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지역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일제강점기 고국을 떠난 사람들, 김가진 일가

younghwan 2013. 12. 5. 11:46
반응형


 김가진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10월 70세가 넘은 노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김의한과 함께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상해로 떠나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된다. 상해 교민사회와 임시정부에 있어서 김가진은 구한말 고위관료를 지내고 대한제국 대신을 지낸 인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진 인물이었으며 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되어 독립운동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김가진은 국내에서부터 대동단 총재로서 활동하였으며, 대동단은 김가진의 망명에 이어 의친왕을 망명시키려다 실패하고 국내조직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대동단 또한 상해로 본부를 옮겨 활동하게 된다.

 이후에도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했던 대동단 총재 김가진의 존재는 국내 대동단이 와해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중요 동력이 되었다. 상해임시정부에 교민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는 등 그 활동을 계속 이어오던 김가진은 상해로 망명한지 3년째 되는 1922년에 상해에서 그 생을 마감하게 된다. 김가진 일가의 독립운동은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가 임시정부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명맥을 이어왔다.

"민국의 존망 앞에 어찌 내 몸을 돌보리, 찢긴 갓에 누더기 입고 상등 찻간에 앉은 이를 누가 옛적 대신이라 알아볼 것인가"

망명열차 안에서, 1919년 10월
허름한 옷을 입은 백발의 노인과 그를 따르는 청년 하나가 중국 단둥으로 향하는 기차의 삼등칸에 몸을 실었습니다. 이들은 바로 얼마 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대한제국의 노대신 김가진과 그의 아들 김의한이었습니다. 안동김씨 명문가의 서얼로 태어나 대한제국의 대신까지 지냈으나, 빼앗긴 나라에서 억지로 주어진 작위를 뿌리치지도 못하고 지낸 영욕의 세월을 뒤로하고 생의 마지막에 독립운동을 위해 떠나는 길입니다.

"남편을 떠나보낸 내 나이 이제 스무살, 이 모든 아픔을 뒤로하고 나는 달린다.
도피도 아니고 안주도 아니다. 또 다른 비바람을 맞기 위해 스스로 떠나는 길이다."

1920년 1월, 스무 살의 정정화는 두달전 상해로 망명한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을 찾아 무작정 열차 안에 몸을 실었습니다. 독립운동에 대한 거창한 대의보다는 연로한 시아버님을 모셔야 한다는 소박한 뜻에서 나온 결심이었습니다. 서울에서 의주로, 의주에서 봉천으로, 봉천에서 산해관으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고된 여로를 거쳐 드디어 상하이에 도착, 미처 상상하지 못했을 길고 긴 피난 생활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상하이 시가도, 1932년


상하이 사진엽서, 동농일가가 상하이에 거주했을 당시 상하이 곳곳의 모습이 담겨 있다.

상하이, 찬란한 잡색
동농 일가가 망명한 1920년대 상하이는 아시아 최대의 국제도시였습니다. 1842년 난징조약 이후 개항하여 일찍이 국제적인 감각을 익혀온 상하이는 이 시기 항구도시이자 금융도시로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살롱과 상점이 들어선 거리는 미국인, 프랑스인, 러시아인, 인도인, 일본인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로 북적였고, 영화와 연극 등 세련된 대중예술을 선보이며 동.서양 문화가 뒤섞인 독특한 도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한편 상하이는 약소민족국가의 이주민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자, 망명가와 혁명가들이 대외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정치적 자유의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번영과 환락, 자유가 혼재된 이 도시에서 동농 일가는 서울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상하이 임시정부, 삼일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기운이 높아진 가운데, 1919년 상하이에서는 국내외 정부수립운동을 통합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 내에서는 일본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었으며, 쑨원이 이끄는 광둥정부의 지원을 받기도 수월했습니다. 정부 수립 초기 임시정부는 비밀행정망인 연통제와 통신기관이 교통국 등을 조직해 국내와의 연계를 지속하는 한편, 애국공채를 발행하거나 국민의연금을 통해 재정확보에 힘썼으며, 독립신문을 발행해 선전활동에 힘썼습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연통제에 대한 일본 외무부 문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1921년, 임시의정원을 1921년 9월25일에 소집한다는 내용이다. 임시정부 국무원 포고, 간도 동포들에게 항일투쟁에 매진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독립신문 창간호, 1919년, 임정에서 발행한 기관지이다.


대한민국 인구세 영수증, 1927년. 독립공채, 1919년, 임정에서 발행한 독립공채의 견본이다. 액면가는 100원이고, 상환기간은 광복 이후이다.


임시정부 사람들의 생활물품. 임정에 참여했던 주요 인물과 가족들


이회영 모자와 신발


이자해 회중시계, 유림 부채, 이자해 안경


유림 만년필, 담뱃대


김창숙 인장, 신규식 인장


장건상 벼루, 황학수 벼루

김가진의 말년, 독립을 위한 부투
김가진의 망명은 상하이 한인 사회를 크게 고무시켰습니다. 대한제국 대신이 망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에게 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김가진은 곧 임시정부의 고문으로 추대되어 독립운동의 정신적 구심이 되었습니다. 대동단 총재 역할을 지속하며 국내와의 연락을 계속하는 한편, 교민들을 대상으로 강연활동을 벌이며 생의 마지막까지 독립을 위해 분투하였습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한 대동단원의 건의문, 미국.중국과 연합하여 군사상 근거지를 통합하고 간도일대와 연계하여 군중 봉기를 일으키자고 김가진에게 건의하는 내용이다.


김가진 강연문, 1920년, 상하이 교민단체 초청 강연의 연설문이다.


대한민국 2년 축시, 1920년, 손병희 회갑 축시, 1921년, 동호 안태국 만사, 2920년, "구차함을 참고 견디기 칠년, 드디어 죽을 병을 얻고 말았네. 조국 광명이 눈 앞에 와 있는데, 하늘은 어찌 그리 급히 안군의 명을 앗아갔는고"

상하이에서의 대동단 활동
독립을 위한 비밀결사조직 대동단 총재로서 김가진의 활동은 상하이에서도 이어집니다. 1919년 말, 대동단은 의친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다 결국 일제에 발각되어 주요 요인들이 검거되고, 대동단 본부는 총재 김가진이 있는 상하이로 옮겨옵니다. 김가진은 대동단이 건재함을 알리는 선언서를 발표하였고, 이는 곧 국내로 전달되어 대동단 활동의 명맥이 이어지는 중요 동력이 됩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김가진 일기, 1921년, 상하이에서의 궁핍한 삶과 악화된 건강에 대해 적고 있다.


김가진의 비밀편지, 1920년, "본 단체의 백만 건아가 단련한 주먹들이 합세하여 일어나, 북을 한번 울리면 포악한 왜놈을 소탕할 것이고 북을 두번 울리면 강토를 회복할 것이다."


임시정부 동향 관련 문서, 1920년, 총재 김가진의 이름으로 대동단 포고문과 군자금 모집 격문이 발표되었음을 언급하는 일본 외무부 문서이다.


대동단선언서, 1919년, 김가진이 작성한 것으로 1919년 11월 '대동단 안국동 만세사건' 당시 거리에 뿌려졌다.

독립 선언한 것이 어제 같은데 오늘 아침 또다시 4주년을 맞네. 거친 곳에 숨어서 어찌 모두 살아남기를 바라랴. 옥에서 나와 깨부수지 못한 것이 부끄럽네. 원수를 잠시 잊었으나 끝내는 다시 그 생각이 살아나서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스스로 돌아오기를 강력히 촉구할 것이다. 원컨대 우리 민족이 더욱 단결하여 하루빨리 전쟁에서 벗어난 산하를 보게 되기를.
- 김가진, 「4회 독립선언일」-


1920~30년대 프랑스조계지 내 상하이 한인 지도

"임시정부의 살림이 형편없어 돈을 구허러 국내로 왔다. 중국과 서울을 오갈 수 있게 편의를 돌봐준 이세창씨가 실의에 빠진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라의 도움을 받기는 커녕 억눌려 지내오기만했던 분이 조국을 되찾겠다고 나선 모습에 가슴이 저릿했다."

정정화, 압록강을 건서 국내로 잠입하다.
정정화는 상하이 생활의 곤궁함을 타파하기 위해 국내 잠입을 감행했습니다. 임시정부의 비밀조직망인 연통제를 통하여 자금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1920년 3월 첫번째로 잠임했고 두번째까지는 성공리에 상하이로 돌아왔으나, 1922년 6뤌 3번째 잠입 중 체포되었다가 풀려났습니다. 이후로 몇차례 더 국내로 들어와 자금모집에 애썼지만, 국내사정은 더욱 엄혹하게 돌아갔고 지인들의 반응도 차가워져 갔습니다. 조국의 의미가 무엇인지, 독립운동은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회의가 그녀를 짓눌렀습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1922년 7월4일 상하이 융칭방에서 김가진 임종
일한합병 당시 귀족이 작위를 받은 자로 조선 안에서 독립을 주장한 사람은 김윤식 이용직 양씨가 있었으나 해외에 나가 위험을 무릅쓰고 활동한 사람은 오직 혼자이며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의 수령으로는 가장 연고한 사람으로 조선 독립을 뜻하는 사람에게 공경을 받았으며 상해에 건너간 이후의 고생은 거의 극도에 이르러 팔십지년에 하루 한 끼를 먹지 못하여 추위가 극에 다다른 가운데 이 세상을 마쳤더라.
- 1922년 7월7일, 8일자 동아일보 기사 -


부의록, 1922년


프랑스 조계지 문건, 1922년, 김가진 장례 행렬 100여 명의 통행을 허가한다는 하비로 경비대의문서이다. 장례통지서, 1922년


김가진 부고, 1922년, 김가진 서거 시, 국내에서는 유림연합대회가 주관이 되어 유족 거주지인 경성부 적선통에 상소를 차리고 부고를 발송하였다. 김가진 장례 관련 메모, 1922년, 김가진 장례에 소요된 비용이 적혀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