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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올림픽공원내 위치한 한성백제박물관에서는 2013년 겨울 "백제의 꿈, 왕도한산(王都漢山, The Capital of Backje Hansan).몽촌토성 발굴 30주년 기념 특별전"이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이번 전시는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경기장이 들어설 올림픽공원 조성을 위해 실시된 몽촌토성 발굴.조사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라 한다. 당시 발굴.조사를 통해 복원된 몽촌토성은 풍납토성과 함께 백제가 기원전 18년 건국된 이래 고구려의 압박으로 웅진으로 천도한 475년까지 약 500여년간 수도로 삼았던 곳이다. 당시 발굴.조사과정을 통해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한성백제기의 유물들이 출토되었으며, 급박하게 진행된 까닭에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부분이 많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의 첫번째 수도는 하남 위례성으로 알려져 있다. 하남 위례성은 실제 그위치가 정확하게 고증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한강변에 위치한 풍납토성일 것으로 많은 학자들이 추정하고 있다. 풍납도성은 둘레 3,740m에 면적은 70㎥가 넘는 토성으로 둘러져 있는 고대 백제의 도성(道成)이라 할 수 있다. 당시 한반도에 존재했던 많은 성읍국가들 중에서 그 규모가 상당히 큰 편으로 백제가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하면서 현재의 규모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도성이었던 풍납토성 남쪽편에 위치한 몽촌토성은 백제가 한반도 서남부지역 전체를 지배하게 되면서 도성(都城)이 확장되면서 새로 쌓은 것으로 보고 있다. 기존의 풍납토성은 북성(北城), 몽촌토성은 남성(南城)이라 할 수 있으며 당시 왕이나 귀족층이 살았던 지역으로 보인다. 몽촌토성 발굴조사 결과 건물터와 함께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중국에서 수입한 각종 도기와 청자, 벼루와 그릇 등과 함꼐 일본과의 교류관계 등을 보여주는 토기들도 같이 출토되고 있다. 삼국시대 한반도 고유의 문화를 보여주는 다른 지역의 유물들과는 달리 중국과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비교적 많은 것으로 보이며 당시 해상무역로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백제의 역할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전시를 열며, 몽촌토성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역사는 기록에서 비롯된다. 기록을 통해 사실을 남기고, 기록을 통해 옛일을 되집는다. 하지만 모든 기록이 보존되는 것은 아니다. 한 줌의 기록만 남을 뿐, 나머지는 잊혀지고 사라진다. 그럼에도 옛 사람의 흔적은 땅속에 남게 마련이다. 땅속에서 찾은 흔적들이 하나의 실마리가 되고, 실마리들이 모여 한 페이지의 역사가 된다. 그래서 오늘도 과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지루하지만 설레는 과정이 계속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고고학의 '발굴'이다. 30년 전에 시작한 몽촌토성 발굴조사는 미지의 백제 한성기 역사를 풀어가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이라는 국가적인 행사로 긴박하게 이뤄진 발굴조사였지만, 6년간의 발굴을 통해 어둠 속에 켜켜이 쌓여있던 백제사의 실마르를 찾을 수 있었다. 2013년 11월, 몽촌토성 발굴조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서울대학교박물관이 첫 삽을 뜬 곳에서 39년 만에 한성백제박물관이 포크레인으로 다시 땅을 연 것이다. 지금 우리가 딛고 선 땅 밑 2~4m에는 아직도 백제 사람을의 숨결과 손때 묻은 유물이 남아 있다. 왕도 한산의 찬란한 내일을 갈망하던 백제의 꿈을 품고서.... <출처:한성백제박물관>


2013년 겨울, 올림픽공원내 한성백제박물관에서는 "백제의 꿈, 왕도한산(王都漢山, The Capital of Backje Hansan)."라는 제목으로 몽촌토성바굴 3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을 개최하였다.


전시장 내부

몽촌의 유래
몽촌(夢村)은 몽촌토성 일대에 있던 몽촌, 큰말, 일리내, 잣나무곳을 통틀어 부르던 지명이다. 한국어 '곰말'에서 곰이 꿈으로 바뀌어 몽촌이 된 것이다.

"(우왕) 6년에 물러나 광주 고원강촌에서 살았다. .... 나이 73세에 병으로 광주 고원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 『고려사』 권112 「열전」 조운흘 -
※ 고원(古垣): 흙으로 둘러쌓은 담장을 뜻하는 말로 곧 토성을 뜻한다. 한때 몽촌토성 뿐 아니라 풍납토성도 고원성으로 불렸으나, 풍납토성에는 큰 마을이 없었다.

"산천 망월봉: 주(州)의 서쪽 10리 몽촌에 있다."
"인물 조운흘: 늘그막에 주(州)의 몽촌에 집을 짓고 살았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6 광주목 -

"광릉의 서쪽에 몽촌이 있는데, 경성에서 20리 가까이 떨어진 곳이다."
- 『사가문집』 권1 「무진정기」. - ※사가문집은 서거정의 문집이다.

"중대면 이리 토루: 약 230간 정도가 현존하고, 그밖의 부분은 분명치 않다. 높이는 약3간이며 도기 및 기와 파편이 흩어져 있다."
- 1916년 조선총독부 고족조사, 조선총독부, 1942년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

<출처:한성백제박물관>

왕도한산(王都漢山)의 어제
왕이 사는 공간을 '왕궁'이라 부르고 이를 둘러싼 성을 '왕성이라 하였다. 왕성 안에는 귀족과 관료, 그리고 이들에 딸린 소수의 백성들이 거주하였다. 왕성 바깥에는 주로 일반 백성들이 거주하지만, 귀족들 중 일부가 큰 저택을 짓고 살기도 했다. 마을.도시 너머에는 왕과 구족들의 무덤이 자리잡았다. 왕성 바깥의 마을.도시와 왕실묘역까지 아울러 '왕도'라고 한다. 백제의 첫 왕성은 위례성이다. 그런데 371년 근초고왕이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이후 한성이라는 이름이 자리잡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이 두성을 아울러 한성이라고 하였다. 최고 권력자인 왕이 사는 곳인 만큼 백제의 왕도에는 최고 수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역량이 총집결되었다. 백제 왕도의 한 축이었던 몽촌토성을 발굴한 성과는 백제 한성도읍기 연구의 기본 토대가 되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위례성 한산.한성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의 첫 도읍은 하남위례성이다. 여기서 하남(河南)이란 '한강의 남쪽'이라는 뜻이며, 위례는 '우리', '울타리'를 뜻한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한강 남쪽의 위례성이 지금의 풍납토성이라고 믿는다. 풍납토성 안에서 발견된 3중 환호가 바로 백제의 초기 방어시설이며, 이것이 3세기 중엽에 거대한 성벽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4세기 무렵 위례성이 한성으로 바뀌었다. 자리를 옮긴 것이 아니라 이름을 중국식으로 바꾼 것이다. 한성은 '큰 성'이라는 뜻이다. 고대 한반도의 나라들은 처음에 고유 전통을 유지하다가 중국의 선진 제도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그에 맞춰 정치 구조를 개혁하는 한화(漢化)정책을 펼쳤다. 따라서 위례성에서 한성으로의 변화는 단순히 이름만 바꾼 것이 아니라 백제 도성제의 변화를 의미한다. 삼국사기에는 근초고왕 26년(371)에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는 기사가 있다. 한산은 지금의 남한산으로 추정되는데, 산줄기 범위가 넓어서 지금의 몽촌토성도 그 능선의 끝자락에 해당한다. 따라서 도시가 내려다 보이는 높은 지점에 군사기능에 충실하면서도 왕의 권위를 나타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성을 쌓고 근초고왕이 거처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북성과 남성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형태의 한성이 출현했는데, 이것은 왕성체제에서 도성체제로 전환하는 첫걸음으로 나중에 사비 나성으로 발전한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발굴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재현한 몽촌토성 모형. 사면이 해자로 둘러싸여 있는 전형적인 백제 성곽도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왕이 살다. (王城, Royal Fortress)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은 왕이 거처하는 왕성이었다. 따라서 왕궁, 관청, 사찰, 귀족의 저택과 정원 등이 밀집하였을 것이며, 곳곳에 도로와 하수구 드이 놓였을 것이다. 1980년대 발굴에서 몽촌토성이 왕성이었다는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한강과 임진강 유역에서만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대규모의 육각형 주거지 땅을 파고 잔돌을 심은 뒤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린 지상건물지, 무게와 색깔만큼이나 건물에 품위와 권위를 더했을 기와.벽돌 등 건축관련 유구와 유물 수량은 다른 지역과 뚜렷하게 차별될 정도로 우월하다. 왕과 귀족들만이 꾸밀 수 있었던 옥과 유리, 금.은.동으로 만든 장신구, 중국에서 수입한 각종 도기와 청자, 귀족이나 관료 이상만 썼을 듯한 벼루와 각종 그릇 등이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왕실묘역인 석촌동고분군에서 출토되었다. 이밖에도 일본의 스에키와 하니와형 토기들이 출토되어 백제와 왜 사이의 교류 흔적도 발견되었다. 고대 왕성이 지니는 경제적 풍요와 화려한 생활문화는 권력과 군사력에서 나온 것이다. 왕실이 주관하는 제의는 공동체 사회를 결집시키고 왕실의 신성성을 부각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그릇받침과 말 아래턱뼈는 제의에서 바쳐진 그릇과 제물인 듯하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몽촌토성 고지대 건물터 발굴모습

왕궁(王宮, Palace)
남성(몽촌토성)과 북성(풍납토성)으로 이루어진 한성은 왕고 지배층이 모여사는 백제의 수도이므로 공간구획이 다른 지역과 달랐다. 한성의 북성인 풍납토성 내부의 정중앙에서 약간 북쪽으로 치우진 지점에 해당하는 경당지구에서는 제의와 관련된 지상건물.구덩이.우물과 왕실창고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발견되었따. 창고건물 안에는 중국제 시유도기 30여점을 포함한 대형 저장항아리 70여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학계에서는 경당지구를 백제 왕궁의 일부라고 믿는다. 경당지구 옆 미래마을 부지에서 발견된 너비 3m의 자갈포장도로와 토관은 백제의 선진적인 토목건축기술과 배수시스템을 보여준다. 한성의 남성인 몽촌토성에서는 아직 뚜렷한 왕궁 흔적을 찾지 못하였다. 다만, 성 안 서남쪽의 가장 높은 대지에서 지상식 건물지를 발견하였는데, 땅을 파고 잔돌을 심은 뒤 기둥을 세운 적심건물이었다. 건물지 부근에서는 연못 흔적도 확인되었다. 몽촌토성 주변에 고층건물이 들어서기 전에는 이곳에서 성안은 물론 성 바깥 한강일대와 저 멀리 행주산성까지 조망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북문.동문.남문으로 내려가는 길 흔적을 추정할 수 있으며, 주변 곳곳에서 발견되 대규모 육각형 주거지와 저장구덩이에서 뼈로 만든 비늘갑옷과 각종 고급 그릇 및 대형 저장항아리가 출토되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수키와(Roof tile, 풍납토성)

수막새(瓦當, Roof-end tile), 기와는 집의 지붕을 덮는 건축자재로서 4세기 무렵부터 궁궐.관청.사찰 등의 건물에 쓰였다. 백제기와는 굽는 온도가 낮아서 대부분 회색이며 두꼐는 1cm 안팎으로 얇다. 모골(거푸집)을 사용해 만든 것과 점토띠를 쌓아 만든 것이 있다. 백제 한성기 수막새 문양은 풀꽃무늬, 지미승얼굴무늬, 동전무늬, 동그라미무늬, 연꽃무늬, 점띠무늬 등이 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연꽃무늬수막새(Roof-end tile, 풍납토성), 짐승얼굴무늬수막새(Roof-end tile, 풍납토성), 풀꽃무늬수막새(Roof-end tile, 풍납토성)


벽돌(Bricks, 풍납토성), 주춧돌장식(Earthen Column Base, 풍납토성), 토관(Clay Pipe, 풍납토성)

동전무늬도기(Sherd of Gray-glazed Earthenware)
중국에서는 한나라때부터 항아리 표면에 동전무늬를 두드리거나 눌러서 표현한 도자기가 사용된다. 특히 양자강 유역에서 동오-서진-동진때 만든 것이 많은데, 동오때에는 '대천오십', 서진 이후는 오수전 무늬를 새긴점이 특징이다. 동전무늬도기는 항아리 안에서 동전꾸러미가 나오는 일이 잦기 때문에 표면의 동전무늬가 동전보관이라는 쓰임새와 관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몽촌토성에서 처음 흑갈유 동전무늬도기 3점이 발견된 뒤 풍납토성, 홍성 신금성 등 백제유적에서 속속 출토되었다. 특히 풍납토성에서는 왕실창고로 추정되는 곳에서 동전무늬도기 4점을 비롯해 중국제 시유도기 33점이 발견되었다. 중국제 동전무늬도기는 3~5세기에 백제가 중국 남조와 활발히 교섭했음을 알려준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동전무늬토기편(Sherd of Gray-glazed Earhenware, 몽촌토성), 중국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장신구와 외래유물(Ornaments and The imported goods)
장신구란 옷과 더불어 사람의 몸에 착용하는 관, 관식, 목걸이, 귀걸이, 팔찌, 허리띠, 노리개 등을 말한다. 삼국시대 장신구는 단순히 치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상위계층이 자신의 정치.사회적 지쥐를 드러내는 위신재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삼국시대 장신구는 당시 사람들의 문화 취향 뿐 아니라 사회상황 및 문물교류 상황을 함축하고 있다. 백제의 왕과 귀족들은 금.은으로 만든 공예품과 옥.유리로 만든 장신구로 자신의 고귀한 신분을 드러냈다. 이러한 고급 장신구는 유물의 성격상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 같은 생활유적보다 주로 석촌동 고분군과 같은 무덤유적의 껴묻거리로 출토된다. 그런데도 몽촌토성 저장구덩에서 금동제 허리띠장식이 출토된 것은 몽촌토성이 왕성이었기 때문이다. 장신구와 함께 귀족의 일상생활에서 쓰이던 다양한 외국물품이 백제 왕도로 수입되었다. 북쪽의 고구려와 낙랑지역, 남쪽의 영산강 유역과 가야지역, 그리고 바다건너 중국과 왜에서 건너온 귀한 물품들이 한성의 왕실과 귀족들에게 전해졌다. 중국 남조로부터 수입한 청자와 흑유자기가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을 비롯하여 백제의 지방 곳곳에서 다수 발견되었으며 스에키, 하니와형 토기 같은 왜계 유물도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서 출토되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금동제허리띠장식(Ornament, Gilt Bronze, 몽촌토성)


구슬(Beads, 화성 마하리 고분군), 금귀걸이와 구슬(Earring and Bead, 화성 마하리 고분군), 구슬(Beads, 풍납토성), 굽은옥(Bead, 풍납토성)


은제귀이제(Earpick, 석촌동 고분군), 금귀걸이(Earring, 풍납토성), 금귀걸이(Earing, 화성 마하리 고분군), 금귀걸이.영락(Earring and Spangles, 석촌동 고분군)

청자와 흑유도자기(靑磁.黑釉陶磁器, Celadon and black-glazed jar)
4~5세기의 백제 무덤과 생활유적에서 중국 청자와 흑유도자기가 많이 출토된다. 중국에서 수입한 귀한 도자기들은 당시 왕족이나 최고위 귀족들만 소유할 수 있는 물품이었다. 지방에서 발견되는 중국산 도자기는 백제왕이 내려준 위세품으로 추정된다.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청자벼루는 당시 문자생활을 짐작케 하며 지식인 및 관료의 생활문화를 상징한다. 1980년대 몽촌토성에서 처음 돌절구가 출토되었다. 돌절구는 중국의 차문화에 영향을 받아 다병이나 약재를 빻는데 사용하는 다확일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가 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유약바른도기(Sherd of Glazed Earthenware, 몽촌토성), 흑유도기(Sherd of black-glazed earthenware, 풍납토성), 흑유도기(Sherd of black-glazed earthenware, 몽촌토성). 도기는 대표적인 중국의 유물로 한반도에서는 당시 자체적으로 제작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수입된 것이라고 하는데, 아직도 유물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볼 때 백제에서는 중국 도기를 많이 수입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갈유도기(Sherd of brown-glazed earthenware, 몽촌토성), 청자벼루(Sherd of Celadon inkstone, 몽촌토성)


청자(Sherd of Celadon, 풍납토성), 청자(Sherd of Celadon, 풍납토성), 청자(Sherd of Celadon, 몽촌토성)


청자병(Sherd of Celadon bottle, 몽촌토성), 청자완(Celadon Bowl, 몽촌토성)


돌절구(Stone Mortar, 몽촌토성), 돌절구(Stone Mortar, 풍납토성), 차를 빻는 용도로 추정되는 유물로 당시에 차를 끓여 먹는 문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게 해 주는 유물이다.


뚜껑접시(Flat Cup(Sueki), 몽촌토성), 하니와(Sherd of Haniwa, 풍납토성), 일본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제의(祭儀, Meorial Ceremony)
고대사회에서 제의는 공동체의 정신적 결속과 밀착을 도모하는 종교적, 정치적 행위였다. 백제의 제의는 시조묘제사, 천지신제사, 산천제사로 나눌 수 있는데, 대표적인 제사유적으로 공주 정지산유적, 부안 죽막동유적 등이 있다. 서울에서 발견된 백제 제사유적으로는 풍납토성 경당지구 여자모양 건물터와 2006호 우물이 주목된다. 여자모양 건물터는 전실과 본실로 구성되며, 본실의 크기가 너비 16m, 길이 18m 이상인 큰 건물이다. 본실 외곽을 ㅁ자형의 도랑이 감싸는데, 도랑은 너비 1.5~1.8m, 깊이 1.2m 정도로 일정하며, 바닥에는 대형판석을 깔았다. 건물터 안쪽에 판자를 대고 판자 바깥에 흙을 두텁게 발랐으며, 바닥면에는 점도가 높은 진흙을 깔아 정리하였다. 치밀한 설계와 공력이 투입된 대형 건물로서 국가나 왕실이 주관하는 제사공간인 동명사당으로 추정된다. 경당지구의 206호 우물에는 200여 점의 토기가 인위적으로 매납된 것으로 보인다. 200여 점의 토기 중 상당수가 백제 지방양식이어서 중앙과 지방세력이 함께 모여서 모종의 의례를 치른 우물로 추정된다. 몽촌토성에서는 움무덤으로 보고된 유구에서 세발토기, 굽다리단지, 손잡이잔 등이 출토되었는데, 아가리 부분을 일부러 깨고 묻는 훼기 특징이 나타나는 점에 주목해 무덤이 아닌 제사유구로 보기도 한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굽다리합(Mounted bowl, 몽촌토성)


바리모양그릇받침(Bowl-shaped pottery stand, 몽촌토성), 세발토기(Pottery with three legs, 몽촌토성)


굽다리단지(Mounted small jar, 몽촌토성)

그릇받침(器臺, Pottery stand)
바닥이 둥근 항아리 등을 받치기 위한 것으로서, 그릇을 받치는 부분과 굽다리로 구성된다. 신라.가야의 그릇받침은 그릇 받침부가 크고 깊은 편이지만, 백제 그릇받침은 받침부가 작고 굽다리는 좁고 긴 편이다.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그릇받침은 대개 회백색.암회색의 원통형이며, 간혹 굽다리 아래쪽이 나팔모양을 벌어지는 장고형이 발견된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원통모양그릇받침(Cylindrical pottery stand, 몽촌토성), 원통모양그릇받침(Cylindrical pottery stand, 몽촌토성). 삼국시대 신라나 가야에서 만들었던 굽다리 그릇받침과는 그 형태가 많이 다르다.


원통모양그릇받침(Cylindrical pottery stand, 풍납토성)

말 마래턱뼈와 말모양 토우(Horse mandible and clay figurine)
말을 희생하여 제사를 지내는 문화는 세계 각지에서 확인된다. 풍납토성 경당지구에서도 말머리뼈가 발견되어 제의와 관련된 희생물로 여겨진다. 특히 바로 옆 구덩이에서는 말모양 토우도 출토되었는데, 말을 직접 죽이는 대신 흙으로 만든 말모양 인형을 훼손해 구덩이에 던져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동물뼈(Deer Bones, 몽촌토성), 말아래턱뼈(Horse Mandible, 몽촌토성)


토우(土偶, Clay Fingurine, 풍납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