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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년 김가진이 서거한 이후에도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가 임시정부에서 적극적인 활동으로 독립운동을 이어온다. 며느리 정정화는 임시정부의 안살림꾼으로, 여성단체 주요 멤버로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며, 아들 김의한은 아들 김의한은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적을 두고 광복국 기관지 '광복'편찬을 책임지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이들 가족은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일본의 압박을 받아 상하이를 떠나 자싱으로 떠난 이후 중.일전쟁으로 소주, 항주, 광주를 거쳐 중칭으로 이동하는 힘든 피난생활을 임정인사들과 같이 했다. 다른 중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해방 이후 귀국하였으나, 큰 환대를 받지 못한 쓸쓸한 귀국이었다. 또한 한국전쟁때 아들 김의한은 북한으로 납북되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3.1운동 이후 망명한 김가진 일가의 삶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던 임시정부 인사를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김구에게 차려준 밥상
"백범 선생님은 여기저기 다니다가 배가 출출해지면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우리 집으로 오셨다. 반찬거리를 사다가 밥을 지어드리면 어떻게나 달게 드시는지.... 빨리 형편이 펴서 좀더 나은 걸 해 드렸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임시정부의 안살림꾼, 정정화
동농일가가 상하이에서 거주한 융칭방과 아리런리는 대표적인 한인 거주지역입니다. 상하이의 서민주거양식인 '이농주택' 수십호가 빽빽하게 들어서 하나의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이 시기 임정의 살림은 늘 어려워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식사를 하곤 했는데, 정정화 가족의 집도 그 중 하나입니다. 반찬이라고 해봐야 푸성귀 무침 한두가지였던, 헝겊신마저 감지덕지하는 궁핍한 상하이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상해에서 살던 집(모형)


백범일지(1947), 김구의 유품, 김구의 명함과 수첩이다.


김구의 구두와 인장

"거리는 평소와 달리 술렁였고 회외가 돌았다. 한 청년이 일본 장교들에게 폭탄을 던졌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백범 선생님이 왜 신문을 사오라고 했는지 짐작하고 얼른 집으로 돌아왔다. 호외를 받아든 백범 선생님은 일이 제대로 됐다며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축배를 들었다."

윤봉길 의거의 날, 슬픈 축배
1931년 만주사변으로 대륙 침략에 본격적으로 나선 일본은 1932년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 중국군을 상하이에서 물러나게 했습니다. 1932년 4월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는 일왕의생일축하기념식 겸 일본군 승전 파티가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비밀독립운동조직인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은 기념식이 한창 진행되는 가운데 폭탄을 투척, 일본 장교들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이날 오후 임시정부 요인들은 윤봉길 의거의 성공을 기념하는 슬픈 축배를 가졌고, 정정화 역시 이 자리를 함께 지켰습니다. 이후 일본의 압력은 더욱 거세져, 프랑스 조계지 내 임시정부 사람들은 즉시 상하이를 빠져 나가야 했습니다. 대륙을 떠도는 피난생활의 서막이 시작된 것입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당시 신문


윤봉길의 유품, 의거당시에 소지하고 있었던 지갑, 중국화폐, 인장함 등이다.


도시락폭탄과 물통폭탄


김구 회중시계와 윤봉길 회중시계


윤봉길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문, 윤봉길 이력서 및 유서, 윤봉길 인장, 윤봉길 일기

자싱의 피난처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 사람들은 자싱으로 피난해 2년여 간 머물렀다. 쑨원의 동지였던 혁명가 저보성과 그의 아들이 피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이곳에서 정성화 일가와 엄항섭 일가가 이동녕을 모시고 지냈으며, 이외 다른 임시정부 요인들도 때떄로 이곳에 와 잠시 머물다 갔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자싱에서 임정인사들이 살던 집


성엄산방, 김구가 김의한에게 써준 휘호이다.


성엄서실, 김구가 김의한에게 써준 휘호이다.


김의한 전원공서 위임령, 1936년, 정정화 가족은 1934년부터 1938년까지 강서성에 머물렀다. 이 시기 김의한은 중국 정부기구인 전원공서에서 일했다.


한민, 한국국민당 기관지 '한민' 15호이다. 군사위원회 설립에 관한 임정 국무회의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국민당은 김구의 주도로 1939년 11월 항주에서 결성되었으며, 정성화 부부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대륙을 떠도는 피난생활
"중국에는 쑤저우에서 낳고 항저우에서 살며 광저우에서 먹고 류저우에서 죽는게 소원이라는 말이 있다. 쑤저우는 미인으로, 항저우는 풍경으로, 광저우는 요리로, 류저우는 관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상하이에서 탈출 후 나는 이 4주를 다 둘러본 셈인데, 가는 곳마다 피난 짐보따리를 끼고 있었으니 어디서 먹고 어디서 살고 하는 따위를 따질 겨를도 없었을 뿐더러, 나라를 잃고 쫓겨 다니는 몸이었으니 오히려 그렇게 이름난 고장에 들를 적마다 더욱 가슴 아팠던게 솔직한 심정이다." - 수당 정정화 -


임시정부 이동경로


'전선의 밤' 공연 기록화, 1939년,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전선 청년공작대에서는 1939년 3월 초 중국의 문화단제와 협력해 상이군인을 위한 공연을 하고 모금 활동을 벌였다. 당시 열두살 또래였던 김자동(정정화 아들), 엄기선(헝항성 딸), 오희옥(오광선 딸) 등 임정 요인의 자녀도 무대에 올랐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중국 대륙에 떨어지는 큰 별들....
중국 땅에서 민족의 큰 별들이 하나씩 둘씩 자취를 감출 때마다 조국의 독립이 그만큼 멀어지는 듯 싶었던 것은 나만의 심정이 아니었으리라.

1939년 4월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별세
위인 백범의 어머니는 더욱 위인다웠다. 평상시에 한마디씩 건네주는 말 속에, 때로는 눈물이 찔끔거리도록 매섭게 꾸짖는 말 속에, 소박하되 의기서린 인품이 고스란히 배어 나오곤 했다.

1940년 3월 이동녕 별세
노 애국투사의 마지막 가늘 길은 쓸쓸하기 한량없었다. 선생이 칠십평생을 두고 걸어온 험난하기만 했던 가시밭길에 비해 일제의 식민지 국민이라는 굴욕적인 처지로 한생을 마친 선생이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는 모습은 너무도 보잘것 없었던 것이다. 결국 사람은 죽음 앞에 너 나할 것 없이 평등해지는 것인가?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김구 가족사진, 1930년대


토교 우리촌, 2013년, 연정기작


화탄계에서 장강으로, 2013년, 연정기작

"투차오에서는 후동이처럼 중국에서 나고 중국에서 자란 어린아이들이 몇몇 있었다. 모국의 산과 들, 모국의 냄새, 모국의 마음을 얘기로만 듣고 자라난 아이들이었다. 나는 틈만 나면 독립된 그들의 조국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얘기해 주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내 나라의 이야기였는지도 모른다."

우리촌 투차오
충칭시에서 약 30km 떨어진 투차오의 둥칸마을. 임시정부는 이곳에 집 세채를 짓고 교민들을 이주시켰습니다. 정정화 가족을 비롯해, 엄항섭.연미당 가족, 송병조 가족, 이상만 목사 가조, 황학수 등이 이곳에 거주하였습니다. 살림살이가 쪼들리기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였지만, 마을 언저리 밭에 야채와 꽃도 심어 가꾸고 화탄계의 맑은 냇물에서 미역도 감으며 단란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피난길을 함께한 망명 트렁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한 김봉준의 유품이다.

전쟁의 끝자락, 중칭에서
1932년 상하이 탈출 후 긴 피난생활의 끄트머리 1940년, 정정화 가족은 충칭 지역에 정착해 임시정부와 함께 정치활동을 벌였고, 이곳에서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1940년대 충칭 역시 중일전쟁의 폭풍권 안에 있었기 때문에 도시곳곳에 방공호가 있었으며, 장시간 폭격이 이어질 때에는 몇 백명이 그 안에서 질식하기도 했습니다. 양자강을 가운데 끼고 있어 늘 안개로 뒤덮여 있던 충칭. 계속되는 폭격에 도시의 모습은 점점 황폐해져 갔지만,, 이 시기 한인사회는 어느때보다 잘 단결되어 있었습니다. 사십대에 이른 정정화.김의한 부부는 임시정부 관련 정치조직의 중견 역할을 맡으며 단단히 광복을 준비했습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정정화.김의한 부부의 정치활동
정정화와 김의한은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적을 두고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였습니다. 정정화는 한국혁명여성동맹, 한국애국부인회 등 여성단체의 일을 맡아 보았고, 간간이 김의한의 일을 도와주며 이 시기를 보냈습니다. 김의한은 한국광복군 정훈처 선전과에서 한국광복군 기관지인 '광복' 편찬을 책임졌고, 태평양전쟁과 한국광복군의 활동에 대해 국내로 방송을 하기도 했습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한인사회 보안조례, 한인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보전하기 위하여 중국 국민당 정부가 만든 조례이다.


한국애국부인회 재건 선언, 1943년, 한국애국부인회는 임정의 대표적인 여성단체로 충칭 정착 이후 다시 조직을 정비하였다. 김의한 광복군 임명장. 신분증 사진, 충칭시 경찰국의 철인이 찍혀 있다. 동암 차리석 화갑 기념, 1941년, 차리석은 임정 국무위원을 역임했으며, 1945년 9월9일 환국 직전 사망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충칭판 독립신문 창간호, 1943년, 한국독립당 제3차 전당대표대회 개막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참석자는 홍진, 김의한, 양소벽, 정정화 등 17명이며 민족의 단결에 관한 방법을 논의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삼일절기념 특간 책자, 1942년, 삼일절 23주년을 기념해 임시정부 선전위원회에서 펴낸 책자로 이시영이 지었다. 삼일운동과 지난 독립운동의 역사를 살펴보고 현 정세를 파악하는 글이다. 한국독립당 당헌, 1942년, '광복', 1941년, 한국광복군 정훈처에서 발간한 잡지


한국독립당 창립선언, 1940년 5월9일 김구의 한국국민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 조소앙의 한국독립당이 통합되어 창립된 '한국독립당'의 창립선언이다.


한국독립당 광복군 특별당부 성립 선언, 1940년, 한국독립당이 광복군에 합류하게 된 취지를 알리는 내용이다.

우리 토교대, 광복군
1945년 초, 장준하 김준엽 등 학병을 탈출한 청년 광복군 50여 명이 부양으로부터 5천 킬로미터 가까운 거리를 걸어 충칭 임시정부 청사에 도착했습니다. 충칭에는 이들을 이시에 수용할 숙소가 없었으므로 추차오의 교회 강당을 임시 막사로 사용했습니다. 정정화를 비롯 투차오의 한인들은 이들을 '토교대'라 부르며 살뜰하게 챙겼고, 이들 역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며 한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한발자국 한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그 얼마나 갈망했는가. 지금의 이 순간을. 걸어온 중국의벌판과 산길과 눈길 속에 뿌린 우리들의 땀과 한숨과 갈망이 들꽃으로 가득히 대륙에 피어나고, 그 들꽃에서 일제히 합창의 환영곡이 들려오는 듯한 환상의 곡 속에서 김구 선생을 맞았다. - 장준하, '돌베게' 중 -


한국광복군 서약문과 공약, 1940년


정훈대강, 1945년, 한국광복군 청훈처에서 제정한 정훈대강으로, 광복을 위한 본군의 정훈계획, 군사훈련 및 학고훈련 등이 담겨 있다. 한국광복군 대원증, 1945년, 광복군 소속 제2지대 제3구대 이시흥의 대원증. 김구와 본인의 사진을 붙이게 되어 있다.


중국정부가 광복군에게 지원한 포제버선, 1940년대. 광복군 무기고 자물쇠, 한국광복군 금속 배지


한국광복군 전투복

"조국의 독립이라는 명제 아래 몸을 불사른 혁혁한 이름의 투사들에서부터 성명 삼자도 알려지지 않은 채 어느 이름모를 골짜기에서 숨을 거둔 무명열사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장하고 엄숙한 숨은 뜻이 없었더라면 과연 오늘의 이 순간이 있었을까? 이날이 설사 왔더라도 살아 있는 우리가 두 손으로 곱게 맞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해방, 중칭을 떠나며
1945년 8월 15일, 2차대전에서의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떨리는 목소리가 방송을 타고 흘렀습니다. "왜놈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충칭 시내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날 충칭은 광란에 가까운 축제의 분위기였고, 경축의 딱총소리가 몇날 며칠이고 이곳을 가득 채웠습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조국으로 가는 길
해방 후 정정화 가족은 곧 국내로 돌아갈 것이라 기대했으나 국내의 사정은 심상치 않게 돌아 갔습니다. 한반도는 미.소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친일파들이 미군정에서 그대로 판을 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 왔습니다. 드디어 1946년 1월, 수당 일가는 조국을 향해 투차오를 떠나 또다시 먼 길을 나섰습니다. 버스, 선박, 기차를 갈아타고 상해로 가서 미군의 LST를 통해 부산으로 들어오는 여정이었습니다. 그토록 고대하던 귀환이었지만, 부산항에서 그들을 맞은 건 차가운 난민수용소와 미군병사들이 뿌려대는 DDT였습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동농의 묘비앞에서
"1946년 3월 유난히 화창한 봄날, 조국으로 돌아가기 전 아버님의 묘소를 찾았다.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이역만리 타관에서 겪은 내 고초가 아버님 앞에서 한순간에 스러지는 것 같았다."

26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나는 임시정부와 같이 살았다. '거지나 다름없는' 상해 시절을 보내다 등 뒤로 왜놈의 종소리를 들으며 피난 짐보퉁이를 쌌다. 이동녕 선생과 최준례 여사의 마지막 길을 지켜볼 때는 암담한 조국의 숨결이 꺼져가는 듯했다. 청년 광복군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는 모습을 바라볼 떄는 당장 내일이라도 독립된 조국을 품에 안을 듯 했다. - 정정화 '장강일기' 중에서 -

독립운동의 역사를 쓰기 위한 작업
해방 후 국내로 돌아온 김의한은 1947년 3월 '독립운동사 자료수집위원회;를 만들어 그간의 독립운동과 관계된 여러 자료들을 수집했습니다. 이는 그가 귀국하기 전부터구상하고 있던 것으로, 여러 단체와 개인들로부터 독립운동 관련 서신과 책을 받아 모았습니다.


총무부 문서, 위원 명단 및 취지서, 문서철


수집위원회 홍보 포스터, 1947년


취지서, 1947년


수집된 독립운동 관련 자료들, 김의한 수첩

서울 도착 그 이후 ....
1946년 5월, 기차는 부산을 떠난 지 이틀만인 5월17일 저녁 여덟시가 다 돼서야 서울에 들어왔다. 성엄은 28년 만에, 나는 15년 만에 서울을 대하는 셈이었다.
1948년 9월, 백범의 가족과 석오, 동암 두 분의 유해가 도착해 인천항으로 나갔다. 대한민국 정부의 고관은 누구 하나 발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1950년 7월, 7월에 연합군 지상부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동족끼리의 살상도 안타까웠지만, 이제는 연합군까지 끼어들었다는 것이 마음을 쓰라리게 했다. 중국의 국공내전이며 항일투쟁을 보아온 나에게 6.25는 너무나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1950년 9월,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성엄이었다. 성엄은 그렇게 납북되었다. 나는 그떄 조국에 하소연했다. 잘못이 내게 있다면 나를 처벌하라고, 내가 더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나를 부르라고,
1951년 1월, 지금은 성엄도 없고 자동이도 멀리 떨어져 있다. 여러 선생님들의 소식도 모른다. 그러나 불안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피난은 내게 어쩌면 평범한 생활이었다. 나는 6.25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1951년 9월, 간첩혐의를 받고 있는 한 여인을 만났다는 죄로 종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왜놈 경찰의 손에 붙잡혀 왔던 바로 그 종로경찰서였다. 나는 '요시찰인'이 되었다....


김구가 김의한에게 써 준 휘호, "바다에 다짐하니 물고기와 용이 움직이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일더라.". 김구가 정정화에게 써 준 휘호, "봄바람같이 큰 뜻은 능히 만물을 품고, 가을물과 같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네"

옥중소감
아직껏 고생 남아 옥에 갇힌 몸 되니
늙은 몸 쇠약하여 목숨 겨우 붙었구나
혁명 위해 살아온 반평생 길인데
오늘날 이 굴욕이 과연 그 보답인다.
국토는 두쪽 나고 사상은 갈렸으니
옥과 돌이 서로 섞여 제가 옳다 나서는구나
철창과 마룻바닥 햇빛 한 점 없는데
음산한 공기 스며들어 악취를 뿜는구나
- 정정화, 1951년 출옥 직후 -

흩어진 묘소
상하이 만국공묘에 있던 김가진의 묘는 문화대혁명 시기 파괴되었습니다. 6.25전쟁 당시 납북된 김의한은 평양 재북인사 묘역에 안치되었습니다. 1991년 세상을 떠난 정정화의 묘는 대전 국립현충원에 있습니다. 서울의 백운장에서, 상하이의 융칭방에서 고락을 함께 했던 동농 일가는 현재 이렇게 멀리 흩어져 있습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