자잔.탁잔, 고려 11~14세기


청자삼감국당초문합, 고려 13세기


청자삼감국화문유병, 청자음각 '장길'명유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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