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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관은 조선시대 일본과의 통상을 위해 무역항에 설치한 것으로 상인들에 숙박을 제공하고 무역 거래를 할 수 있도록 한 곳이다. 고려시대 일본과의 무역은 신안앞바다에서 침몰된 무역선에서 출토된 유물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교적 원활하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중기 이후 몽골세력에 고려가 굴복한 이후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이 있었으나 실패로 돌아가면서 당시 일본에 대해서는 금수조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일본내부 사정 또한 주도세력이 교토의 귀족세력에서 쇼군의 막부를 중심으로 지방호족이라 할 수 있는 사무라이세력으로 주도세력이 교체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큐슈지역의 사무라이의 후원을 받은 왜구들이 한반도와 중국해안지방 노략질이 극심하여 고려와 조선의 조성은 왜구들을 토벌하는 한편 회유책으로 무역을 위한 왜인의 왕래를 허락하였다.

 조선은 당시 한.일간의 무역을 주도하였던 쓰시마도주의 요청으로 한반도에는 부산포, 내이포(웅천), 염포(울산)에 무역거래소 역할을 했던 삼포 왜관을 설치하였다. 이후 왜관은 크게 번성하였으나 중종대인 1510년 삼포왜란으로 폐쇄되었다가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막부간 외교관계가 정상화되면서 부산포에 초량왜관이 설치되어 공식적인 무역과 외교가 이루어졌다. 구한말 조선은 서구에는 개항을 하지 않았으나, 일본과는 강화도조약을 통해 부산, 인천, 원산을 개항하였는데 당시 조선의 관리들은 강화도조약을 조선시대 전기간을 걸쳐서 이루어진 일본과의 외교협상과 비슷한 성격으로 강화도조약을 바라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또한 조선이 왜관을 설치.운영하였던 것을 참조하여 에도막부시대에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나가사키에 상관을 설치하여 비슷한 형태로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공식적인 대일 외교창구이자 무역거래소 역할을 했던 왜관은 처음에는 약1만평 규모의 두모포왜관이 설치되었는데 좁고 항구로서 기능이 부적합하여 현재의 용두산공원 일대에 초량왜관이 설치되었다. 왜관에는 쓰시마출이신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 무역업무에 종사했으며, 또한 공식 외교사절들이 머물수 있는 숙박장소와 조선국왕에 예를 올리는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신 객사가 설치되었다. 조선과 일본간의 무역은 공무역, 사무역, 밀무역 등 다양한 형태가 있었다. 조선은 구리, 납, 은, 염료 등을 일본으로부터 수입하였고, 일본은 식량이 부족한 쓰시마사람들의 수요로 쌀을 주로 수입하였으며, 인삼,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비단을 비롯한 다양한 사치품을 조선을 경유하여 수입하였다. 일본은 고대로부터 주요한 은의 산출지로 일본에서 수입한 은은 조선 경제에서 화폐로서 중요한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대일관계의 중심지 부산
1407년 부산포와 내이포(제포:진해 웅천), 1418년 염포(울산)에 왜관이 설치되었는데, 세 곳을 합쳐 삼포왜관이라 부른다. 서울에서 일본 사절을 맞는 객관인 동평관이 설치되었다. 부산은 조선전기부터 일본과의 교류를 위해 개방된 곳으로 왜관이 설치되었다. 왜관에는 일본사절과 상인이 머무는 숙소, 창고, 일본인을 관할하는 관청 등이 있었다. 임진왜란 후 조선과 일본은 국교를 회복하였지만 다른 곳은 폐쇄해 버리고 부산 한 곳만 일본에게 개방하였다. 일본사절은 서울에 올라가지 못하고 부산에 머물면서 조선 관료와 외교 문제를 의논하였다. 무역상인도 부산에서만 거래할 수 있었다. 부산은 조선 후기 유일한 대일관계의 중심지가 되었다. <출처:부산박물관>


서계, 1678년, 이복, 조선과 일본이 주고받은 공식 외교서류로서, 사안을 기록한 문서이다. 일본측 통교자의 지위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우리나라 관리의 격을 정하였으며, 주로 예조에서 관할하였는데 동래부사가 맡기도 하였다.


쓰시마종가관계 인장류, 쓰시마 번주 가노 및 조선방에서 사용하던 쓰시마 관계의 인장, 17~19세기

왜관의 설립과 위치
임진왜란이 끝나자 일본은 조선과 다시 국교를 맺으려고 노력하였고, 그 결과 1601년 절영도(부산 영도)에 임시 왜관을 설치하였다. 사절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정식 왜관이 필요하여 1607년 지금의 동구청 부근에 두모포왜관을 설치하였다. 규모는 약1만평 정도였다. 두모포왜관은 수심이 낮고 선창이 부적격하여 왜관은 1678년 다시 지금의 용두산 부근인 초량으로 이전되었다. 초량왜관의 규모는 약 10만 평으로, 두모포왜관의 약10배였다. 초량왜관은 용두산을 중심으로 동관과 서관으로 나뉘었다. 동관은 왜관에 상주하면서 외교.무역을 담당하는 쓰시마사람들이, 서관은 일본에서 온 사절들이 이용하였다. 동관에는 왜관의 우두머리인 관수가 사는 관수가, 무역을 하는 개시대청, 그밖에 일본인 남자들이 사는 가옥과 각종 상점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출처:부산박물관>


초량왜관. 현재 부산항 안쪽 용두산공원 부근에 왜관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왜관수리등록, 1724~1745년. 1724년부터 1745년 사이에 초량왜관의 건물들을 수리한 기록이다. 수리할 때 필요한 인원, 물자 동원 상황, 왜관수리의 규칙 마련, 왜관 수리 문제로 온 일본 사절의 접대 문제, 왜관을 둘러싼 사회 문제 등이 기록되어 있다. 외관 건물의 외부.내부 경관을 알 수 있으며 왜관에 대한 양국의 인식 등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출처:부산박물관>


조선초량화집. 소화2년(1927) 경성제대 법문학부 교수가 조선을 방문 후 집필한 책으로 부산 초량 관아를 중심으로 기술된 책의 초고이다. 왜관의 도면과 함께 위치, 구조, 증축기, 인적구조 및 활동 등이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초량객사중수등록, 초량객사외삼문개건등록과 초량객사중수등록 2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초량객사는 왜관 담장 북쪽에 위치한 조선측 건물이다. 1846년 초량객사를 수리한 이후 1874년 중수할 때의 내용으로 기둥, 기와, 벽, 창, 담장 등 수리할 곳과 비용, 인력 동원 등의 내용이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초량왜관도, 복제품, 1783년, 변박, 1764년 제7차 통신사를 기선장으로 수행하였던 변박이 초량왜관을그린 그림이다. 왜관은 일본인이 거주하며 왜사의 접대와 무역을 하도록 제한한 구역이다. 용두산을 중심으로 동관과 서관으로 나누어진 초량왜관의 모습과 왜관 북쪽에 일본사절을 접대하는 연향대청이 묘사되어 있다. 이 외에도 우리측의 대왜관청인 성신당.통사청.유원관 등이 묘사되어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초량왜관회도, 일본 쓰시마 종가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초량왜관을 그린 지도이다. 쓰시마 이즈하라 소재 나가사키 현립 역사민속자료관에 전시되어 있다. 쓰시마에서 초량왜관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그린 지도로 추정된다. 제작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부산포초량화관대회도'와 구도가 거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같은 저본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왜관도와는 달리 지명이 거의 수록되어 있지 않다. 지도의 아래 부분이 동쪽이다. 용두산을 중심으로 서쪽에 3대청과 6행랑이 묘사되어 있으며, 그 위쪽에 나무가 그려진 곳이 현재의 국제시장 일대이다. 용두산의 동쪽 중앙에는 관수가가 자리하고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약조제찰비는 왜관 설치 후 밀무역 등 여러가지 폐단이 일어나자 1683년(숙종9) 동래부사와 쓰시마도주가 금제조항 다섯가지를 제정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으로, 한일관계사 연구에 있어 매우 소중한 유물이다. 원래 한문과 일문으로 제작되어 조선측의 수문과 일본측의 왜관 경계선에 각각 세웠는데, 이 때 조선측에서 세운 것만이 남아 현재 부산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약조제찰비
- 대소사를 막론하고 금지한 경계 밖으로 함부로 나와 (경계를) 넘은 사람은 사형으로 다스릴 것
- 노부세는 현장에서 잡은 후 준 자와 받은 자를 똑같이 사형죄로 다스릴 것.
- 개시일에 (일본인) 각 방에 몰래 들어가 비밀리에 매매하는 자는 조선.일본 각기 사형으로 다스릴 것
- 오일잡물을 들여 보낼 때 (조선측) 색리 고자 소통사 등을 일본인들은 절대로 구타하지 말 것
- 조선.일본 범죄인은 모두 왜관 밖에서 형을 집행할 것.
왜관 거주자가 관 밖에 용무가 있으면 관수에게 보고한 후 훈도.별차에게 통행증을 보여야 왕래할 수 있음. 각 조의 내용을 써서 왜관 안에 세워 이로서 본보기로 삼고자 함. 1688년 8월 <출처:부산박물관>

왜관에서의 조선과 일본이 경제교류
조선과 일본과의 무역은 공무역, 사무역, 밀무역으로 나눌 수 있다. 공무역을 통하여 조선은 구리.납.물소뿔.단목(염료) 등을 수입하였으며, 조선은 일정 비율로 환산된 값에 따라 목면과 쌀을 주었다. 17세기 전반 일본에서 목면이 재배되고 면포 생산이 활발해졌다. 이로 인해 조선산 목면이 소용없게 되자, 쓰시마는 목면 일부를 쌀로 바꾸어 지급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농경지가 적어 식량이 부족한 쓰시마가 쌀 수입을 더 선호하였다. 사무역은 양국 상인간의 무역으로, 왜관 안의 개시대청에서 열리므로 개시무역이라고도 한다. 개시무역을 통해 조선상인은 중국에서 사온 비단과 비단실, 조선산 인삼을 일본으로 수출하고 일본의 은을 수입하였다. 조선의 쌀과 인삼 등은 일본인에게 대단히 인가가 높아 불법적인 장소에서 밀무역으로 거래되기도 하였다. <출처:부산박물관>


명문, 조선,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향보정은, 18세기, 나고야성박물관 소장, 일본은 조선에 대한 무역결재는 대부분 정은이란 은화가 사용되었다. 특히 조선인삼의 수입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인삼대왕고은이라 불리는 질이 높은 정은이 만들어졌으며, 향보기(1716~1735년)에 만들어진 은화를 향보정은이라 한다. 조선인삼, 17~19세기, 나고야성박물관 소장, 일본이 조선과 무역하는 물품은 여러가지가 있었으며, 그 중 인삼이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였다. 인삼은 불로장수, 정력회복 등에 뛰어난 만능 생약으로 아주 중하게 여겨져, 일본에서는 조선인삼의 인기가 높았으며, 왜관의 상인들도 인삼 사기에 분주했다. 조선인삼의 판매는 쓰시마번주가 독점하여 번의 중요한 재원이 되었다. <출처:부산박물관>


해옹이 그린 대나무와 호랑이, 19세기 동래지역에서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방화가 해옹의 그림이다. 부산의 초량왜관에서는 일본인들에게 판매할 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가 등장하였였다. 해옹은 이들 중 한 명으로 보인ㄷ. 이들 화가들이 제작한 대일 수출용 그림 중 가장 인기가 높았던 그림 중 하나가 호랑이를 제재로 한 것이었다. 이는 호랑이가 벽사의 상징성을 가졌기때문이며, 특히 조선에서 제작된 호랑이 그림이 호랑이가 없는 일본에서 제작된 호랑이 그림보다 좀 더 벽사의 효험이 있다는 믿음이 일본인 사이에널리 팽배해 있었기 때문인 것을 추정된다. <출처:부산박물관>


공목작미등록, 임진왜란 이후 1637년(인조15)부터 1751년(영조27)까지 일본과의 공무역에 사용하던 공작미와 공목의 운송에 관한 문서를 모아 놓은 책으로, 인조 때부터의 대일본 관계를 소상히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요구가 공목으로부터 시작하여 차츰 공작미로 바뀌어 가는 고정이 잘 기록되어 있다. 인조 이후의 외교사, 특히 대일본 관계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부산박물관>


동래부 상고안, 18~19세기, 동래부에서 상행위를 허가해 준 상고와 전인들의 명단을 적은 책이다. 작성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조선후기의 것으로 보인다. 크기가 다른 7책이 한 권으로 합철된 필사본이다. 각 책의 말미에 '사'라고 하여 각각의 상고안 및 전인안에 기입된 자만 상행위를 허가하고 또한 상인의 명부는 매년 부에서 작성하였으며 그 명부에 기재된 자만 상행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부산박물관>

부산요
부산요는 1539년부터 1743년까지 약 100년간 왜관 안에 있던 도자기가마이다. 부산요는 화관다완라고 표현되듯이, 다완을 중심으로 한 다기를 제작하였다. 당시 일본인 사이에서는 정신 수양의 방법으로 다도가 크게 유행하였다. 일본인들은 질박한 아름다움을 가진 조선 다기를 아주 좋아하였다. 다도 애호가들은 쓰시마에 주문하여 조선 다기를 구하였다. 그러나 수요가 너무 많고 주문 취지에 맞지 않은 것이 있자 쓰시마측은 왜관에 도자기가마를 만들어 도자기를 직접 제작하였다. 조선은 원료가 되는 백토, 도공, 목재를 지원하였다. 부산요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는 조선과 일본의 성격을 함께 가진 이색적인 것이었다. 18세기가 되면서 일본 각지에 도자기가마가 생기고, 조선의 흙 공급이 원활하지 않자 부산요는 점점 쇠퇴하게 되었다. <출처:부산박물관>


제방어호지어소물어주문, 1715년


부산요 출토 자기편, 조선


어매토장, 1706년


공의강조선신도다완피차상후각서, 1666년

오고가는 사람들
조선전기에는 통신사.통신관.회답사.보빙사.경차관 등 다양한 명칭의 사절이 일본에 파견되었다. 일본의 경우 국왕.대호족.쓰시마와 큐슈지역의 수장, 소호족 등으로 등급을 나누어 사절을 파견하였다. 조선후기에 일본으로 파견된 사절로는 통신사와 문위행이 있었다. 통신사라는 명칭이 처음 보이는 것은 1395년(고려 우왕원년)으로, 고려말부터 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되었다. 통신사는 조선국왕이 일본국왕에 해당되는 막부장군에게 파견하는 조선국왕사였다. 임진왜란 이후인 1636년부터 9차례에 걸쳐 통신사가 일본에 갔다. 문위행은 일본어통역관이 정사가 되어 쓰시마 도주에게 파견된 역관사였다. 일본사절은 매년 1.2.3.6.8월에 정기적으로 오는 외교의례적 목적의 연례송사, 특정한 외교사안을 가지고 와사 외교사저의 대우늘 받는 별차왜로 나뉜다. 별차왜를 줄여 흔히 차왜라고 부른다. 차왜는 그 유형이 약 30가지나 될 정도로 다양한 목적을 띠고 왔다. 차왜가 오면 조성에서는 접위관이라는 외교에 능한 관리를 부산에 파견하였다. 접위관은 동래부사와 함께 일본사절의 연향과 접대는 물론이고 외교문제도 해결하였다. <출처:부산박물관>

동래부사접왜사도. 복사본, 현재 '동래부사접왜사도'라고 불리는 그림은 두 점이 있다. 조선 후기 겸재 정신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것과 이곳에 전시된 작자 미상의 것이다. 두점의 그림은 내용면에서 비슷하나 이 그림에는 왜관의 서쪽 경관이 그려져 있다. 전부 10폭이며 내용상 네부분으로 나누어 그렸다. <출처:부산박물관>



제1부문은 동래부사가 일본 사절을 맞기 위하여 동래부를 출발, 초량왜관 설문에 이르는 노정과 주변 경관을 그렸다. 동래부 읍성의 남문을 나와 돌다리인 광제교를 건너 부산진 등의 군사기지를 지난다. 부산진 선창에는 돛대가 달린 배가 보이고, 통신사의 출발지인 영가대도 보인다. 제3폭에는 가마가 보이는데 여기에 동래부사가 타고 있다. 동래부사의 행렬은 위풍당당하고 악대와 무관, 각종 병기를 든 병졸, 임무를 맡은 관리도 지나간다. 행렬 속에는 기녀로 보이는 여성들이 있다. 이들은 일본사절에게 연향을 베풀 때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였다. <출처:부산박물관>


제2부분은 초량객사에서 일본사절의 의식이다. 제7폭에 초량객사가 그려져 있다. 이곳에는 조선국왕의 전패가 있어 일본사절이 예의를 표하는 곳이다.


제3부분은 초량객사에서의 행사가 끝난 후 연향대청에서 연회를 베푸는 모습을 그렸다. 제4부분은 왜관의 서쪽 경관을 그렸다. 연회를 마치면 일본사절은 이곳에 마련된 숙소에서 이국의 밤을 보낸다. <출처:부산박물관>


일본 나가사끼의 대지마(出島)화란상관. 대지마는 1636년 천주교 포교를 막는 목적으로 시내에 흩어져 있던 포르투갈인을 한곳으로 모아 거주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진 곳으로 1641년 이곳으로 네덜란드 상관이 옮겨지면서 19세기 일본이 개항하기 전까지 서구국가에 유일하게 개방된 항구였다. 특정한 지역에 폐쇄된 형태의 개항장을 유지한 것을 일본이 조선의 왜관운영 사례를 참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 참조: 1. 왜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