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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박물관] 서부경남지역의 불교 유적과 유물

younghwan 2013. 8. 23.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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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부 경남에는 한반도의 대표적인 명산 중 하나인 지리산이 자리잡고 있다. 지리산은 삼국시대 이래로 성스러운 곳으로 여겨졌으며 불교가 전래된 이래로 많은 사찰들이 자리 잡았다.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화엄10찰 중 하나인 화엄사를 비롯하여 통일신라말부터 지방호족세력의 지원을 받아 크게 융성한 선종계열 사찰로 실상사, 단속사, 쌍계사 등이 있었으며, 고려말 결사운동을 주도했던 송광사와 선암사 등이 지리산 일대에 자리잡았다. 지금도 지리산 주변을 비롯하여 서부경남지역에는 많은 사찰들이 있지만, 통일신라.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하였다가 폐사된 사찰 또한 적지 않았으며, 많은 유물들이 절터에서 출토되고 있다. 대표적인 절터로 합천 영암사지, 거창 천덕사지, 함양 승안사지, 산청 단속사지와 석남사지 등이 있다.

신앙의 산실 '지리산'
경남 서부지역의 대표적인 산, 지리산은 우리나라 토착신앙의 산실이다. 신라시대에는 시조 박혁거세를 낳은 성모의 산이자 오악 중 하나인 남악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중사의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성모묘가 있던 곳으로서 일찍부터 성스러운 산으로 숭배되었다. 한편 불교는 지리산의 민간신앙과 자연스럽게 융화되면서 이곳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대표적으로 화엄도량인 화엄사가 있고, 북종선을 익힌 신행에 의해 교종사찰에서 선종사찰로 전환된 단속사가 있었다. 9세기 들어서는 남종선 계통의 실상사, 태안사, 쌍계사, 옥룡사 등이 지리산 자락에 세워졌다. 또한 하동의 쌍계사에는 통일신라시대의 학자인 최치원이 머물며 불교가 유교와 융합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교선일치를 주창한 대각국사 의천이 선암사에서 천태종을 개창하였으며,  보조국사 지눌은 신앙결사인 수선사를 중심으로 송광사에서 조계종을 열었다. 이렇듯 지리산의 불교사찰은 한국불교의 총체적 실상과 흐름을 주도하였다. 이 외에도 지리산은 조선시대 남명 조식에 의한 유학의 본산 및 무속신앙과 관련된 산신신앙과, 정감록신앙, 동학계열의 민족종교, 도교의 신선신앙, 청학동의 갱정유도 등과 같은 다양한 신앙의 근거지가 되고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전패, 1701년, 조선시대 사찰의 주불전에는 삼존이 봉안되며 도 그 앞에는 대개 수미단이 설치된다. 이 수미단에는 왕실 최고 어른의 수명장구를 축원하는 전패가 놓이며, 이 전패의 하단 이면에 명문이 있어 강희40년(1701) 당시 국왕인 숙종을 위하여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혜능스님의 머리가 동쪽으로 온 이유
신라의 승려 삼법은 평소 존경하던 당나라의 혜능스님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으나 스님의 입적으로 인해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어느날 헤능의 <육조대사법보단경>에서 누군가 그의 머리를 잘라 간다는 내용을 접한 삼법은 극심한 불안감을 느끼고, 결국 남보다 앞서 그 예언을 실현하기에 이르렀다. 722년 삼법은 법정 스님의 재정적 후원을 바탕으로 당의 홍주 개원사에서 유학중이던 승려 김대비의 도움으로 혜능의 머리를 몰래 가져와 지리산에 안치하였다. 후에 진감선사가 그 자리에 가람을 세우니 바로 지리산의 쌍계사이다. 이러한 내용은 고려시대 각훈 스님의 <선종육조혜능정상동래연기>에 전한다. <출처:진주박물관>


육조대사법보단경, 조선, 육조대사법보단경은 행동적이고 즉각적인 깨달음을 주장하는 남종선의 시조인 혜능의 수도하는 과정과 문인들을 위해 설법한 내용을 담고 있는 자서전적 일대기이다. <출처:진부박물관>


경남의 옛 절터, 경상남도에는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불교문화유적이 많이 있다. 찬란했던 과거는 사라지고 지금은 그 흔적만이 겨우 남아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항아리, 사발, 접시, 합천 영암사터, 고려, 황매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 영암사터는 고려 현종 5년(1014)에 적연선사가 이 곳에서 83세에 입적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진주박물관>


부처, 보살, 경패, 김해 덕산리 유적, 통일신라, 각성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 덕산리 유적은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건물지이다. 건물지 북동쪽 폐와무지에서 불교와 관련된 유물을 비롯하여 많은 양의 고려시대 청자류와 기와가 출토되었다. <출처:진주박물관>


반지, 사리병, 사리함, 구슬, 함양 승안사터, 고려, 1962년 보물 294호 석탑을 옮기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으로 탑신 일층 윗면 중앙 원형사리공에서 사리구와 1492년 중수에 관한 내용을 적은 묵서중수기가 들어 있었다. <출처:진주박물관>


경자, 진주 남성리 유적, 고려, 1995년 진주 남성리에서 대정이십년(1180)이 새겨진 경자 등 청동으로 제작된 유물이 소량 발견되었다. 일부 유물에서 장흥사라는 사찰이름이 새겨져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부처가 새겨진 장식판, 창녕 말흘리유적


문고리장식, 창녕 말흘리 유적


자루달린 향로, 창녕 말흘리 유적


향로, 구슬, 창녕 말흘리 유적


풍경, 자물쇠, 창녕 말흘리 유적, 통일신라, 화왕산의 남서쪽 기슭에 위치한 말흘리 유적은 절터로 추정되는 건물지이다. 출토된 유물들은 대부분 불단을 장식하고 불교 의식에 사용되던 것들이다. <출처:진주박물관>


해인사 묘길상탑의 기록, 통일신라. 탑에 대한 기록인 탑지에는 신라말 진성여왕 8년(899)에 전란으로 생명을 잃은 스님들을 위하여 이 탑을 세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해인사 묘길상탑의 공양탑, 통일신라, 공양탑은 현재 157기가 남아 있는데, 무구정광다라니경에 따르면 99기와 77기를 봉안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원래는 이를 합친 176기가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진주박물관>

남해의 분사대장도감
고려는 1232년(고종19) 몽고의 침략으로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부처의 힘을 빌어 몽고를 물리칠 목적으로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을 설치하였다. 분사의 위치는 팔만대장경판의 기록을 토대로 진주 관내인 남해로 추정하고 있다. 남해는 지리적 여건상 몽고군의 위험을 벗어날 수 있고, 밀물과 썰물의 조수차가 심하여 경판으로 사용해야 하는 목재의 특성을 살리기에 적합한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남해가 위치한 진주목은 최씨 무인정권의 식읍지로 분사의 운영을 위한 재정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분사를 운영하던 최우의 처남 정안은 일연스님을 남해의 정림사로 청하여 대장경 조판에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분사대장도감은 단속사 주지 만종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전란으로 잃은 혜심의 <선문염송집>을 다시 새겨 세상에 전하고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목판으로 찍은 팔만대장경, 조선, 여섯 종류의 경전이 협쳐져 있는 팔만대장경 목판본이다. '임인년(1242)'에 고려국 대장도감에서 칙명을 받들어 만들었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현재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 목판을 이용하여 조선 전기에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진주박물관>


신행선사 비석탁본, 통일신라, 813년. 신행선사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정진하는 방식을 중시하는 북종선을 신라 최초로 도입한 법랑선사에 이어 단속사에서 선법을 전파하였다. 신행선사를 기리는 이 비석은 현재까지 전하는 가장 오래된 비석이지만 이미 없어지고 탁본만 전한다. <출처:진주박물관>


도전리마애불상군탁본, 경남 산청군 생비량면 도전리에 있는 마애불상군 탁본이다. 도전리 마애불상군은 생비량면을 가로 질러 흐르는 양천강을 따라 동서로 길게 이어진 구릉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불산군이 새겨진 벽면은 현재 약 10m 정도 남아 있으며, 기반암의 상부가 앞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여래상으로 이룽져 있는데, 현재까지 4단구성에 32구로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의 조사결과 6단36구 이상으로 확인되었다. 이렇게 많은 불상들이 무리를 지어 배치된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 <출처:진주박물관>


연꽃무늬수막새(고려, 통영 안정리 출토), 연꽃무늬 수막새(합천 죽죽리 폐사지 출토)


명문와(조선, 산청 지곡사지), 도깨비모양 기와


당초무늬암막새, 연꽃보상화무늬수막새, 고려, 합천 죽죽리 폐사지 출토


연꽃무늬수막새, 연꽃무늬수막새, 통일신라, 합천 죽죽리 폐사지 출토


반가사유상, 삼국시대 7세기, 경남 양산출토. 반가사유상이란 왼쪽 다리를 내리고 오른쪽 다리를 얹은 반가부처로 오른손은 손가락을 뺨에 살짝대고 생각에 잠겨 있는 미륵보살상을 말한다. 석가모니가 세자였을때 출가하여 중생구제라는 큰 뜻을 품고 고뇌하는 태자사유상에서 유래하였다. 인도에서는 3세기 경 간다라 조각에서 나타나며 우리나에서는 6세기 후반 삼국시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통일신라 초기까지 많은 반가사유상이 제작되었다. <출처:진주박물관>


목조여래좌상, 조선 17~18세기, 크기와 양식이 거의 동일한 작품으로 동시기에 제작된 삼존불 가운데 좌우의 협시불로 추정된다. 다만 손모양만 반대로 되어 있다. 결가부좌 한 다리에 비해 불신과 불두가 크고, 얼굴은 약간 앞으로 숙여 내려다보는 모습이다. 두꺼운 대의의 주름이 간략하게 처리되었으며,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두 손은 따로 만들어 끼워 넣었다. 양손은 몸체에 비해 작게 묘사되어 있다. 바닥에는 불신내부로 통하는 방형의 복장공이 있는데 복장공의 뚜껑은 멸실되었고 복장유물도 없다. 나발 한 곳과 손바닥, 어깨와 가슴으로 이어지는 대의 일부분이 훼손되어 있으나, 전신에 칠한 금분이 비교적 잘 남아 있고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출처:진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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