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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는 온조가 백제를 건국한 기원전 18년부터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660년까지 678년간 한반도 서부와 남부에 존재했던 국가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건국신화에 따르면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아들인 온조와 비류가 권력투쟁에 밀려서 한반도로 남하하여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이런 건국신화를 바탕으로 백제는 부여,고구려 유민집단이 토착세력과 연합하여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한반도 남부지역에는 크고 작은 성읍국가의 연맹체인 삼한이 존재했으며, 백제는 한반도 중부와 서부지역의 마한연맹체 일원으로 출발하였다다. 당시 마한에는 천안지역에 근거를 둔 목지국이 연맹을 주도했으나, 북방에서 남하한 백제는 중국대륙과 북방유목민의 영향으로 기술이나 문화가 뛰어났던 것으로 보이며, 점차 마한내에서 주도세력으로 부상하면서 고대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백제는 한강 유역인 하남 위례성에서 도읍을 정한 이래 고구려의 압박을 받아 웅진, 사비로 천도하였다. 오늘날 백제 유물들은 대부분은 웅진(공주), 사비(부여)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많은 유적지들 또한 그곳에 남아 있다. 하지만, 하남 위례성은 전체 백제 역사에서 약 73%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수도로 존재했고, 백제의 전성기였던 근초고왕 시기 또한 하남 위례성이 수도였다. 하남 위례성은 그 위치에 논란이 있기는 하나 한강변에 위치한 풍납토성이었을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풍납토성은 강변에 위치한 평지성으로 성벽 둘레가 3.5km 정도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읍성이었다. 지금은 성벽 일부만 남아 있고, 주택과 아파트가 들어선 주거지역으로 변했지만, 이곳에는 토기류를 바롯하여 상당히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출토된 유물들은 독창적이거 뛰어난 수준을 보이지는 않지만 동시대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문물이 앞선던 것으로 보이며,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주는 유약을 바른 도기 등 중국에서 수입한 물품들 또한 많이 출토되고 있다. 풍납토성과 함께 백제의 수도 한성을 형성했던 몽촌토성은 도시가 확장되고 군사적인 목적 등으로 비교적 후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소서노, 비류, 온조,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백제 건국신화에 따르면, 졸본부여에서 단란하게 살던 비류.온조왕자는 북부여에서 온 주몽의 또다른 아들 유리가 왕위를 잇게 되자 어머니 소서노를 모시고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향하였다. 그러자 오간, 마려를 비롯한 신하 10명과 많은 백성들이 비류, 온조 형제를 따라 고향을 떠났다. 학계에서는 대개 온조 일행을 북방계 철기문화를 지닌 부여.고구려계 유민집단이라고 본다. 이들은 북방 유목문화와 중국 농경문화를 모두 경험하였기에 경쟁력이 높았다. 따라서 한강유역에 먼저 자리잡고 있던 마한 주민들을 누르고 더 높은 정치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온조 일행이 남쪽으로 향했을 때 한강유역에 닿기까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대략 두가지였을 것이다. 하나는 걷거나 말을 타고 이동하는 육로이고, 다른 하나는 배를 타고 바다를 통하는 해로이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온조 일행이 육로를 선택해 하남 위례성에 닿았고, 비류 일행이 해로를 선택해 미추홀에 닿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백제 건국의 시조 온조, 비류와 어머니 소서노가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한강유역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나라를 세우다.
백제는 마한 54국의 하나인 백제국이 커진 나라이다. 건국설화에 따르면 기원전 18년 졸본부여 왕녀와 고구려 시조 주몽 사이에서 태어나 온조가 형 비류와 함께 백성과 신하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나라를 세울 만한 땅을 살폈는데, 비류는 미추홀을 선택했고, 온조는 한강 남쪽의 위례성에서 백제를 세웠다고 한다. 이를 통해 백제는 부여.고구려 등의 북방계통과 마한 등의 남방계통 주민이 함께 어우러진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삼국사기, 김부식 외 10인, 고려 인종 23년(1145)편찬,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복제품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 한수 남쪽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나라이름을 십제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기원전18)이었다. ... 백성들이 즐겨 따랐다고 하여 나라이름을 백제로 고쳤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1」, 시조 온조왕 즉위년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십제와 백제
『삼국사기』는 백제.고구려.신라 3국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서 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역사서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김부식 등이 고려 인종23년(1145)에 당시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편찬하였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졸본부여에서 내려온 온조일행이 한강 남쪽 위례성에서 건국했으며, 맨 처음 이름은 십제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백제라는 나라 이름은 '많은 사람이 바다를 건너왔다'는 백가제해(百家濟海) 또는 '백성들이 즐거이 따랐다'는 백성락종(百姓樂從)에서 비롯되었다. 성왕 때 잠시 남부여로 불렸으며 『삼국사기』에는 십제, 『삼국지』에는 백제국, 『일본서기』에는 위례국이라는 이름도 나온다. 백제의 또 다른 이름으로는 응준, 응유, 나투가 있다. 응준과 융유는 매를 뜻하며, 나투는 백제가 신라와 다투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삼국지, 진수, 중국 서진(265~316),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복제품, 『삼국지』는 중국의 삼국시대(2세기말~3세기 후반) 위.촉.오 3국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위서」 동이전에 백제가 마한 50여개 나라들 가운데 하나로 소개되어 있다. 당시 백제는 마한에 속한 작은 나라였고 이후 마한 전체를 지배하는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마한은 ... 원양국.모수국.상외국.소석색국.대석색국.우휴모탁국.신분고국.백제국.속로불사국... 초리국 등 무릇 50여 나라가 있다."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한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초기백제의 토기
백제는 기원전 18년 마한의 작은 나라로 시작하여 점차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백제 초기에 해당하는 유적에서는 덧띠토기와 검은간토기 등이 발견되는데 이들은 청동기와 초기철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서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 전후까지에 해당한다. 덧띠토기는 토기의 입구 바깥으로 띠를 덧붙여 돌린 모습인데 띠의 단면을 원형과 삼각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초기에는 원형으로 만들었으나 점차 삼각형으로 바뀌어간다. 검은간토기는 둥근 몸통에 목이 긴 모습이며 고운 점토로 만들고 겉을 검은색으로 문지른 것이다. 이 둘은 한 유구에서 함께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백제초기에 해당하는 유적으로는 화성 동학산.화성 발안리.안성 반제리.가평 대성리 등이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덧띠토기, 검은간토기,  덧띠토기, 가평 대성리 유적


덧띠토기, 덧띠토기, 뚜껑, 굽다리접시, 화성 동악산 유적


검은간토기, 덧띠토기, 잔, 화성 발안리유적

한성의 기억,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왕도 한성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서울에서 건국되었다. 기원후 660년까지 존속하는 동안 백제의 수도는 한성, 웅진, 사비로 바뀌었으며 31명의 왕이 즉위하였다. 백제 전성기의 영토는 북쪽으로 지금의 황해도에서부터 남쪽으로 전라도와 제주도에 이르렀다. 한성기(기원전 18~ 475년)는 백제 전체 역사의 73%를 차지한다.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한성이 함락되고 웅진으로 천도하기까지 493년간 21명의 왕이 즉위하였다. 이 시기에 백제는 최대 전성기를 누렸으며 고대국가체제를 확립하고 마한세력을 통합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진, 송), 일본(왜) 등 주변 여러 나라와 교류하며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신하들이 아뢰었다.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를 띠처럼 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삼국사기』 백제본기 권23 온조왕 즉위년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백제의 첫도읍은 한강 남쪽의 위례성이다. 위례성은 나중에 확대 발전하여 한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좁은 의미의 한성은 궁궐이 있던 북성과 별궁이 있던 남성 등 2개의 성을 가리킨다. 북성은 지금의 풍납토성이며 남성은 지금의 몽촌토성이다. 넓은 의미의 한성은 두 성 바깥의 도시와 왕릉구역인 석촌동고분군 등 인근지역을 모두 포함한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풍납토성(사적11호)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1.2동에 위치하는 평지성으로 원래 성벽 둘레가 3.5km 정도였으나 지금은 약 2.2km 가량 남아 있다. 1964년에 성 내부를 시험 발굴하여 조사하였고 1996년에는 성벽을 측량조사하였다. 1997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발굴조사하고 있다. 지금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제사건물터.창고.주거지.도로.배수로.우물등 많은 유구가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철기류.기와 등 다양한데 토기류가 가장 많다. 3~5세기 무렵 중국과의 교류사실을 알려주는 서진.동진의 유약바른도기.동전무늬도기.청자류가 수십점 발견되었으며 홍성.논산.청주.진천 등 충청지역 및 영산강 유역, 가야와 왜에서 만들어진 토기도 있다. 그리고 수천점에 달하는 기와와 유리.옥.토제벼루.그물추.가락바퀴.토관.기둥장식.각종 동물뼈 등이 나왔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풍납토성 모형. 서울 풍납동토성(일명 '풍납토성')은 몽촌토성과 함께 백제가 터를 잡고 국가를 세운 하남 위례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토성이다. 성의 규모는 둘레가 2.7km에 이르는 읍성으로 삼국시대 초기 읍성국가의 성(城)으로는 상당히 큰 규모로 남쪽편 몽촌토성과 함께 당시로서는 큰 규모의 도시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성의 풍경
백제때의 한성은 지금의 송파구와 강동구 일대이다. 한성은 정궁이 있는 북성(풍납토성)과 별궁이 있는 남성(몽촌토성)으로 구성되었다. 성 안에는 각각 궁궐과 관청, 왕족 및 귀족들의 집과 군사시설, 일반민가 등이 있었다. 성밖에는 일반민가와 농경지, 각종 경제시설도 배치되었다. 한성 남쪽의 석촌동.가락동 일대에는 왕과 귀족, 일반인의 무덤으로 이루어진 공동묘지가 있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풍납토성은 한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벽 대부분이 해자로 둘러져 있다. 한강을 오가는 배들이 도시 입구에 정박할 수 있다. 청동기 한.중.일 해상무역 거점이 되었던 고대국가들이 선호했던 입지조건이며,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 또한 이런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경당지구 우물
경당지구 206호 유구에서 발견된 우물이다. 206호 유구는 한변이 11m 방형의 평면으로 토대를 만들고 그 가운데 우물을 만든 구조이다. 우물의 깊이는 3m인데 바닥에 각진나무로 방형의 틀을 반들고 자갈을 채워 바탕을 구성하였다. 그 위로 판판한 나무를 서로 맞추어서 4단의 나무틀을 만들었다. 방형의 나무 위로 납작하게 깬돌을 이용하여 모를 죽여 쌓아 올려 위로 올라가면서 둥근 원형을 이룬다. 나무틀 아래는 215점의 토기들을 5단으로 차곡차곡 쌓았으며 그 위로 돌이 채워져 있었다. 우물 안 토기들은 모두 입.목부분이 깨져 있어 제사용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풍납토성 경당지구 우물 출토 토기,


경질무문토기, 서울 풍납토성,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인 민무늬토기보다 경도가 단단한 토기이다. 중도식토기로도 불린다.
항아리.


항아리,
 

깊은바리, 서울 풍납토성, 입부분이 밖으로 벌어져 있고 바닥부분의 형태가 편평하다. 계란모양토기, 시루와 함께 취사용기이다.

유약바른도기와 초두
유약바른 도기는 도자기 중에서 거친 표면의 도기에 유약을 바른 것을 말하며, 올리브색과 흑갈색을 띤다.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유약바른도기는 모두 중국제이며 백제가 중국과의 문물교류를 통해 당시 선진문화를 들여왔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중국의 유약바른도기가 백제토기와 함께 출토되므로 백제 토기의 연대를 추정할 때 하나의 기준을 제공하기도 한다.
초두는 액제를 데우는데 사용했던 그릇의 일종으로, 주전자형태의 몸통에 다리가 셋이고 손잡이가 붙어 있는 모습니다. 초두는 유목민 전통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백제지역에서 출토된 초두는 중국 남조시대 초두의 영향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이 역시 중국과의 문물교류를 상징하는 유물이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초두, 세발토기


유약바른도기


장군, 병, 서울 풍납토성


세발토기, 굽다리접시, 손잡이달린 굽자

세발토기는 음식 등을 담는 그릇으로 생활유구 및 제사유구, 무덤 등에서 다양하게 나오는 백제의 대표적인 토기이다. 굽다리접시는 신라와 가야 등지에서 많이 출토되는 매우 보편적인 그릇이다. 신라, 가야의 것에 비해 굽이 낮고 투창장식이 없는 간결한 모습이 특징이다. 세발토기와 굽다리접시는 뚜껑받이턱이 있는가 없는가로 뚜껑을 얹을 수 있는 지 없는 지를 구분할 수 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단지,항아리, 서울 풍납토성,  음식물을 보관하거는 액체를 담는 용도로 사용한 그릇이다. 입과 목부분의 형태가 다양하고 크기도 여러가지이다.


시루,


동전무늬수막새, 기하무늬수막새,점멸무늬 수막새, 돌절구


그릇받침, 서울풍납토성, 단지나 항아리 등을 위에 올려 놓는 받침대로 주로 제사용 토기로 알려져 있다. 그릇형과 원통형이 있고 띠를 두르거나 문양을 새겨 치장한 것이 많다.


곧은입 항아리, 서울 풍납토성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출토유물
한성백제의 여명기는 역사적으로 삼한시대에 해당한다. 풍납토성 내에서는 이 시기에 해당하는 토기가 많이 출토되었다. 삼한시대 마한 토기는 크게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로 나뉜다. 경질무문토기는 이전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 제작기술을 바탕으로 높은 온도에서 굽는 새로운 기술을 더하여 만든 토기로, 기원전 100년 무렵에 출현하였다. 그 종류로는 아가리가 밖으로 벌어진 외반구연호, 아가리가 안쪽으로 기운 내반구연호, 시루, 뚜껑, 사발 등이 있다. 타날문토기는 토기 겉면에 무늬가 새겨진 토기로, 바둑판 모양의 격자문.승문 등의 무늬가 많다. 그 종류로는 일상생활의 음식조리에 사용한 적갈색의 깊은 바리, 계란모양토기, 시루, 동이, 저장에 유리한 회흑색의 둥근밀항아리, 큰독, 큰항아리 등이 있다. 3세기 중.후반에 이르면 토기문화에 변화가 일어나 양식적으로 통일되어 간다. 겉면을 검은색으로 반들반들하게 문지르고 기하학적 문양을 새긴 검은간토기가 출현한다. 검은간토기는 다른 토기와 달리 신분을 상징하는 위세품으로 추정한다. 굽다리접시, 세발토기, 목이 곧게 뻗은 곧은입항아리 등이 새로 나타난다. 그 중 세발토기는 백제영역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는 토기이다. 한성백제의 토기는 회색 혹은 회백.회흑색을 띠고 표면에 자연유가 없는 토기가 많다. 이 시기에는 가마 내부 온도가 1,000~1,200℃정도가 되어야 만들어지는 회청색 경질토기가 등장하여 사비시기까지 지속된다. 기존에 많이 쓰던 그릇들도 이 시기에 이르면 모습이 변화하는 양상이 뚜렷하다. 백제토기 연구를 통해 백제의 영역변화, 문화변화 등을 알 수 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작은 단지, 넓은입항아리,
 

경질무문토기


뚜껑, 서울 풍납토성, 뚜껑은 접시.사발.단지.항아리 등 다양한 그릇에 사용하였다. 따라서 뚜껑의 크기.형태.손잡이모양 등이 각양각색으로 발견된다.


작은단지, 서울 풍납토성, 목이 짧고 높이가 10cm 내외인 작은 항아리이다. 뚜껑을 덮어 내용물을 보관할 때 사용하였다. 손잡이나 다리가 달린 형태도 있다.


합, 서울 풍납토성, 입구가 넓고 깊이가 낮으며 바닥이 편평한 형태의 그릇으로 백제 한성기의 전형적인 기종이다. 주로 생활유적에서 발견된다.


뚜껑접시, 서울 풍납토성, 뚜껑을 덮을 수 있도록 뚜껑받이턱이 있는 접시이다. 뚜껑을 덮어 음식 등을 위생적으로 보관하였다.


큰접시, 서울 풍납토성, 뚜껑접시보다 입이 훨씬 넓은 접시이다. 몸체를 받치는 3개의 다리가 있거나 뚜껑받이턱이 있는 경우도 있다.


수막새, 그물추, 가락바퀴, 원반형토제품, 숫돌


숫돌, 잔, 귀달린 접시


사발, 서울 풍납토성, 밥이나 국, 반찬 등을 담는 식사용기이다. 집자리에서 많이 발견된다.


토관, 풍납토성 출토 토관은 1600여 년 전 풍납토성 안에 하수관시설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유물이다. 풍납토성에서 토관은 지금까지 큰 것과 작은 것 2종류 10여개 만이 발견되었다. 원래는 수천개의 토관을 이어 붙여 사용했을 것이므로 앞으로 더 많은 양이 발견될 것으로 기대한다. 고대에 하수관과 같은 위생시설을 만들려면 많은 인력과 기술자를 동원해야 했다. 고운 흙으로 같은 크기의 토관을 빚고 수천그루의 나무를 잘라 말려서 가마장작으로 써야만 했다. 당시 이만한 경제력과 기술력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은 백제왕과 그 주변 극소수 지배층뿐이었을 것이다. 풍납토성 토관은 4~5세기 무렵 백제 사람들이 한성을 정연하게 도시구획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뼈갑옷. 몽촌토성 남쪽 성문 가까이에 위치한 저장구덩이에서 출토되었으며 뼈조각(소찰)의 크기는 길이 10cm, 폭 2~4cm이다. 뼈 조각 이음이 모두 4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아랫부분을 감싸는 역할을 했다. 출토상태를 바탕으로 복원해보니 모두 185개의 뼈조각으로 위와 같은 모습을 만들 수 있었따. (무게 3.3kg) 뼈 갑옷 위의 가슴.배 부분은 쇠찰갑에 천을 두르고 옻칠을 하였으며, 모두 514개의 조각을 이어 갑옷을 만들었다. (무게6.4kg)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몽촌토성(사적297호)
몽촌토성은 해발45m 안팎의 자연구릉을 이용해 만든 토성으로, 성벽의 전체 길이는 2,285m이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문 남북 730m, 동서 570m 크기의 마른모꼴에 가깝다. 몽촌토성은 1983년에 유적 정비 복원을 위한 시굴조사가 실시된 이후 1989년까지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몽촌토성에서 확인된 백제 한성기의 유구는 적심석을 갖춘 지상건물터, 판축대지, 움집터, 저장구덩이, 연못터 등이 있다. 유물은 대부분이 3세기 중.후반 이후의 토기류이고, 움집터에서 칼, 화살촉 등의 철제 무기류가 출토되었다. 저장구덩이에서는 뼈 갑옷 등이 나왔다. 중국 동진의 전문 도기, 금동 허리띠, 백제 토기와 기와 및 와당 등이 많이 발견 되었으며 고구려 토기도 조금 출토되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몽촌토성 모형, 몽촌토성은 한성백제 왕성이었던 풍납토성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하천이 흐르고 있다. 서울 올림픽 공원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초기 백제 시대의 토성이다. 88올림픽이 열렸던 역사적인 장소와 같이 했던 곳으로 그 때문에 공원화되고 아주 깨끗학 정비되어 있다. 전체 둘레는 2.7 km라고 하며 조선시대 읍성 규모의 토성이다.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사이에 한강을 오가는 배들이 정박하고 있다.


그릇받침, 몽촌토성, 그릇받침은 항아리.단지 등의 둥근밑토기를 올려 놓는 용도로 젯 등의 의례에 주로 사용하였다. 풍납토성, 몽촌토성 등 한성기의 백제 도성안에서 주로 발견되어, 당시 일반백성보다는 왕실을 비롯한 귀족들의 문화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형태에 따라 발형기대와 원통형기대로 나뉜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그릇받침, 몽촌토성


작은단지, 굽다리접시, 몽촌토성


굽달린 합, 몽촌토성


곧은입항아리. 곧은입항아리는 짧고 곧게 뻗은 입부분과 풍만한 동체를 가진 둥근모양의 항아리이다. 동체에는 각종 무늬를 새겨 넣는데 어깨에는 2줄의 평행선을 긋고 격자무늬나 물결무늬를, 아랫부분에는 격자무늬만을 장식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릇받침, 시루


몽촌토성 산책로에서 주운 토기조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