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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박물관] 선사시대의 서울

younghwan 2014. 3. 9.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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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한반도 중부지역 대부분을 수역으로 하는 강으로 길이 494km로 한반도에서 4번째로 긴 강이다. 한강은 태백 검룡소와 오대산 우퉁수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이 양수리에서 만나 서울을 지나 임진강과 만나 서해로 흘러든다. 한강유역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는데 대표적인 곳이 남한강 중류에 해당하는 제천 점말동굴과 단양 수양개 유적이다. 이외에도 한강유역에는 다양한 선사시대 유적들이 골고루 분포되어 발견되고 있는데, 오랜 세월 한반도인들이 한강유역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왔음을 보여준다.

 서울의 선사시대는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된다. 서울 면목동에서는 비교적 늦은 시기인 3만전전 후기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는 완면찍개, 양면찍개 등의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북한 굴포리문화층과 함께 찍개문화의 전통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시대에는 유적지로는 기원전 4,000~3,000년 경에 사람들이 살았던 움집터가 남아 있는 암사동 유적지가 있다. 암사동유적지는 한반도에서 발견된 많은 유적지들 가운데에서도 한강유역 신석기문화를 대표하는 곳으로 다량의 움집들이 촌락을 이루면서 살았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서는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유물인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하여, 돌도끼, 돌화살촉 등의 생활도와 돌낫 등의 농기구가 발견되었다.

한강, 크고 넓은 강
한강은 크고 넓은 강이다. '한'은 우리말로 크다는 뜻이다. 한반도 중부를 가로질러 흐르는 한강은 전체 길이가 약 494km이고 남한강과 북한강으로 나뉜다. 지질은 화성암, 퇴적암, 변성암 등 다양하며 지형은 크게 범람원과 구릉 및 산악지대로 구분된다. 옛부터 중.하류의 구릉지대와 낮은 범람지대에서 농사를 많이 지었다. 한강유역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백제는 지금의 수도 서울에 수도를 정하고 한강유역을 본격적으로 개발하였다. 이후 한강유역은 고구려와 신라의 땅이 되었다가 고려 때에는 이곳에 3경의 하나인 남경을 두었다. 조선이 서울을 다시 수도로 정한 뒤에는 주로 강북지역이 개발되었으며, 1970년대에 와서는 강남지역이 개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한강의 또다른 이름
한강은 삼국시대 초기에는 대수(帶水)로도 불렀으며, 고구려에서는 아리수, 백제에서는 욱리하 또는 한수라 하였다. 신라는 한강의 상류를 이하, 하류를 왕봉하라고 불렀고, 한강을 한산하 또는 북독이라고도 하였다. 고려 때는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 내리는 긴 강이란 뜻으로 열수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경강이라고도 했는데, 실제로 'Seoul River(서울강)'라는 표현이 외국 문헌에 나오기도 한다. 이후 여러 옛 이름들은 차츰 사라지고 지금은 한강으로 부른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서울 한성백제박물관 첫번째 전시실 입구. 한강유역의 지리적 특징을 설명해 주고 있다.

한강의 발원지
한강의 물줄기가 시작되는 지점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각각 다르다. 남한강의 발원지는 태백산 고목샘, 태백의 검룡소, 오대산의 우통수, 대덕산 등이다. 북한강의 발원지는 북한의 금강산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은 양수리에서 만나 본류를 이루어 서울을 지나 서해로 흘러든다.


한반도 중부권 지역 대부분을 포함하는 한강유역권. 한강은 태백 검룡소와 오대산 우통수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이 양평 두물머리에서 합류하여 서울을 지나 서해로 흘러간다. 홍천강, 주천강, 평창강을 비롯하여 중부지역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천들이 한강에 합류한다.

서울의 선사
한강유역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대표적인 유적은 제천 점말동굴유적과 단양 수양개유적이다. 서울에서도 주먹도끼 등 많은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었다. 신석기시대에는 서울에도 큰 마을이 생겼다. 대표적인 유적은 강동구 암사동유적이다. 청동기시대에는 한국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성립하였다. 고조선 말기에 한반도 중서부지역에도 작은 규모의 나라들이 형성되었다. 한강유역에는 마한의 몇몇 소국이 자리잡았고, 그 가운데 백제국이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발전하여 점차 마한지역을 통합해 나갔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서울의 선사시대를 보여주눈 전시실 내부. 암사동에서 발굴된 빗살무늬토기를 중심으로 다양한 구석기.신석기시대 생활도구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문명의 기원
불의 발견, 구석기 문화(Dicovery of fire, Paleolithic Culture), 구석기시대는 인류의 전체 역사에서 99.9%를 차지한다. 빙하작용이 되풀이되던 환경속에서 사람들은 도구를 만들고 불을 사용하였다. 한국의 구석기문화는 70만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주로 채집과 사냥을 통해 먹을 거리를 마련했으며, 이곳 저곳으로 이동하면서 동굴에 살거나 들판에 떡집을 짓고 생활하였다. 서울의 여러 곳에서도 주먹도끼 등 구석기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사람과 도구(Human and Tools),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리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도구를 통해 인류는 일반적인 진화의 단계를 뛰어 넘어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이 신체적 한계를 넘어 꿈을 실현할 수 있게 한 도구의 역사는 곧 인류 문명의 발달사이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주먹도끼(구석기시대, 1.서울 오금동, 2.서울 풍납동), 주먹도끼는 구석기시대 전기 대표적인 석기이다. 손에 쥐는 부분을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날이 선 타원형의 도구이다. 동물을 내리치거나 두꺼운 가죽을 가를때, 땅을 팔 때 등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슴베찌르개(구석기시대), 슴베찌르개(구석기시대), 동물을 사냥할 때 찌르거나 가죽을 가르는데 사용한 끝이 뾰족한 도구이다. 뒷부분에 길고 뾰족한 슴베가 달려 있어 자루를 달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여러면석기(구석기시대, 1. 서울 오곡동, 2.서울 세곡동, 3.서울 하일동, 4.서울 항동, 5.연천 전곡리, 6.여주 연양리)


외면찍개.양면찍개(구석기시대, 여주 연양리)


외면찍개.긁개(구석기시대, 경기 연천)


돌망치(구석기시대, 여주 연양리), 찍개(구석기시대, 서울 신림동),

한반도 구석기 사람
한국사람의 조상. 아시아 73개 민족에 대한 최근의 유전자 분석결과에 따르면, 아시아인의 조상은 약6~7만년 전 아프리카 동부에서 출발해 인도북부를 지나 남아시아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들은 약 4~5만년 전에 남아시아에서 다시 두 갈래로 이동하여 북방계의 기마인과 남방계의 농경인으로 나뉘었다. 이 가운데 북쪽으로 이동한 무리가 만주지역을 거쳐 한반도로 이동해 왔다고 한다. 한국사람은 유전자 분석결과로만 보면 남방계와 북방계가 대략 6:4의 비율로 섞여 형성되었다고 한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서울 면목동 유적,
서울특별시 중량구 면목동에서 발견된 자갈돌석기 전통을 가진 약 3만년 전 후기구석기시대 유적이다. 1967년 경희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모두 327점의 석기가 홍적세 후기에 속하는 적갈색 점토층에서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완형석기는 외면찍개, 양면찍개, 긁개, 망치 등 39점이다. 이 유적은 북한의 굴포리 전기 문화층과 함께 아시아적 찍개문화 전통을 이어받은 찍개문화의 하나로 보인다. 이 디오라마는 서울의 대표적인 구석기시대 유적인 면목동 유적을 모델로 하고 제천 창내유적, 단양 금굴 수양개유적 등을 참고하여 일상생활모습을 모형으로 재구성하였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서울 면목동 유적을 모델로 재구성한 구석기인의 생활모습

농경의 시작, 신석기문화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따뜻해지자 사람들은 한 곳에 머물며 농사를 짓고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를 신석기문화라고 한다. 한국의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8,000년 무렵에 시작되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물가에 움집을 만들어 마을을 이루고 정착 생활하였다. 돌을 갈아 날을 세운 간석기를 썼으며 사냥과 물고기잡이를 하고 개.돼지.소 등도 길렀다.

빗살무늬토기,
신석기시대 사람은 손으로 흙을 빚어 그릇모양을 만든 다음 야외가마에서 500~600℃ 이하의 온도로 구워낸 토기를 사용하였다. 빗살무늬토기가 주류를 이루며, 그 밖에 덧무늬토기, 눌러찍은무늬토기.그은무늬토기 등이 있다. 빗살무늬토기는 뾰족한 도구로 그릇 표면에 여러가지 무늬를 새기거나 그어서 만든 토기로 기원전 4,500년 무렵부터 한반도 중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토기는 대체로 밑부분이 뾰족한 포탄모양이 대부분이며, 일부는 밑이 평평한 모양도 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빗살무늬토기(신석기시대, 서울 암사동)


빗살무늬토기 바리(신석기시대, 서울 암사동)

간석기,
신석기시대의 간석기는 화살촉을 제외한 대부분의 경우 날부분만 갈고 거친 상태로 둔 것이 많다. 간석기의 종류는 화살촉.도끼.창.그물추.작살.낫.갈돌.갈판.공이.원반모양의돌.격지 등이 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그물추(신석기시대, 서울 암사동)


갈돌.갈판(신석기시대, 서울 암사동)


점멸문토기(신석기시대, 인천 영종도)


작은 단지.두귀달린단지(신석기시대, 춘천 교동동굴)

신석기시대의 농경(Agricullture of Neolithic Age)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조, 기장 등을 재배하였다. 고양 일산에서 조와 볍씨가, 진주 상촌리와 옥천 대천리에서 조.피.수수.기장.보리.밀.콩이 확인되었다. 이밖에 부산 동삼동에서 조와 기장, 창녕 비봉리에서 조가 수습되었다. 도토리(Acorn), 신석기시대의 중요한 생계수단 가운데 하나는 야생식물 채집이었다. 특히 도토리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어 신석기시대 사람의 주된 식량이 되었다. 도토리를 물에 담가 떫은 맛을 없애고 갈돌과 갈판으로 빻아 가루로 만들어 먹었다. 도토리는 서울 암사동, 창녕 비봉리, 양양 지경리 등 여러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신석기시대 사람의 삶(Life of Neolithic Age People).
서울 암사동유적,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유적지이다. 이 유적은 1925년 대홍수 때 한강의 범람으로 유적 일부가 발견되어 이후 여러차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신석기시대의 집자리와 빗살무늬토기.톨도끼.돌화살촉.긁개 등의 생활도구와 돌낫.돌보습 등의 농기구 등 다량의 신석기가 출토되었다. 이 디오라마는 서울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유적인 서울 암사동 유적을 모델로 하여 신석기시대 토기제작, 물고기잡이, 사냥.채집 등의 실상생활을  모형으로 재구성하였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암사동 유적을 모델로 재구성한 신석기인의 생활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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