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지역박물관

[한성백제박물관] 한성백제의 도성, 풍납토성을 깨우다.

younghwan 2014. 3. 3. 16:34
반응형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첫번째 수도는 하남위례성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실제 위치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까지의 발굴조사 결과로는 한강변에 위치한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도성이고, 서남쪽에 위치한 몽촌토성은 도성의 기능을 보좌하고 군사적.방어적 성격의 성곽으로 후대인 근초고왕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사기 건국신화에서 알려진 것처럼 백제는 고구려 세력 일부과 권력투쟁과정에서 남하하여 한강유역토착세력과 연합하여 건국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백제와 고구려는 만주에 근거한 세력에서 같이 출발하였지만 성곽의 입지와 축성방법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고구려는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서 산성에 의존하면서 돌로 쌓은 석축성이 주를 이루는데 반해, 백제는 강과 하천을 끼고 있는 지역에 흙으로 쌓은 토성이 대부분이다. 이런 토성의 입지와 축성방법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국시대 중국 산동성지방 제나라, 노나라와 중원지역의 도시의 입지조건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며, 평양지역의 낙랑이 쌓은 성곽에서 비슷한 축성법을 볼 수 있다고 하며, 고구려도 초기 국내성에서 비슷한 형태의 성곽을 쌓았다고 한다. 고구려는 북방유목민과의 투쟁과정에서 기마병을 효율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산성을 축성하는 것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신라 또한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반면에 중국, 일본과의 무역에 크게 의존했던 것으로 보이는 백제는 마지막 수도인 사비성의 부소산성과 나성에서 볼 수 있듯이 강을 끼는 입지조건과 흙으로 쌓는 토성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 송파구 한강변에 위치한 풍납토성은 둘레 3.5km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도성으로 고대국가로 발전한 백제의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벽은 높이가 11m이상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성안이 바깥보다 약4m정도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강을 끼고 있으며, 성곽 바깥에는 물이 흐르는 해자를 설치하여 방어에 용이하게 했다. 발굴조사 결과 풍납토성은 3차례 정도 큰 증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성안에는 궁궐을 비롯하여 다양한 주거 유적들이 발견되었으며, 중국.일본 등과 교류한 흔적을 보여주는 유물을 비롯하여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풍납토성은 20세기 초까지 백제의 왕성이었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1925년 대홍수 때 청동초두를 비롯한 유물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그 이후 백제의 왕성이라고 볼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70년대 개발의 광풍을 비껴나가지 못하고 지금처럼 아파트와 주택이 들어서 4만명이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는 주거지로 바뀌었다. 풍납토성의 존재는 1997년 성벽 부근에서 백제 유물이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많은 백제 유물들이 출토되었고, 백제의 왕성인 하남 위례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올림픽공원내에 최근 세워진 한성백제박물관은 백제의 왕성이었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전시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잊혀졌던 한성백제기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풍납토성을 깨우다. (Rediscovery of Pungnaptoseon Fortess)
백제 건국 이후 수백년 동안 백제왕은 지금의 풍납토성에서 살았다. 20세기말까지 그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1997년 이래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진 발굴조사를 통해 풍납토성이 『삼국사기』의 위례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이 백제 초기 왕성인 위례성은 경기도 광주에 있었다고 주장한 뒤, 1925년 대홍수 때 풍납토성 안에서 청동으로 만든 초두(다리가 있고 자루가 달린 솥)와 귀걸이, 토기, 구슬 등이 발견되면서 풍납토성은 백제 왕도로 알려지고 사적으로도 지정되었다. 1964년 서울대학교 토성안 일부 지점을 시굴 조사했을 때 백제 성터임을 증명해 줄 흔적이 발견되지 않자 풍납토성에 대한 관심이 낮아졌다. 그러던 중 1997년 1월초 성벽을 측량조사하던 선문대학교 이형구 교수팀이 성벽 안쪽 아파트 공사형장에서 백제 그릇조각들을 발견하고 이를 문화재청에 신고하였다. 이후 지속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풍납토성은 백제의 궁궐이 있던 왕성임을 확인했으며, 홍수 등으로 인해 성안헤 흙이 4~5m 두께로 쌓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풍납토성에서는 궁궐 일부와 관청, 민가, 도로, 우물, 연못, 궁궐창고, 환호(둘러 판 도랑) 등 다양한 유구가 발견되었으며 수만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1999년과 2011년 두 차례에 걸친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동쪽 성벽 발굴조사 결과 성벽은 너비 43m, 높이 11m를 넘는 규모이며 판축법과 부엽법 등의 토목기술을 활용했음을 확인하였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2013년 풍납토성, 한성백제의 왕성이었던 풍납토성은 발굴.조사와 복원을 통해 한강을 접하고 있는 북서쪽을 제외하고는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지만, 궁궐과 주거지가 있었던 성곽내부에는 주택과 아파트가 들어서 인구 4만명이 거주하는 주거지역으로 바뀌었다.

풍납토성 성벽 단면(Cross Section of Punghaptoseong Fortress Wall)
앞의 전시물은 백제 초기 왕성인 풍납토성(사적11호)의 단면을 떼어(전사) 설치한 토층이다(2011년 발굴).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을 기준으로 아랫변 43m, 윗변 13m, 높이 11m로 추정 복원하였다. 왼쪽이 안쪽 성벽이고 오른쪽이 바깥쪽 성벽이며, 성 바깥쪽으로는 해자가 있었을 것이다. 1차 성벽으로 표시한 부분은 가장 먼저 쌓은 것이며 차례로 2차 성벽, 3차 성벽을 덧쌓았다. 교란층은 성벽은 무너지면서 위에서 흘러내린 흙이 쌓인 층을 말한다. 복원층은 원래의 성벽높이를 추정하여 표시한 층이다. 맨 아래쪽의 색깔이 다른 부분은 생토층이다. 1차성벽을 쌓을 때 성벽보호를 위해 표면을 덮은 강돌이 안팎에 남아 있고, 3차성벽을 쌓을 때 만든 기단석과 축대가 성 안쪽 바닥에 남아 있다. 1차, 2차 성벽을 쌓을 때 만든 배수로가 있고, 3차 성벽 배수로는 성벽 안쪽으로 더 들어간 곳에 있었을 것이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한성백제박물관 로비에 전시해 놓은 풍납토성 단면. 이곳 전시물은 백제 초기 왕성인 풍납토성 단면을 떼어 설치한 토층으로 풍납토성의 형태를 쉽게 알 수 있다.


풍납토성 단면. 여러 시대에 걸쳐서 쌓은 성벽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풍납토성은 어떻게 쌓았나?(Construction Method of Pungnaptoseong Fortress)
풍납토성은 한강변에 흙으로 쌓은 큰 성이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서북-동남쪽이 긴 배 모양이기 때문에 금방이라도 한강을 따라 바다로 흘러내려 갈 것 같은 모습이다. 발굴조사 결과 성 밖이 성 안에 비해 4m 이상 낮았다. 성 바깥에는 물이 흐르는 큰 해자를 만들어 전쟁 때 적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성 안쪽에는 좁고 얕은 도랑을 만들어 비가 올 때 물이 흐르도록 하였다. 1999년과 2011년, 두 차례의 성벽발굴조사 결과 성벽은 세 차례에 걸쳐 증축한 것으로 밝혀졌다. 증축은 성벽 안쪽만 하고 바깥쪽은 하지 않았으며, 성벽 쌓는 기술은 지점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즉, 흙을 시루떡처럼 다져쌓는 판축법은 모든지점에서 확인되었으나, 흙을 쌓는 도중 나뭇가지.나뭇잎 등을 깔아두는 부엽법은 몇몇 지점에서만 확인되었다. 성벽의 안팎에는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작은 강돌을 덮었다. 강돌은 처음 성벽을 쌓을 때와 마지막 성벽을 쌓을 때 덮었다. 처음 성벽을 쌓을 때 성벽의 중간 높이까지 강돌을 덮었는데 바깥쪽 성벽의 가장 위쪽 강돌 사이에는 큰 판석이 일정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판석 위쪽은 성벽을 가파르게 쌓아 사람이 쉽게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여싸. 안쪽 성벽의 마지막 성벽 바닥에는 큰 돌을 다듬어 2~3단의 축대를 정연하게 쌓았다. 한국과 중국의 고대 도성은 대체로 강을 끼고 있는 평지에 흙으로 성을 쌓았다. 중국의 경우 전국시대(기원전474~221) 제나라.노나라.조나라 등의 왕성.도성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한국의 경우 평양의 낙랑토성, 고구려 국내성(초기), 백제 풍납토성, 신라 월성 등이 대표적이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풍납토성을 쌓는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나뭇잎 깔기:부엽법
나뭇잎 깔기는 성벽이나 제방을 쌓을 때 나뭇잎.나뭇가지.나무껍질 등을 깔고 흙을 쌓는 방식이다. 땅의 기초가 단단하지 못한 곳에서 사용하는 기술이며, 지즌 등에 잘 견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풍납토성 일부 구간에서는 개흙을 10cm 정도 두께로 쌓은 뒤에 나뭇잎이나 나뭇가지 등을 1cm 정도 깔고 다시 개흙을 덮는 과정을 10여 차례 반복한 것이 확인되었다. 중국에서는 안휘성의 안풍당이라는 한나라 때 저수지 제방에서 발견되었으며, 백제에서는 김제 벽골제, 부여 나성 등의 사례가 알려져 있다. 이러한 기술은 백제를 통해 왜로 전해져 큐슈의 미즈키.키쿠치죠 성벽, 오사카의 카메이.사야마이케 제방 등에 적용되었다.<출처:한성백제박물관>

다져쌓기: 판축법
판축법은 흙을 시루떡처럼 층층이 다져 쌓는 방식을 말한다. 성을 쌓기 전 땅을 고르기 위해 개흙을 대략 50cm 두께로 깔고, 그 위에 다시 모래 성분이 많은 진흙을 20cm 정도 깔았다. 이후 여러 종류의 진흙을 번갈아 두껍게 쌓아가며 사다리꼴의 성벽을 만들었다. 판축법은 중국 하남성, 정주 백가장에서 발견된 상(기원전 2,070~1,600)나라 때의 토성에서 이미 나타난다. 백제는 이 판축법을 왜로 전하였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흙을 다져서 쌓는 판축법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토성은 생각보다 정밀하게 시공을 하고 있다.

풍납토성 어떻게 지켰나?(Fortication of Pungnaptoseong Fortress)
토성의 주요 방어시설로는 성벽 외에도 해자.목책.망루.치 등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풍납토성은 성벽 안쪽을 완만하게 쌓고 바깥쪽을 가파르게 쌓아 성벽을 쉽게 오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성벽 바깥쪽에 물이 흐르도록 파놓은 해자는 매우 넓고 깊어 다리나 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성벽에 접근할 수 없다. 목책은 성벽 바깥쪽 아래에 끝을 날카롭게 깎은 나무기둥을 울타리처럼 땅에 박아 설치한 것을 말한다. 목책을 설치함으로써 적이 쉽게 성벽에 접근할 수 없었다. 몽촌토성벽 바깥쪽에서 목책이 확인되었으므로 풍납토성에도 목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풍납토성의 동남쪽 모서리와 서남쪽 모서리는 성벽이 부독 바깥쪽으로 튀어나와 있어 치의 흔적일 가능성이 높다. 치는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옆에서 공격하기 위해 성벽 일부를 바깥쪽으로 돌출시킨 것이다. 풍납토성에는 망루도 있었을 것으로 추저어한다. 몽촌토성.부소산성 등의 사례를 참조하면, 성벽과 내부의 높은 곳에 망루를 만들어 성 안팎의 상황이나 적의 침입 등을 감시하였을 것이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풍납토성은 둘레 3.5km로 한성백제의 왕성이었던 곳이다. 지금도 4만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넓은 지역으로 북동쪽으로는 한강이 흘러서 천연해자역할을 하며 나머지 방향으로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전체적으로 한강이 흘러내려가는 방향으로 배모양을 하고 있으며, 배가 정박하는 한강변과 남서쪽 방향에 큰 성문은 두고 있으며, 동남쪽과 서북쪽에 작은 암문을 두고 있다.

아! 풍납토성, 2천년의 타임캡슐(Pungnaptoseong Fortress)
풍납토성은 서울시 송파구에 위치한다. 평지에 흙으로 쌓은 고대의 성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백제의 첫 왕성(위례성)이자 도성(한성)이다. 풍납토성의 북쪽과 서쪽에는 한강이 흐르고 동쪽에는 얕은 구릉 너머로 남한산 줄기가 우뚝 솟아 있다. 남쪽으로는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삼국사기』에 기록된 위례성의 위치에 대한 설명과 일치한다. 1997년 이래 해마다 성 안팎을 조사하고 있다. 성벽은 너비 43m, 높이 11m 이상으로 추정되며, 한강과 맞닿은 서쪽 성벽이 오래 전에 무너져서 지금은 전체 둘레 3.5km 가운데 약2.3km만 남아 있다. 성 안의 면적은 약 878,678㎡이며, 궁궐.도로.우물.창고 등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성벽 바깥에는 큰 해자가 성벽을 둘러싸고 있었다.


경질무문토기_바리(Hard plain coarse pottery_bowl), 1999년 풍납토성 성벽 발굴조사 때 성벽에서 깨진 채 출토된 토기이다. 토기모양과 바탕흙이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와 비슷해서 흔히 경질민무늬토기라고 부른다. 경질민무늬토기는 주로 마한.백제지역에서 출토되며 삼한시대(마한)부터 백제 초기까지 사용한 그릇이다. 주로 부뚜막에 올려놓고 불을 지펴 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였다. 그 흔적으로 토기 바깥면에 그을음이 남아 있거나 그릇 안에 음식을 끓일 때 생긴 자국이 남아 있기도 하다. 입은 넓고 밖으로 벌어졌으며 바닥으로 내려갈수록 좁아 진다. 몸통에는 토기를 만들 때 모양을 다듬고 표면을 단단하게 하기 위해 도구로 두드린 고운 새끼줄무늬가 있다. 몸통 안쪽에는 토기를 만든 사람의 지문이 남아 있으며 몸통 위쪽에는 점선을 둘러 문양 효과르 나타냈다. 사용한 흙은 진흙에 모래.석영.장석 등을 섞어 구울 때 갈라지지 않도록 하였고, 그릇 바깥 면은 흙을 얇게 바르고 문질러 매끈하게 다듬었지만, 불을 받아 표면이 떨어져나가고 거칠다. 이 방법은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를 만드는 방법과 다른 점이다. 즉, 민무늬토기는 대개 나무로 문질렀기 때문에 바깥 면에 나무결흔이 남아 있으며, 몸통과 바닥을 따로 만든 뒤 손으로 누르면서 붙이기 때문에 안팎에서 붙인 자국이 남는다. 그러나 경질민무늬토기는 몸통과 바닥을 붙일 때 바깥 면을 깨끗하게 다듬어 마무리하였다. 또한 민무늬토기는 구운 온도가 낮아 약하지만, 경질민무늬토기는 구운 온도가 높아 단단하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경질무문토기_바리(Hard plain coarse pottery_bowl), 백제 3~4세기, 서울 풍납토성


사발(Bowl)


풍납토성 성벽 출토 토기(Potteries from Pungnaptoseon fortress). 1999년과 2011년 풍납토성 동쪽 성벽 발굴조사 때 흙속에서 많은 종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대부분 토기들로 경질무문바리.굽다리접시.단지.사발.큰항아리.시루.계란모양토기.뚜껑.기와.벼루.방추차.그물추 등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모양을 갖춘 유물은 경질무문바리, 항아리 정도이며 백제 한성기 유물이다. 이 밖에 목에 음각문이 새겨진 고구려토기, 동체에 많은 침선이 돌아가는 낙랑토기 등도 있다. 이 유물들은 일부러 묻었다기보다 성벽을 쌓기 위한 흙을 확보하는 과정이나 성벽을 쌓는 도중 쓸려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발굴조사보고서

2014년 푸른 말의 해 甲午, 청마
2014년을 간지로 나타내면 갑오년이다. 甲은 10간의 첫째로 동북방을 가리키며 양기가 처음 일어난 곳이다. 오행에서는 나무, 색깔은 푸른색을 가리킨다. 십이지 속의 말은 시간으로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 달로는 음력5월이며 방향은 정남이다. 말을 빠르고 활달하다는 특성 때문에 불 또는 양을 뜻하며 진취적인 태도를 상징하고 액운이나 병마를 쫓는 방편으로 여기기도 했다. 말화석은 아메리카.유럽 등지에서 많이 발견되었는데, 약5,800만년 전의 북아메리카의 삼림에서 살았던 에오히푸스Eohippus라는 여우만한 크기의 동물이 말무리의 가장 오래된 조상으로 알려진다. 몇차례의 진화를 거쳐 약300만년전에는 지금의 말과 같은 속인 에쿠스(Equus)가 북반구 전역에서 살았다. 말은 개.소.양보다 늦게 가축이 되어 서기전 3000년경에 중앙아시아에서 처음 길들였으며, 이후 기후.음식.문화의 영향으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말은 주로 봄에 임신을 하고 이듬해 봄에 출산한다. 아기말은 젖을 뗀 뒤 5~6개월이 발육전성기이고 귀리.밀기울.청초.건초.짚여물 등을 먹는다. 수명은 보통 25~30년이다. 쇄골이 없고 잘 발달한 다리 근육의 탄력성이 좋아서 달리기와 고개오르기를 잘 한다. 목덜미 힘줄이 좋아서 서서 자는 습성이 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청동기시대부터 말을 농경.군사.통신.운반 등에 쓰기 시작했다. 말의 쓰임새는 점차커져 제사에 사용하거나 말의 털 색깔로 점을 치고 결의를 다짐할 때 말 피를 서로 나눠 마시기도 했다. 지역에 따라 말고기를 먹는 곳이 많으며, 가죽.갈기.힘줄 등은 갓.활.아교.신발.장식품의 재료로 쓰이고, 말똥도 땔감으로 사용되는 등 인간의 삶과 매우 밀접하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지배자를 상징하는 말
중국 역사서 『삼국지』는 변한.진한 사람들은 "소나 말을 탄다"고 하고, 마한 사람들은 "소와 말을 탈 줄 몰라서 모두 장례용으로 써버린다."고 기록하였다. 그래서 흔히 마한에서는 기마문화가 없다고 생각해 왔는데, 최근 충주 금릉동의 움무덤, 아산 명암리 밖 지므레 유적 등지에서 말재갈이 출토되어 마한사람들도 말을 직접 타거나 수레를 끌게 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다만, 말갖춤새 출토사례가 많지 않아 원삼국 시대에는 복격적인 기마문화가 발전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마한 영역에서는 유력자의 위세품인 말모양 띠고리가 다수 출토된다. 말모양 띠고리는 허리띠의 양쪽을 연결해 주는 요즘의 버클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주로 무덤에서 출토되는데, 무덤에 따라 출토 양상이 다른 것을 보면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구분이 있었던 듯 하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말모양 띠고리(Horse-shaped Buckles), 말모양 띠고리는 말의 옆모습을 부조로 표현한 허리띠 장식으로 요즘의 버클과도 같다. 초기철기시대부터 원삼국시대 말까지 제작 사용되었으며, 예전에는 주로 아산.천안 등 충청 내륙에서 확인되었으나, 최근에는 경기 남부의 평택, 안성 등지에서도 확인되는 등 출토 사례가 늘고 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말, 신화와 역사 사이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신화에서 말은 빼놓을 수 없는 상징물이다. 고구려 주몽신화는 주몽이 부여왕실 마구간에서 말을 키우다가 어머니 유화부인의 도움으로 준마를 얻은 뒤 남쪽으로 도망해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또한 백마가 가져다 준 알에서 태어난 신라의 시조 혁거세 이야기를 보아도 말이 얼마나 한국인의 생활에 밀접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백제 건국설화에는 말과 관련된 이야기가 없으나, 『삼국사기』에는 시조 온조왕이 기병을 이끌고 외적과 싸운 내용이 자주 나온다. 또한 백제 한성기 왕도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는 제사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말 아래턱뼈가 발견되었다. 특히 풍납토성 한가운데에 위치한 경당역사공원의 정치.종교.의례에 관련한 시설(9호유구)에서 10만마리 분의 말뼈가 출토되었는데, 말의 위턱뼈와 아래턱뼈만 만은 것으로 보아 머리만 잘라내어 묻었을 가능성이 있다. 말을 희생하는 제의는 수신에 대한 제사, 장송에서의 제물, 토목공사나 전쟁에서의 제물 등의 사례가 세계 각지에서 널리 확인된다. 특히 일본에서는 질병에 대한 대책이나 기우와 관련된 제사, 물가에서 지내는 제사에서 희생물로 말을 이용하였다. 경당지구 206호 유구는 돌을 정성들여 쌓은 3m 깊이의 우물인데, 내부에서 동시에 묻힌 것으로 보이는 토기 200여점이 출토되었다. 항아리와 병이 대부분이며, 주둥이 부분을 일부러 깨어낸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온전한 형태이다. 궁궐시설의 일부로 판단되는 지상건물지(44호)와 음식재료 창고지(196호)가 바로 앞에 위치한 점이나 우물 깊이가 깊고 돌쌓는 방식이 단정한 점, 우물 안에 다양한 토기를 일부러 배치한 점을 볼 때 단순히 마실 물을 얻기 위한 우물이 아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부에서는 이 우물이 각지에서 물을 담아온 지방 세력과 왕이 함께 물을 부은 후 토기를 매납하는 성스러운 제사가 거행된 특수한 장소로 보는 견해도 있다. 우물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는 한성 지역에서 제작한 것도 있지만 백제 지방에서 제작된 것도 다수 발견되어 이를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간단하게 선으로 말을 그려 넣은 항아리도 확인된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말아래턱뼈(Horse madible), 풍납토성 경당지구 9호 유구, 국립중앙박물관, 풍납토성 경당지구 9호 유구에서 출토된 말 아래턱뼈이다. 9호 유구에서는 동물뼈와 굽다리접시.대부라 쓰여진 곧은입항아리 등이 확인되어 제사행위가 진행되는 과정, 혹은 제사가 끝난 뒤 제사에 사용되었던 희생물이나 그릇 등을 폐기하였던 시설롤 보인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말이새겨진 항아리(Jar), 풍납토성 경당지구 206호 유구, 한신대학교 박물관, 풍납토성 206호 유구에서 출토된 항아리이다. 주둥이 부분을 일부러 떼어내어 훼손한 현상이 관찰된다. 어깨 부위에 무언가를 선으로 그려 넣은 것이 확인되는데, 말의 형태를 간략화하여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나라의 성쇠를 가르는 말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사회에서 말은 중요한 이동수단이었다. 말을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앞만 보고 질주하기 때문에 군사업무를 병마사라고 표현할 정도로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백제에서는 병관좌평이 병마사를 관장하였고 사비시대에 마부를 따로 설치해 왕실과 국가의 말.수레에 관한 업무를 담당케 하였다. 한반도에서는 4~5세기에 재갈.방울.행엽.등자 등 말갖춤을 본격적으로 장착하기 시작하면서 기마술이 크게 발전하였다. 특히 등자와 안장 등 안정용 말갖춤새가 보급되면서 말타기가 익숙지 않은 비기마민족도 편하게 말을 탈 수 있게 되었다. 말갖춤새는 말위에 탄 사람이 자세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게 하므로 전투시 활시위의 정확도가 높아져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말띠드리개(Harness Pendants), 말의 가슴걸이나 후걸이에 매달아서 말을 장식하는 치레걸이이다. 말띠드리개는 그 자체가 장식을 위한 것으로 각종 문양이 베풀어지기도 하며, 하트모양, 타원형, 나룻잎 모양 등 다양한 형태들이 있다. 발걸이(Strirups)는 말을 부리기 위해 말에 장착하는 말갖춤 중 하나로, 사람이 말에 타고 앉아 두 발을 디디는 용도로 사용된다. 발걸이의 끝에 마련되어 있는 구멍에 가죽끈을 연결하여 안장에 달아 말의 양 옆구리로 늘어뜨린다. 나무로 제작한 후 겉면에 금속판을 덧댄 것과 순수하게 금속으로만 제작된 것으로 분류되며, 이 발걸이는 재질과 모양을 보았을 때 7세기대에 제작.사용된 듯하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서울 올림픽공원부지내에 개관한 한성백제박물관. 외관은 전체적으로 풍납토성을 형태를 하고 있으면서, 석촌동 고분을 쌓고 있는 돌모양을 하고 있다.


한성백제박물관 로비


로비바닥을 장식하고 있는 하남 위례성이 있던 한강유역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