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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박물관] 서부경남 양반문화, 지리산의 차

younghwan 2013. 8. 26.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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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남부지방의 명산이라 할 수 있는 지리산 동쪽의 남강변 일대에 위치한 산청, 함양, 진주 일대는 경치가 빼어난 지역으로 낙동강 상류 안동 지역과 함께 조선시대 양반들의 세거지로 선호되었으며, 양반문화가 발달된 곳이다. 영남사림을 이끌었던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정여창, 김일손 등을 배출하였으며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사림을 이끌었던 남명 조식이 그 학풍을 이어왔는데, 실천적인 이지역의 학풍은 곽재우를 비롯하여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많은 의병장들을 배출하였다. 특히, 지리산의 처사라 불렸던 남명 조식은 벼슬에 진출하지 않고 산청지역에서 학문에 전념하여 많은 후학을 배출하였으며, 실천적인 이지역 특유의 유교학풍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또한 지리산 일대에는 많은 사찰이 있었으며, 통일신라시대 처음으로 지리산에서 차를 재배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하동을 중심으로 많은 차가 생산지역으로 차를 마시는 문화가 발달된 지역이기도 하다.

지리산의 차
차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귀족들의 고급기호품 혹은 약재로 애용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흥덕왕 8년(828)에 대렴이 지리산에서 대규모의 차를 최초로 재배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삼국유사>에는 가야 수로왕의 비인 허황후가 가져온 차 씨를 지리산에 심었다고 전하는 만큼 지리산은 차나무가 자라기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에도 하동과 화개 등 지리산 일대에서는 맛과 향이 빼어난 차가 생산되고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삼국사기, 김부식, 고려, 복제품, 고려의 김부식이 주도하여 1145년(인종23)에 편찬한 역사서로서 신라.고구려.백제의 흥망과 변천을 기록하였다. 이 가운데 신라본기에는 차와 관련된 내용이 있다. 신라 흥덕왕 3년(828), 사신 대렴이 당나라를 다녀오면서 차종자를 가져오자 왕이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하였는데 선덕왕때부터 있던 차가 이때에 더욱 성하였다고 한다. <출처:진주박물관>


무풍향차보, 이운해, 조선, 복제품, 초의선사의 '동다송'보다 앞선 기록으로 1758년 당시 부안현감으로 있던 이운해의 글이다. 약용차의 제조법과 각종 병리증상에 맞춰 마시는 법, 차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차 도구는 다로, 다관, 다부, 다종, 다잔, 다반에 대한 명칭과 그림, 용량까지 상세히 표기하고 있다. 이글은 황윤석의 '이재난고'에 실려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완당전집, 추사 김정희의 문집이다. 권10에 쌍계사 승려 만허의 절묘한 차제조법에 대한 내용과 그 차에 대한 맛을 평한 글이 있다. '만허스님이 쌍계사의 육조탑 아래 있는데 차를 만드는 솜씨가 절묘하여, 차를 가지고 와 맛을 보이는데 용정의 첫물차도 이보다 더 못하고, 유마거사 방에도 아마 이런 무상의 묘미는 없을 것이다. 이에 찻잔과 글씨를 주어, 그로 하여금 육조탑에 차를 공양하게 하였다." <출처:진주박물관>


청자구름학무늬 찻그릇, 청자조롱박모양 주전자와 받침, 고려


청자 꽃모양잔, 청자 찻그릇, 고려


백자주전자, 백자 찻그릇, 백자 높은 다리 잔, 조선

일상의 기록
이 지역에서 문자의 사용은 창원 다호리 고분에서 발견된 붓을 통해 기원전후 시기에 이미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현존하는 자료는 5세기 이후의 가야부터이며 신라에 들어 문자 사용 예가 다수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대 신라사 연구를 비롯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대규모의 국가적 불교행사와 관련하여 세운 것으로 보이는 사천의 신라비는 신라의 중앙과 지방의 관계, 중국과의 교류상황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함안산성에서 출토된 목간은 6세기 중엽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나라 출토 목간의 약 50%에 해당하는 162점이 확인되어 당시 낙동강 상류의 교역 상황을 보여준다. 일상생활과 관련된 기록들은 시대를 달리하며 곳곳에 남아 있어 당시 사회의 일면을 알게 해준다.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는 매향의식을 기록한 사천의 매향비, 한 문중의 재산분배에 관한 문서인 동복화회문기, 그리고 지방의 목활자와 110여년에 걸치 지방호적 문서 등 다양한 기록들이 전해져 온다. <출처:진주박물관>


경남지역의 기록문화


이세후 어사화, 1725년(영조2) 이세후가 대과 급제 때 하사받은 어사화이다. 조선시대에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어사화의 한 쪽 끝을 복두 뒤에 꽂고, 다른 한 끝은 명주실로 잡아매어 머리 위로 넘겨서 입에물고 3일 동안 일종의 시가행진인 '유가'를 하였다.


진남루 중수기, 조선. 진남루는 진주성 내에 있는 조선 중기 성곽으로 북장대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격전을 벌였던 곳이며 1618년 병마절도사 남이흥이 중건한 이래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북쪽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외성과 성 내외의 병사들을 모두 지휘할 수 있었기 때문에 편액을 <진남루>라 하였으며 공북루라는 별칭도 있었다. <출처:진주박물관>

남명 조식의 실천사상
도덕성을 강조하고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은 조선의 국가 이념이었다. 이러한 성리학은 16세기 들어 경남 서부지역의 남명 조식에 의해 크게 발전하였다. 그는 지리산 아래 산청에 터를 잡고 학문에 정진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는데, 특히 학문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궁리보다는 실천을 강조하였으며 성리학적 사회질서 및 윤리도덕의 구현에 앞장섰다. 당시 성리학의 대학자 이황에게 보낸 편지 중 '손으로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만 하늘의 이치를 논하는 것은 그만두어야 한다"는 글귀는 그의 사고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학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경의사상'으로 요약된다. 경은 내적 수양을 통해 마음을 밝히고 올바르게 하여 근본을 세우는 것이고, 의는 경을 근본으로 제반사를 대처함에 있어 과단성 있게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일생을 통해 드러나는데 관직에 연연하지 않으며 산림의 처사로서 살았으나 잘못된 정치를 지적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가 단성현감에 제수되었을 때 이를 사양하면서 올린 '단성소'에는 그의 강직한 마음과 기개가 그대로 배어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강호선생실기, 목판본, 일제강점기, 강호 김숙자는 고려말 성리학자인 야윤 길재에게서 수학하고 아들인 점필재 김종직에게 가학으로써 학통을 이어 이후 영남사림을 형성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본서는 김숙자와 관련된 문서와 기록들을 엮어 놓은 것이다. <출처:진주박물관>

영남사림의 형성
조선시대 성리학의 핵심가치인 명분과 도덕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사림은 고려말 길재의 학통을 이은 점필재 김종직에 의해 조선시대 초기 영남에서 형성되었다. 그는 지리산 함양 일대에서 김일손, 정여창 등의 제자를 배출하였고, 그들의 사상은 16세기 유학의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는 퇴계 이황과 지리산의 처사 남명 조식에게 이어졌다. <출처:진주박물관>


일두유집, 정여창, 조선,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정여창의 시문집이다. 이 책에 실린 잡저 중 '입지론'은 학문의 목적이 성인이 되는 것에 있으며 성인이 되기 위해 강한 의지와 흔들리지않은 굳은 뜻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을 펴고 있다. 조선전기 성리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출처:진주박물관>


보개현구장도, 보물 1046호, 이징, 1643년, 복제품, 1643년(인조21) 화가 이징이 성리학의 대가 정여창의 별장을 그린 그림이다. 정여창이 머문 별장이 훼손되는 것이 아쉬워 정씨 문중에서 그리도록 한 것으로 성리학자들이 향촌에 은거하며 학문에 몰두하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단에는 정여창과 유호인의 시, 조식과 정구의 글에서 발췌한 기사 등이 적혀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청계서원지, 1921년 간행, 목활자본, 청계서원은 김일손과 정여창을 제향하는 곳이며 청계서원지는 서원의 사적과 연혁 그리고 김일손.정여창의 행적 등을 기록한 것이다. '청게서원도', '진설도' 등이 있어 서원이 학문 뿐 아니라 제사의 목적이 있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박영선생의 편지

지리산의 처사 남명 조식의 삶
조식의 본관은 창녕이고 호는 남명이다. 1501년 6월26일 경상도 삼가현 토골에서 조언형과 인천 이씨 국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교경전에만 한정하지 않고 천문, 지리, 의학, 병법 등을 두루 익혀 안목을 넓혔다. 20세 때 기묘사화와 숙부인 언경가가 멸문하는 것을 보고 벼슬길을 단념하였으며, 25세 무렵 산사에서 성리학 대전을 읽고 크게 깨달아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에만 매진하였다. <출처:진주박물관>


단성현감을묘사직소, 조식, 155년 사림의 종사로 추앙받던 조식이 단성현감에 제수되었으나 그는 사직상소를 올렸다. 상소에는 '문정왕후께서 신실하고 뜻이 깊으나 궁궐속의 한 과부요, 전하는 아직 어리시니 선왕의 고아에 불과합니다. 천백가지의 재앙을 어찌 다 감당하며 억만 갈래 민심을 어찌하여 수습하려하십니까?'라고 하였다. 당시 척신 정치의 폐해를 비판하고 명종에게 크게 분발할 것을 통렬히 촉구하는 등 조식의 기개와 신념을 드러낸 것이다. <출처:진주박물관>


남영학기류편, 남명학기류편에서는 선현들의 언행에서 번거로운 주석이나 논쟁보다도 유학도로서 공부하여야 할 요체와 본질을 항목별로 볼 수 있다. '남명 선생문집'에 기록된 이만인의 발문을 보면, '남명학기류편'은 조식이 평소 글을 읽을 때 중요한 사항을 수시로 기록한 학습비망록임을 알 수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조식의 편지


남문의 문인들과 의병
이황과 조식은 같은 시대에 쌍벽을 이루던 유학자로 학문적으로는 약간의 마찰을 빗기도 하였으나 경상도의 학자들은 두 사람을 모두 존경하여 두 문하를 번갈아 출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식의 문인들과 후학들은 대부분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진주에 살면서 유학을 진흥시켰으며, 대체로 은둔적인 학풍을 지녔으나 국가의 위기 앞에서는 몸을 아끼지 않고 앞장섰다. 조식의 대표적인 문인들로는 정구, 곽재우, 정인홍, 김우웅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임진왜란 때 그의제자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하여 정인홍, 김면, 이대기, 이정, 이로, 조정 등이 경남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으며, 이러한 정신과 모습은 조선말까지 이어졌다. <출처:진주박물관>


내암선생문집, 정인홍, 합천에서 태어난 내암 정인홍의 시문집이다. 정인홍은 남명 조식의 제자로 스승의 실천사상을 이어받아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합천에서 의병을 모아 성주에서 왜병을 격퇴하여 영남의병장의 호를 받았다. 후일 이언적, 이황의 문묘종사를 반대해 탄핵을 받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몰락하였다. <출처:진주박물관>


광서 박진형 교지, 1819년 11월 박진영을 벼슬에 임명하는 교지이다. 박진영은 남명 조식의 문인들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공로로 공신에 책록되었다. <출처:진주박물관>


동자상과 향로


상감모란무늬 납작병, 상감버드나무누늬 뿔잔, 15세기, 분청사기, 진주 출토


태를 담는 항아리, 조선


승수아기씨 태지석, 조선, 1524년(중종19)에 출생한 왕자 승수아기씨를 태를 1538년(중종23)에 묻었다는 기록

지역이름이 있는 분청사기
조선전기에 관청, 사기장의 이름, 공물의 표시, 생산자의 이름 등이 새겨진 분청사기가 있다. 그것에 글씨를 새기는 이유는 궁에서 사용하는 그릇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사용관청의 이름을 표기하였고 도한 그릇질의 책임을 묻기 위해 생산지나 장인의 이름도 표기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조선왕조실록에 관련기사가 있다. 특히 다른 지역에 비해 경상도은 진주, 삼가, 밀양 등 지역의 이름이 있는 분청사기가 많이 남아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김해장흥집용'이 새겨진 분청사기 접시, '진주장'이 새겨진 분청사기 대접, '창원장흥고'가 새겨진 분청사기 접시


'삼가인수부'가 새겨진 분청사기 잔, '함안장흥고'가 새겨진 분청사기 접시


'밀양장흥고'가 새겨진 분청사기 접시, '합천장흥고'가 새겨진 분청사기 항아리


청자정병, 고려


청자매화대나무 학무늬 매병, 보물1168호, 하동 출토


십장생 무늬 벼루,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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