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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시대의 서울, 500년 왕도를 세우다.

younghwan 2013. 10. 17.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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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韓陽)은 조선시대 수도의 명칭으로 오늘날 서울을 말한다. 한양의 범위은 좁게는 성곽으로 둘러싸안 사대문 안쪽을 말하지만, 성저십리라고 하여 한성부에서 관할했던 성밖 10리까지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한양의 인구는 세종대 10여만, 임진왜란 이후4만여명, 조선후기 20여만명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실제로는 20~30여만명의 인구가 한양일대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구축한 국가답게 모든 행정, 경제 등이 한양에 집중되었던 사회로 그 규모는 당대 유럽의 대도시였던 파리, 런던 등과 비슷하거나 규모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한양은 북악산, 인왕산, 낙산, 목멱산(남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도성 남쪽에 한강이 흐르고 있어 한반도 전역으로 내륙수운과 연안 해상수로를 이용하여 사람과 물자가 쉽게 공급될 수 있는 교통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다.

 한양은 삼국시대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이 한강이남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삼국이 한반도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충돌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고려시대에도 개경남쪽에 위치하고 있고, 물류의 중심지였기때문에 상당히 중요시되었던 지역이다. 1392년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는 집권 이전에 지배계층 교체를 위한 토지개혁 등 다양한 조치를 완성한 이후 마지막으로 조치라 할 수 있는 수도 이전을 결정했다. 당시 새로운 수도 후보로 검토된 지역으로는 도라산, 광실원, 불일산 등 임진강 주변 파주시 일대와 한강을 끼고 있는 무악(안산), 풍수지리적인 측면에서 추천된 계룡산 일대 등이 검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오늘날 서울로 결정되었다.1394년 최종적으로 한양이 새로운 수도로 결정되면서 오늘날 서울을 이루고 있는 궁궐, 종묘, 사직 등 주요 시설물이 설치되고, 한양을 방어하기 위한 성곽 또한 빠른 시기에 완공되어 수도 이전을 결정한지 2년만에 도시로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 이후 태종과 세종대를 거치면서 창덕궁을 비롯한 새로운 궁궐과 상업지구라 할 수 있는 시전 등 도시 기반시설이 완성되었다. 한양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크게 파괴되었다가 광해군대에 복구되었으며, 이때 경복궁은 복구되지 않고 있다가 구한말 고종대에 대원군 주도로 복구되었다. 20 km에 이르는 한양도성 성곽으로 둘러싸인 한양은 북악산 아래 경복궁을 중심으로 궁궐, 관청, 지배층의 거주지가 형성되었으며, 청계천 주변에 공식적인 상업지구가, 숭례문을 비롯한 성문 주변에 사설시장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 한양은 중국의 주나라 수도 건설의 지침인 '주례'를 참조하여 건설되었으며 그 규모는 고대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 등의 대도시에 견주어도 적지 않은 대도시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서울, 500년 왕도를 세우다.
"이제 이 땅의 형세를 보니 왕도를 삼을 만하다. 더욱이 조운이 통하고 전국에서 거리도 균등하니 사람들이 사는 일에도 편리한 바가 있으리라." 1394년(태조3) 8월, 태조가 한양을 왕도로 삼고 한 말씀이다. 이내 종묘사직과 궁궐이 들어서니 비로소 임금의 교화와 정령이 나가고, 백성들의 소원과 충심이 모여들었다. 조선의 서울 한양으로 전국의 물산이 모여 들었다 흩어졌다. 육로를 따라 갖가지 물품을 실은 말과 수레, 물길을 따라서는 배들이 모여들면서 한양은 조선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중국.일본.만주.유구에서 오는 사신들을 맞이하고, 또 그곳으로 사신들을 보내는 곳 역시 한양이었다. 한양은 문명과 문화가 들어오고 나가는 기착지요 출발지였다. 또한 한양은 사상과 학문, 예의와 예술을 선도하고, 음식.복식.주거 등 생활문화의 전범을 만들어 내는 곳이었다. 그때부터 서울은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고, 사람을 낳으면 보내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양-한성-서울은 조선의 수도이자 수선이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조선팔도고금총람도(북부지방), 김수홍, 1573년, 보물1502호, 이찬 기증, 각 지역에 대하여 중요한 유적과 인물 등을 기록한 인문지리 지도이다.


조선팔도고금총람도(중부지방), 한양도성과 궁궐, 종묘 등이 표시되어 있다.


조선팔도고금총람도(남부지방),

무릇 수도는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태조는 1392년(태조1) 7월17일 새로운 왕조를 세운 이후 곧바로 수도를 한양으로 이전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가 심했고, 천도 지역도 쉽게 정해지지 않았다. 1399년 2월에는 권중화의 건의로 계룡산에 가서 주변을 살펴본 뒤 남쪽 기슭을 새 도읍지로 결정하고 건설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해 12월 경기도 관찰사 하륜의 반도로 수도 건설을 중단되었다. 하륜의 의견은 무릇 나라의 수도는 그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태조는 1394년 8월11일 서울의 무악 주변을 둘러보고 다음날 백악산 아래로 가서 지세를 살폈다. 그리고 12일에 정도전 등 여러 신하들과 무학대사의 의견을 수렴하여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다양하게 제기된 수도 후보지
천도 논의 막바지에 수도의 후보지로 몇군데가 더 거론되었다. 1394년(태조3) 7~8월에 서운관 등에서는 장단의 불일사와 도라산, 적성의 선점이나 광실원 등을 추천하였다. 태조는 이들 지역을 직접 둘러보거나 도평의사사로 하여금 가보도록 하고는 마침내 한양으로 확정되었다. 그만큼 수도의 선정은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졌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다양하게 제기된 수도 후보지

0 도라산과 광실원, 태조가 1394년 8월16일과 18일에 각각 광실원과 도라산을 둘러보았으나 조운이 통하지 못하거나 땅이 습한 곳이라 제외됨

0 무악(안산) 기슭, 경기도 관찰사 하륜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물이 충분한 무악(현재 신촌 일대)가 좋다고 주장했지만 터가 너무 좁아 선정되지 못함

0 불일사와 선점, 국가의 최고 의결기구인 도평의사사에서 1394년 7월4일과 5일에 각각 선점과 불일사를 돌아보았으나 땅이 좋지 못하다고 보고하여 제외됨

0 계룡산 기슭, 권중화의 건의로 1393년 2월 새도읍지로 정해져서 건설을 시작하였다가 그해 12월 하륜이 계룡산은 나라의 남쪽에 치우쳐 있다고 반대하여 공사가 취소됨

정도전(1392~1398),
본관은 봉화, 호는 삼봉, 충청도 단양출신이다. 1392년 7월에 조준.남은 등 50여 명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개창의 주역이 되었고 이후 1등 공신으로 정권과 병권을 한 몸에 안았다. 태조의 명으로 도성을 설계하였으며 『조선경국전』, 『불씨잡변』등을 지어서 국가 운영을 위한 정치사상적 이론을 만들었다. 제1차 왕자의 난 때에 이방원에게 희생되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긴전의 산하
비옥하고 풍요로운 경기천리
안과 밖의 산하가 백배의 요새로다.
덕스런 가르침은 형세를 겸하니
왕업의 햇수는 천년을 점칠 수 있도다.

도성과 궁원
성은 철옹성에 천길이나 되고
봉래산의 오색구림이 둘렀도다
해마다 궁궐 후원의 꾀꼬리와 꽃
세세토록 도성 사람 놀며 즐기도다.

관청 북극을 호위하다.
늘어선 관청은 높고 우뚝하며 서로 향하니
여려 별들이 북극성을 둘러싼 듯하다.
새벽 달에 관가는 물빛 같은데
말굴레 장식 올리나 티끌 한점 일지 않도다.

마을들이 포진한
집들이 구름을 범하여 우뚝 서 있고
여염집은 땅을 치고 서로 연하였으니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불때는 연기
한 세대의 번성과 화려함에 평화롭구나.
- 정도전 『새 도입지 팔경』 중에서 -

연도와 날짜로 알아본 한양천도

0 1392년(태조1) 7월17일,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창
                         8월13일, 태조가 한양천도를 천명
  1393년(태조2) 1월2일, 권중화가 수도로 계룡산을 건의
                        2월10일, 계룡산으로 수도확정, 건설시작
                       12월11일, 하륜의 반대로 수도건설이 중지되고 태조는 새도읍지 재검토 지시
  1394년(태조3) 2월23일, 하륜은 무악으로 천도 주장
                        7월4일, 토평의사사에서 경기도 선점 탐사
                        7월5일, 토평의사사에서 경기도 불일사 탐사
                        8월11일, 태조가 무악에 도착
                        8월12일, 천도 논의, 백악산 아래에 도착
                        8월13일, 한양 천도 결정
                        8월16일, 태조가 경기도 광실원 탐사
                        8월18일, 태조가 경기도 도라산 탐사
                       10월25일, 천도(한양으로 출발)
                       10월28일, 한양도착
  1398년(태조7) 8월26일, 왕자(이방원)의 난
  1399년(정종1) 9월7일, 정종이 개성으로 환도
  1405년(태종5) 10월11일, 태종은 한양으로 재천도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수도한양의 건설
1394년 한양 땅이 새로운 도읍지로 정해졌다. 새 수도는 우리의 옛 전통과 풍수지리, 그리고 유교적 이념을 겸비하여 건설되었다. 먼저 우리의 성곽 전통에 따라 산세에 의지하여 도성을 건립하고 그 안에 『주례』의 「고공기」에 나오는 '좌조우사'의 이념에 맞추어 궁궐과 함께 종묘와 사직을 배치하였다. 수도의 성곽은 백악산을 비롯한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쌓으면서 평지부분을 연결하여 완성하였다. 임금의 궁궐은 백악산 기슭의 명당자리에 건설하고 좌측에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를, 우측에 토지와 곡식의 신을 모시는 사직을 두었다. 아울러 육조를 비롯한 주요 관청을 궁궐 앞에 배치하였다으며 시전은 동서를 연결하는 대로변에 건립하였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옛 전통과 유교적인 합리성을 함께 고려하여 건설한 수도였다.<출처:서울역사박물관>


주례, 17세기, 중국 주나라의 제도를 기록한 책으로 『주례경도』에는 수도 건설의 이념이 나타나 있다.


경국대전, 1603년, 조선시대 기본 법전으로 한성부는 서울의 인구, 토지, 도로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고 규정하였다.

태조-세종에 이르는 도성 건설
1394년(태조3) 10월 25일 태조는 개성을 출발하여 28일 한양에 도착하였다. 아직 궁궐이 완공되지 않은 상태이기에 태조는 옛 한양부의 관사를 임시 거처로 사용하면서 궁궐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1295년 9월 궁궐과 함께 종묘와 사직 체제를 완성하였다. 이듬해에는 49일씩 2차에 걸쳐 총 98일 동안 전국 각지에서 약 20만 명을 동원하여 18.6km에 이르는 도성을 완공하였다. 천도 2년 만에 왕조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이다. 1398년 8월 왕자의 난 이후 즉위한 정종은 한양이 불길하다며 개성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에 즉위한 태종은 다시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하고 창덕궁을 새로이 건설, 1405년(태종5) 마침내 한양으로 돌아왔다. 1412년에는 혜정교에서 동대문, 종루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구간에 약2천 칸의 시전을 완성하였다. 세종은 1422년(세종4)에 다시 32만명을 동원하여 38일에 걸쳐 도성을 보수하고, 도심지역의 도로를 정비하였다. 그리하여 왕조국가 수도로서의 위용을 과시하게 되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장인이 나라를 만드는데 사방으로 길이가 9리이며 각 면에는 3개씩의 문들 둔다. 나라 중에 동서와 남북으로 각각 9개으리 길을 두고, 도로에는 9대의 수레가 다닐 수 있게 한다. (궁궐의) 좌측에 종묘를 두고 우측에 사직을 두며 앞에는 조정을 두고 뒤에는 시장을 둔다." -『주례』의 「고공기」_

동방 제일의 길지
새 수도 한양은 북쪽에 우뚝 솟은 백악산(342m)을 중심으로 동서로 뻗은 인왕산(338m)과 타락산(97m)이 북쪽을 감싸안고, 남쪽에는 목멱산(262m)이 버티고 있는 분지지형 안에 자리하고 있다. 북쪽과 남쪽이 높고 서쪽과 동쪽이 낮은 산세는 동서방향으로 평지가 연속되는 지형지세를 만들었다. 산에서 내려온 물은 평탄한 중앙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청계천에 모였다가 중랑천과 만나 한강으로 흘러든다. 이러한 지형조건으로 한양의 동맥인 도로망은 동서방향으로 발달하고, 궁궐관 관청 및 고급주택가들은 아늑하고 양지바른 북측에 들어서게 되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인왕산에서 내려다 본 서울 도심.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종묘, 서쪽에는 사직이 배치되어 있다. 경복궁과 종묘.사직 사이에 지배층들이 거주했던 주택지들이 형성되어 있다.


수선전도, 1864년, 서울의 행정구역, 관청, 교량 등을 자세하게 그려 목판으로 인쇄한 후에 산과 하천, 주요 궁궐 등을 엷게 채색하였다.

외관을 지키는 외사산
내사산으로 둘러싸인 한양의 외곽은 다시 북한산-덕양산-관악산-아차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이같은 이중적 분지 구조는 수도 한양이 오늘날 천만도시 서울로 발전하는 터전이 되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북쪽에 삼각산으로 진산을 삼았으니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려 앉은 형세이며 남쪽은 한강으로 금대를 삼았다. 멀리는 왼쪽으로 대관령이 있고 오른쪽에는 발해가 둘러쳐서 그 형세가 동방의 제일이요, 진실로 산하 중에 요새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도


테라코타 한양도, 서울의 옛 지도를 바탕으로 만든 테라코타 작품에 태조 이성계부터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한양 건설의 역사적 사실을 영상으로 연출하였다. 적갈색의 점토 부조 위에 3D 영상을 가미하여 생동감 넘치는 장면이 펼쳐진다. - 테라코타 작가 한대규, 미디어자료 작가 한정훈 -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영조어진, 복제품, 보물 932호, 1900년, 국립고궁박물관


영조을유기로연, 경현당 수작연도병, 보물1531호, 1765년 영조의 보령 72세와 재위 41년을 기념하여 경희궁 경현당에서 열린 수작연과 기로소 영수각에서 열린 기로연을 그린 궁중행사도로 성대한 궁중연회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땅속에 묻혀 있는 도성축조의 역사

0 태조때 쌓은 토성의 흔적, 태조실록에는 평지는 흙으로 산지는 돌로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발굴 결과 태조때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토성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토성은 흙을 5~10cm 두께로 다져 가면서 쌓아 올렸다. 토성벽의 토축 사이에서는 두께가 얇은 접시형의 강돌이 끼워져 있기도 하다.

0 박석, 성을 쌓기 위해 바닥에 까는 돌을 박석이라고 부른다. 이는 구조적으로 안정을 꾀하는 동시에 성벽 안에서 밖으로 흐르는 빗물을 배수하는데 유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0 세종때 쌓은 성벽, 면석은 방형이고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었다. 성돌을 수직으로 쌓되 조금씩 들여 쌓아 안정감을 주었다.

0 기반암, 풍화암반층을 계단식으로 깎아내어 지지층을 만들었다.

0 세종때의 뒷채움, 태조때의 토성 성벽을 깎아낸 뒤 석축 성벽으로 다시 쌓았다. 뒷채움은 면석을 지지해 주는 동시에 면석의 뒷뿌리를 물고 있어 붕괴를 방지한다.

0 일제강점기에 만든 도로의 흔적, 남산 일대의 성벽은 본래 6m가량 되는 높은 성벽이었다. 일제는 1925년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성벽을 깎아내고 도로를 만들었다. 도로를 만들기 위해 뒷채움돌을 들어내고 자갈이 섞인 산흙을 부어 길을 다졌다.


대장군전, 16섹, 군기시터 출토, 발사체인 대장군전(수철촉, 철우, 나무 세부분으로 구성)은 부속이다.


총통, 16세기, 군기시터 출토, 선조대 제작된 승자계 총통으로 장전과 휴대가 편리하도록 개량한 개인화기이다.


북한지, 조선후기, 숙종때 북한산성 공사 책임자였던 승려 성능이 공사 내용을 편집하여 간행한 지리지이다.

한양의 재정비
1592년(선조25)에 발생한 임진왜란으로 궁궐과 관청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도시 시설물들이 훼손됐다. 1598년 전쟁이 끝난 이후 점차 재정비가 이루어졌다. 궁궐 중건에 대한 논의는 선조 때에 이루어졌으나 본격적인 복구작업은 광해군 때에 진행되었다. 광해군은 즉위년인 1608년 5월에 먼저 종묘를 중건하였다. 이어 8월에 인정전을 비롯한 창덕궁의 주요 전각을 준공하였고 1609년에는 나머지 전각들을 완공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5월에 사직을 복구하였다. 이후 1612년에는 10여개소의 관청을 복구하여 정상적인 업무가 가능해지고, 이후 시전 등을 재건하면서 한양도성은 차츰 본래의 보습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전기의 법궁인 경복궁은 풍수지리상 불길하나든 이유때문에 복원되지 않다가 고종 때에 이르러 옛 위용을 회복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종묘를 중건하여 낙성하였으며 도제조 이하 사람들에게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광해군 일기』4권 광해군 즉위년(16080 5월 30일 -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전란 뒤에 임금께서 오랫동안 누추한 여염에 임어하고 있는 것이 너무도 미안합니다. 국상으로 인하여 공역을 정지한 뒤 남아 있는 미포로 인정전 등의 주요 전각을 이미 조성하였습니다." 『광해군일기』7권 광해군 즉위년 8월17일


한양도, 19세기, 위백교의 『환영지』에 실린 지도를 모본으로 제작한 것으로 궁궐, 성곽, 문루, 丁자로 표현된 시전행랑 등이 있다.

수도방위체제의 정비
한양을 비롯하여 전국을 오위로 구분하여 방어하던 군사체제는 임진왜란으로 한순간에 무너졌다. 급기야 왜란 중에 영의정인 류성룡의 건의로 수도경비를 위한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속오군을 두어 국난극복을 도모하였다. 임란 후에는 수도방위체제가 강화되었다. 인조때에는 친위군 및 경기도 방위 군대를 각각 어영청과 총융청으로 재편하고 수어청을 설치하였다. 숙종 때에는 금위영을 설치하면서 기존의 훈련도감과 함께 오군영체제가 확립되었다. 훈련도감 등 삼군문에 도성민을 편제하여 수도의 방위체제를 정립하였다. 정조 때에는 광주, 수원에 군사행정도시인 유수부를 설치하여 기존의 개성, 강화와 함께 4유수부를 갖추었다. 그리하여 수도 한양을 중심으로 내.외곽의 방위체제가 정비되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류성룡을 도제조로 삼았다." 『선조수정실록』28권 선조27년(1594) 2월1일


조선후기 한양도성 방위체제, 도성삼군문 분계지도, 성신여대 박물관


도성삼군문분계지도, 복제품, 1751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어제수성윤음」에 실린 지도를 모본으로 제작한 것으로 삼군의 경비 구역이 표시되어 있다.


수도방위체제, 경기도 지도, 경희대학교 혜정박물관


도성연융북한합도, 복제품, 19세기전반,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성.연융대.북한산성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한 지도이다.


병학지남, 1787년 정조의 명으로 장용영에서 간행하였으며 17세기 이후 군사훈련의 기본 지침소로 활용되었다.

*참조: 1. 한양 도성의 형성/발전, 문화원형백과, 2002년,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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