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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수도 한양에 살던 사람들

younghwan 2013. 10. 24.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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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이 개국한 이래 수도로 정한 한양은 중국 주나라 제도를 기록한 <주례>를 참조하여 건설된 철저한 계획도시라 할 수 있다. 주산이라 할 수 있는 백악산 아래 궁궐인 경복궁을 짓고 그 동쪽편에 종묘, 서쪽편에 사직을 지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도시였던 한양은 도심을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궁궐, 관아, 권문세가들의 주거지가 형성되었으며, 남쪽으로는 일반인들이 터를 잡고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수도 한양에 거주했던 사람으로는 지배계층이라 할 수 있는 국왕을 중심으로 한 양반관로, 의관.역관 등 전문직 중인과 관청의 서리, 훈련도감 등에 소속된 군인들이 주로 살았으며, 이들은 조선이라는 국가를 운영하는데 필수적인 인원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자나 인력을 공급하기 위한 상인들을 비롯하여 최하층 도둑이나 거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거주했다. 조선시대 한양의 인구는 기록에 따르면 조선초 세종대에 10만여명, 조선후기엔 20~30만명이 거주했던 당대의 대도시라 할 수 있었다. 이는 유럽의 대도시였던 런던이나 파리, 북부 이탈리아 도시국가였던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등과 비슷한 규모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수도 한양에는 지방조직으로 한성부가 설치되었으며, 세부적으로는 남부,북부,서부,동부,북부의 5부로 나누었으며, 각부는 방으로 나누어졌다. 그 중 북부는 인구는 많지 않지만 권문세가들이 주로 살았으며 북촌이라 불렀다. 북촌에 거주했던 권문세가들은 조선초에는 개국공신을 비롯하여 훈구세력이 주로 살았으며, 조선중기 이후 주도세력으로 등장한 사림 또한 주도세력인 노론을 중심으로 북촌에 터를 잡았다. 북촌은 상업지구를 형성했던 종로 운종가 북쪽에 궁궐과 관아 주변을 말하는데 양반들의 저택과 그들에 딸린 노비 등이 살았다. 북촌 권문세가들은 조상대대로 한양에서 터를 잡은 경우가 많으며, 이들 지방에 별도의 세거지를 두고 이에 딸린 토지에 경제적 기반을 두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지방 고택들이 대부분 이들 권문세족들의 세거지라 할 수 있다.


한양사람들
한양에는 국왕을 중심으로 양반 관료가 있었고, 의관.역관 등 전문직 중인들과, 관청의 서리, 그리고 훈련도감 등에 소속된 군인들이 살았다. 한편 상인들은 운종가를 중심으로 남대문 밖 칠패, 한강변의 마포 등에 거주하였다. 도성 밖에는 채소와 과일을 생산하는 농민들이 살았고, 최하층에는 도둑이나 거지들도 있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한양의 인구는?
조선시대에는 세금을 부과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구를 파악했기때문에 인구통계에 누락이 많았다. 그래서 학자들은 전체 인구의 30~40%가 통계에서 빠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428년(세종10)에 조사한 한양의 인구통계는 10만 9천 명이었는데 사실상 이보다 많은 인구가 살았던 것이다. 17세기 중반에는 20만 명이 넘었으며 18세기 후반에는 30만 명이 넘는 대도시가 되었다. 1789년(정조13)에 발간된 『호구총수』에서는 한양의 인구가 189,153명으로 집계되었다. 『호구총수』에 따르면 도심인 중부가 약 2만 명에 불과하였던 반면 서부는 6만 8천 명으로 가장 많았고, 남부는 4만 6천명으로 그 다음이었다. 한강을 끼고 있는 지역이 상대적으로 인구가 많은데, 조선후기에 이들 지역의 거주자가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시대 서울의 행정구역. 북부,중부,동부,남부,서부의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구는 20여만명으로  북부 24,297명, 중부 20,186명, 동부 29,710명, 남부 46,784명, 서부 68,194명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인구의 변화


민가는 오부에서 통솔하고, 병사는 삼영에서 관리하네. 비늘처럼 늘어선 기와집 4만 호는 맑은 물속에 방어와 잉어가 노니는 듯하네. - 박제가 「성시전도시」-


묵서명 자기편, 조선, 종묘광장 출토, 조선시대 사람의 이름으로 보이는 '고비, '감덕' 등의 글씨가 있다.


심의풍 호패, 1827년, 신상정 기증, "23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83세에 한성부 판윤에 오르다.".
호패는 현재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것으로 조선시대에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발급되었던 패찰이다. 호구를 파악하고 신원을 증명하기 위한 용도로 발급되었으며 신분과 계급에 따라 재질과 기재 사항이 달랐다. 심의풍 호패는 상아로 만든 아패로, 이름과 생년을 비롯하여 벼슬에 들어간 연도, 과거에 합격한 시기가 기재되어 있다. 호패의 주인인 심의풍(1805~)은 23세 되던 해인 1827년(정해, 순조27)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을 시작으로 전라도 수군절도사,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83세 때인 1887년(고종24) 정2품 한성부 판윤에 올랐다.


심의풍 호패에 기록된 내용.


다양한 호패들


한양사람들 모형. 권세가 저택에서 잔치를 벌이는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넉넉한 마을, 북촌
북촌 땅에는 햇볕도, 재부도 넉넉하였다. 뒤로는 백악에서 응봉으로 흘러가는 산자락을 기대고 앞으로는 개천(현재의 청계천)을 바라본다. 아울러 동쪽에 위치한 창덕궁과 서쪽에 자리한 경복궁의 두 궁궐을 품에 안고 있다. 대개 고위 관직에 있으며 재산과 학문적 소양을 두루 갖춘 사람들이 모여 산 이곳은 서울 양반들의 중심 터전이었다. 이들은 백악산과 인왕산의 기슭에다 정자를 짓고 문학과 예술을 꽃피우기도 했다. 도성 안 다른 곳에 비해 넓은 집터 사이로 난 북촌의 골목골목은 양반의 심부름을 하는 겸인과 노복들이 함께 생활하는 현장이기도 하였다. 또한 북촌은 궁궐의 그늘에서 권력의 긴장이 감도는 지역이기도 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노론들이 살았다. 그 남쪽은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 이하 삼색당이 살았다." - 황현 『매천야록』「북촌남촌」 중에서 -

한양의 상류계층, 경화사족
한양에서 대대로 부귀를 누리며 살던 이들을 경화사족이라고 하는데 특히 북촌에 많았다. 북촌의 사족들은 보수 세력으로서 당색은 대개 서인 노론계에 해당한다. 이들은 성리학적 질서를 추구하고 대의명분을 중시하면서 명나라를 정통왕조로 인정하는 세력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이 되자 경화사족들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청에서 유입되는 북학이나 고증학, 문학, 문물 등을 수용하였다. 명물도수, 즉 사물과 법식, 수량 등 실질적이고 자연과학적인 지식에도 관심이 많았다. 아울러 서화나 골동 등에도 호감을 갖고 중국에서 들어오는 사치스런 기물들의 수집에 정성을 쏟기도 하였다. 이들은 조선의 정치 사회를 주도하면서 동시에 도시의 문화를 향유하고 선도하는 최상류 계층이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두실 심상규(1766~1838)의 가성각 편액은 청나라 옹방강이 썼다. 이 가성각은 나라 안에서 제일간다. 비록 한두 채의 웅장하고 화려한 집은 있으나, 가성각의 안온하고 정치한 데는 미치지 못하였다. 공이 평생 기력을 다하여 이 집들을 이루고 정력을 기울여서 고금의 서화와 기이한 돌이며 골동품을 수집하여 이 집에 보관하였다." - 이유원 『임하필기』「가성각」중 -


풍계유택, 복제, 정선, 인왕산 기슭에 있던 정선의 외조부 박자진의 집이다. 이층 누각이 보이고 별당도 두채나 되는 대규모의 저택이다. 뒤로는 인왕산 자락이 펼쳐져 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북촌 사대부, 부귀와 권세의 상징
지리적으로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는 북촌은 조선초기부터 권력 있는 사대부들의 주거지로 자리매김하였다. 초기에는 백악산 자락에 있었던 의령남씨 남곤의 집인 대은암, 안동김씨 김번의 무속헌 등이 유명하였다. 김번의 증손자인 김상용.김상헌 형제와 후손들은 장의동(현재 청운동)에 산다고 하여 장동김씨로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자하동에는 의령남씨, 옥류동에는 기계유씨 등이 대대로 거주하였다. 또한 인근에는 청송당 성수침, 송강 정철의 집들도 있었다. 또 이문동(현재 인사동)에는 능성구씨 능천부원군 구수영과 그 자손들이 고대광실을 짓고 살았으며, 순조 때에 정승을 지낸 청송심씨 심상규는 송현(현재 송현동)에 터를 잡았는데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또한 경행방(현재 낙원동)은 해주오씨 오태주와 현종의 딸 명안공주가 살았던 곳이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송시열 초상, 조선후기, 창의에 검은 건을 쓴 유학자 송시열(1607~1689)의 초상이다. 한양 사대부 중에는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한성부 오태주 준호구, 1702년, 박한설 기증. 주의 준호구에 의하면 그는 1702년(강희41)에 경행방 오순덕계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서에는 오태주의 신상을 기록하고 부친.조부.증조부.외조부를 소개하였으며, 또 처인 명안공주의 부친.조부.증조부.외조부를 기록하였다. 마지막으로 데리고 있는 노비와 그들의 가족관계를 기재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마을에 남아 있는 오정방고택. 오태주의 아버지 오두인이 살았던 고택이다. 조선시대 한양의 권문세가들은 지방에 경제적 기반이 되는 세거지를 두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해주 오씨는 대대로 경기도 안성에 세거지를 두고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오두인을 모신 덕봉서원이 이 마을에 있다. 덕봉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서원 중 하나이다.

북촌 사대부, 해주 오씨
북촌의 경행방(현재 낙원동)에는 해주오씨 오태주와 그 후손들이 살았다. 오태주는 형조판서를 지낸 오두인의 아들로 1680년(숙종6)에 현종의 셋째 딸인 명안공주와 혼인하여 이곳에 살았다. 오태주는 공주의 오빠인 숙종과 친하여 서로 간에 자주 시를 주고 받기도 하였다. 그런데 명안공주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사망하지 조카 원이 양자로 들어와 가계를 계승하였다. 오원은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승지, 공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고모부이자 당대 예학의 대가인 이재에게 배웠다. 그 아들 오재순 역시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판서에 올랐다. 이후로도 후손들은 대대로 명문가의 위상을 이어갔다. 오태주와 그 후손들은 집안의 문서를 잘 보전하여 오늘날까지 자신들의 역사를 잘 알려주고 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양반가 남자의 차림새, 관리가 일상적인 직무를 볼 때 입는 관복으로 양반가 남자의 상징적인 차림새이다. 단령(둥근깃과 흉배가 달린 관복), 허리띠(무소뿔로 장식한 1품 관리의 서대), 사모(얇고 성근 비단에 옻칠하여 만든 모자), 목화(단령을 입고 신는 부츠형태의 신발)로 구성되어 있다.


허리띠, 목화(신발), 사모(모자)


사랑방, 조선후기, 신상정.최기종.한산일 기증, 조선시대 남성의 생활공간으로 청재라고도 불렀다. 사랑방의 가구들은 기품 있는 가구와 소품들이주류를 이루고 있다. 사랑방에는 경상, 종이, 붓, 먹, 벼루 등의 문방사우와 연적 등을 정리한 연상, 책과 소품을 정리하는 문갑, 사방탁자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벽에는 고비를 걸어 장식 효과와 함께 두루마리 한지 등을 꽂기도 하였다. 또한 사랑방에는 남성들의 생활용품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애호하는 서화나 골동 등이 수장되기도 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간평의와 방성도. 간평의(1850년대)는 별자리와 절기별 일출.일몰시간을 알 수 있는 천문관측기로 서양 선교사들이 처음 제작하였다고 한다. 방성도(1764년, 신상정 기증), 동양의 별자리를 서양의 방식으로 그린 청대 천문도로 한양 양반들은 이를 통해 서양의 우주관을 습득하기도 했다.


진주담도, 심사정(1707~1789), 18세기, 내금강 만폭팔담 중 진주담을 그린 산수도로 경치를 그림에 담아 유람하고자 한 18세기 한양 양반들의 서화애호 풍조를 보여 준다.


부채장식, 조선후기, 신상정 기증. 나침반이 달린 부채 장식도 볼 수 있는데 조선후기 새로운 지식에 대한 양반들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표주박, 조선후기, 나무, 소라껍질 등 다양한 재질로 만든 휴대가 가능한 작은  바가지이다.



양반가 여자의 차림새


신발


안방, 조선후기, 김을동.신상정.운형궁 기증, 양반가 여인들만의 생활공간이다. 어른을 모시고 자녀를 양육하는 등 가족의 의식주를 전담하는 가정의 중심공간이었다. 바느질은 조선시대 여성들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의 하나로, 바느질에 필요한 규중칠우(바늘, 자, 가위, 인두, 다리미, 실, 골무)를 담는 반짇그릇은 여성의 기본적인 혼수품이었다. 규중칠우는 남성들의 문방사우와 대비되는 것으로 남녀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대변해 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열쇄패, 조선후기, 집에서 쓰던 여러 가지 열쇠 등을 꿰어서 만든 것으로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열쇠패를 물려받았다.


백자 청화 화장용구, 19세기


여성머리 장신구, 조선후기, 신상정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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