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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은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 않다고 할 수 있지만 역사에 기록된 내용과 출토된 유물, 고구려를 비롯한 주변 지역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 등을 종합하여 추론하고 있다. 비교적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출토된 유물로 추정할 수 있는 백제인들의 식생활은 당시 중국이나 동아시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음식을 쪄서 먹었으며, 곡물은 끓여서 죽처럼 먹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백제의 여러 집터에서 출토된 계란모양토기와 시루는 지금도 사용하고는 음식을 찌는 용기이다. 또한 그릇으로 보이는 깊은바리토기는 죽을 먹기에 편리하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백제인의 복식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여러 기록에 고구려와 비슷하다고 하며, 고구려벽화에 나타난 복식과 유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몸을 치장하는 장신구들은 출토되는 유물들이 있어 확인할 수 있는데, 지방 귀족들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관, 귀걸이, 목걸이, 허리띠장식, 신발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중국 기록에는 마한사람들이 옥을 금.은보다 귀하게 여겼다고 한 것으로 볼 때 옥으로 만든 꾸미개를 많이 사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백제가 남긴 문자생활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으나 한성백제기인 근초고왕대에 역사서인 '서기'를 편찬했고, '도덕경'이란 문구를 인용했다는 기록이 있는 유학과 도가사상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받아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동진을 통해 불교를 받아 들여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했는데, 칠지도를 비롯하여 백재관련 유물들이 일본에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한성백제박물관에는 백제가 일본천황에 선물했다고 전해지는 일본 도다이지 소장 바둑판(복제품)을 볼 수 있는데 상당히 정교하고 화려하게 만들어졌다.

동명사당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은 나라를 세우고 가장 먼저 시조 동명왕을 모시는 사당을 만들었다. 동명왕을 시조로 모시는 것은 부여계의 전통이다. 백제와 같은 부여계인 고구려에서는 건국시조 고주몽을 동몽셩왕이라 하였다. 백제에는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이듬해 정월에 동명사당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관례였다. 백제의 국가제사는 동명왕에 대한 제사, 천지에 대한 제사, 신천에 대한 제사 등이 있었다. 동명왕에 대한 제사는 국가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서 한성기말까지 꾸준히 행해졌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풍납토성 경당지구와 44호 대형건물터
풍탑토성 경당지구는 송파구 풍납1동 136번지 일대 역사공원이 조성되어 있느 곳으로 풍납토성 중앙부의 북쪽에 위치한다. 경당연립주택을 재건축하는 과정에서 백제 한성기 유구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경당지구에 대한 발굴조사는 두차례에 걸쳐 한신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진행되었다. 1차(1999.9~2000.5), 2차(20082~8)발굴조사결과, 중국제 도기가 가득찬 창고, 200점 이상의 토기가 매립된 석축우물, 각종 동물뼈가 발견된 제사건물터 등 특수한 성격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경당지구는 왕실이 사용했던 곳으로 보이며, 이 지역을 포함하여 북쪽으로 궁궐이 자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당지구에서 확인된 44호 유구는 평민이 '呂'자형인 대형 건물터이다. 남북으로 전실과 본실2개의 장방형 건물이 나무다리로 연결된 구조이다. 남쪽으로 출입구가 나 있는 작은 건물인 전실은 파괴가 심해 그 원형을 파악할 수 없다. 큰 건물인 본실은 통서너비 13m, 남북길이 18m 이상으로 200㎡(60평)가 넘는 대형이다. 본실은 주변으로 너비 1.6m, 깊이 75cm의 도랑이 감싸고 있다. 도랑 바닥은 박석이 3열로 깔려 있고 그 위로 숯가루가 채워져 닜다. 동쪽 도랑 안쪽에서 발견된 너비 50cm의 점토둑은 벽을 세웠던 자리이다. 이 점토둑에 연접해서 기둥구멍이 있다. 기둥구멍은 원형1개와 반원형2개가 삼각구도로 한 조를 이뤄 3m 간격으로 확인되었다. 기둥은 지름 10cm 정도의 원통형 나무와 지름 20cm 정도의 나무를 반절하여 사용하였다. 이 건물은 큰 규모, 두꺼운 벽, 숯 채운 도랑으로 건물주변을 감싼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국가적 의례를 거행하는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 시조 동명왕을 모신 사당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동명사당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 경당지구 44호 건물을 복원한 모습

백제사람의 삶

어떻게 살았을까? 의.식.주
백제사람들은 주로 채식을 했으며 곡물을 끓여 먹고 조미료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식사는 하루에 두끼를 먹었다. 집은 평면모양이 육각형.말각방형.타원형 등 다양하며, 상류층은 주로 육각형 집에 살았다. 궁궐.관청.사원 등의 건물에는 기와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백제의 옷은 고구려 옷과 거의 비슷해서 남자는 저고리와 바지, 여자는 저고리와 치마를 입었으며 신분에 따라 옷의 색깔을 구분하였다. 귀족들의 대표적인 꾸미개는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등이 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옷차림과 꾸미개
백제의 옷,
중국의 역사서인 '남사'와 '북사'에 '백제의 옷은 고구려와 비슷하다'란 기록이 있다. 백제의 옷은 고구려와 비슷하여 남자는 저고리와 바지를, 여자는 저고리와 치마, 두루마기를 입었다. 저고리는 엉덩이를 덮는 길이에 허리띠를 둘러 여미고, 깃.섶.끝동 등에는 선이 있었다. 두루마기는 소매가 넓으며, 중국식 두루마기도 입었다. 백제왕은 자주색의 소매가 넓은 두루마기에 흰색의 가죽띠를 두르고, 푸른색의 비단바지를 입었다. 금꽃으로 장식한 검은색 비단관을 쓰고, 검은색 가죽신을 신었다. 백제 사람들은 신분에 따라 옷의 색과 재질이 달랐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백제의 베틀
베틀은 삼.누에.모시.목화 등의 섬유 원료로 베.무명.명주 드으이 피륙을 짜는 틀이다. 2개으 베틀다리에 구멍을 뚫어 앞다리와 뒷다리를 세우고 그 사이에 가로대를 고정시킨 형태이다. 부속구로 피륙을 짤 때 날실을 감아 베틀 앞부분에 두는 두투마리, 베짜는 이의 허리 뒷부분을 감싸 말코에 잡아메는 부테허리, 따여나온 포목을 감는 막대인 말코, 참빗처럼 대쪽을 연결한 살의 틈마다 날실을 꿰어 고르고 북의 통로를 만들어 주며 씨실을 피륙짜는 부분까지 쳐주는 바디와 이를 고정시키는 바디집, 실이 엉키지 않도록 하는 비경이, 피륙을 짤 때 날실 사이로 오가면서 씨실을 넣어 직물이 짜이도록 하는 북 등이 있다. 한국에서 직기에 관한 그림자료는 고구려 대안리 1호묘의 벽화에 그려진 것이 유일하지만, 바디를 사용해야만 제직이 가능한 직물들이 고대의 고분에서 상당수 발견되어 당시에 바디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백제인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여 복원한 베틀

백제의 꾸미개
백제의 꾸미개는 관, 귀걸이, 목걸이, 허리띠장식, 신발 등이 있다. 한성기의 관은 상투를 간신히 가릴 정도로 폭이 좁은 반타원모양의 고깔 양 옆에 새날개장식을 세운 것이 특징이다. 귀걸이는 민귀걸이와 드리개가 있는 장식귀걸이가 있다. 드리개는 샛장식, 끝장식을 모두 갖춘 것과 끝장식만 있는 것이 있다. 샛장식은 공모양이 많고 북모양도 있다. 끝장식은 하트모양, 열쇠모양, 원모양 등 다양하다. 목걸이는 마노, 호박, 유리, 탄정 등으로 만들었다. 탄정과 함께 유리에 금박을 입힌 금박구슬은 백제 목걸이의 특징이다. 허리띠 장식은 천이나 가죽으로 된 띠에 부착한 금, 은, 금동으로 만든 장식으로 무늬는 짐승얼굴무늬, 용무늬, 잎사귀무늬 등이 있다. 이러한 허리띠는 주로 왕과 관료의 옷에 사용하였다.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허리띠장식은 초기모양에 속한다. 신발은 금동신, 가죽신, 나막신, 짚신 등 다양하다. 금동신발은 일상생활에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무덤을 만들 때 죽은 사람의 발에 신겼던 것으로 본다. 바닥판 1매와 옆판 2매로 구성되며, 판에 새긴 무늬는 시간에 따라 凸자무늬, 마름모무늬, 거북등무늬 등으로 바뀐다. 백제의 금동신발은 모양이 일본 것과 매우 비슷하여 귀걸이와 함께 백제가 일본으로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나막신(백제, 충남 아산 갈매리, 복제품), 구술(백제, 1.군포 부곡동, 2.화성 화산동)


구슬(백제, 1.2.4.5.6. 화성 화산동, 3. 가평 항사리)


금동고리(백제, 용인 신갈동), 금귀걸이(백제, 김포 양촌읍)

백제무덤에서는 옥이 많이 출토되었다. 마한사람들은 금.은보다 옥을 귀하게 여겼다고 한 만큼 옥은 권위의 상징이었다. 백제사람들도 옥을 부착한 옷은 물론 옥으로 만든 다양한 물건들을 사용하였다. 옥의 종류에는 유리, 천하석, 연옥, 수정, 호박 등이 있다. 모양에 따라 둥근옥, 대롱옥, 연주옥, 다면옥 등으로 나뉜다. 제작기법은 유리용액을 거푸집에 부어 만들거나 철봉에 말아 일정한 크기로 잘라 만드는 방법이 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대롱옥(백제, 가평 대성리), 다면옥(백제, 가평 항사리)


본뜬거울(백제, 하남 미사리, 복제)


은제관꾸미개(백제, 부여 염창리, 복제), 은제관꾸미개(백제 6~7세기, 부여 능산리, 복제)


금동관모(백제 5세기, 공주 수촌리, 복제)


금동신발(백제, 고흥 길두리, 복제), 금동관모(백제, 고흥 길두리, 복제)


금달개(백제 4~5세기, 서울 석촌동무덤, 복제), 금귀걸이(백제, 1.서울 석촌동무덤, 2.서산 부장리, 3.천안 용원리, 복제)

건강한 밥상
백제 사람들은 주로 집안 가장 안쪽의 부뚜막에서 음식을 조리하였다. 부뚜막은 대체로 중아에 솥받침을 놓고, 봇돌(아둥이 양쪽에 세우는 돌) 위에 이맛돌(아궁이 위 앞쪽에 가로로 걸쳐놓는 긴 돌)을 올려 아궁이를 만들었다. 아궁이에서는 나무장작을 불을 폈다. 백제의 상류층 집자리를 발굴조사하면 아궁이에서 계란모양토기와 시루가 많이 발견된다. 계란모양토기에 불을 붓고 끓여서 올라오는 수증기로 음식을 쪄먹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깊은바리 토기도 많이 발견되는데, 백제사람들이 죽을 많이 만들어 먹었기 때문이다. 조리한음식들은 소반이나 각종 그릇에 담았다. 그릇은 대개 흙이나 나무로 만들었다. 곡물 등의 음식재로는 주로 항아리에 보관하였고 육류나 어류를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 소금을 이용하였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출토된 유물들을 바탕으로 재현해 놓은 백제인의 부엌

그릇과 기와
백제 한성기 토기는 쓰임새에 따라 저장용, 조리용, 운반용 등 다양하게 나뉜다. 저장용으로는 큰 독과 큰 항아리, 물이나 술 등을 담아두는 장군 등이 있다. 조리용은 물이나 음식물을 끓일때 부뚜막에 걸었던 계란모양토기, 깊은 바리, 음식물을 익힐 때 쓰는 시루 등이 있다. 운반용은 각종 항아리와 동이가 대표적인데 물이나 곡물 등의 음식물을 넣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기 쉽도록 손잡이가 붙은 것도 있다. 풍납토성 바깥의 우물에서 출토된 짧은 목 항아리에는 목 부위에 새끼줄이 감겨있어 물을 긷는 두레박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무덤 껴묻거리용, 제사용, 지방수장층에게 내린 고급품 등 백제토기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장군, 특이한 모양 토기


검은간토기 함, 단지(백제 3~4세기, 풍납토성)


타날판(백제, 하남 이성산성, 복제)

백제의 생활유적에서는 기와가 많이 출토된다. 기와는 집의 지붕을 덮는 건축자재로, 직접 지붕을 덥는 암키와, 암키와를 서로 연결해주는 수키와, 처마장식으로도 쓰이는 막새 등 종류와 모양이 다양하다. 백제 사람들은 4세기 무렵 주로 궁궐.관청.사원 등의 큰 건물에 기와를 사용하였다. 서울에서 한성기 기와가 출토된 유적은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등이다. 백제기와는 대체로 회색을 띠며 두께는 1cm 안팎으로 얇다. 제작방법과 관련해서는 점토띠를 쌓아 만든 것과 와통을 이용한 것으로 나뉜다. 이밖에 풍납토성 안에서는 기둥장식, 토관, 전돌 등이 출토되었다. 모두 고급건물과 주요 국가시설에 쓰인 것이며 백제 도성으로서 풍납토성의 위상을 보여준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수막새(백제 3~4세기, 풍납토성), 수막새


목메(백제, 부여 궁남지.광주 신창동, 복제), 자귀(백제, 아산 갈메리.광주 신창동, 복제)


전돌(백제 3~4세기, 풍납토성), 주춧돌(백제 3~4세기, 풍납토성)


토관(백제 3~4세기, 풍납토성), 기와(백제, 포천 자작리)

순간포착 백제마을
풍납토성 동쪽 성벽 바깥에서는 '井'자 모양의 나무 우물이 발견되었다. 옛날에 우물은 먹을 물을 긷는 소중한 생며의 원천이자 마을 사람들이 서로 소식을 전하고 정을 나누는 소통의 공간이었다. 나무 밑 그늘진 곳에서는 노인들이 바둑을 두며 휴식을 취하고, 아낙들은 식사준비을 위해 물을 긷고 채소를 씨었을 것이다. 백제 사람들은 토기를 많이 만들었다. 토기만들기 좋은 흙을 잘 가려낸 다음 물에 개어 진흙으로 만들고 물레 등의 기구로 그릇 모양을 만든 뒤 그늘에서 건조하였다. 토기를 가마에 넣고 불을 때면 백제토기가 완성되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백제인이 살던 모습을 추정하여 복원한 모형

어떻게 살았을까, 사상과 풍속
백제의 사상은 토착신앙과 유교.도가.불교 등이 알려져 있다. 유교와 도가에 대한 이해는 한문 보급과 밀접히 관련된다. 백제사람들은 유교와 도가사상에 대한 이해 위에서 불교를 받아들였다. 백제에는 바둑과 주사위 같은 놀이가 있었으며, 특히 바둑은 개로왕이 좋아하였다. 악기로는 북.피리.백제금이 알려져 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부호가 있는 토기조각(백제 4세기, 고양 멱절산)

부호가 있는 토기조각(백제 4세기, 고양 멱절산)

문자와 정신세계
한반도에서 한자와 같은 문자는 창원 다호리유적에서 출토된 붓으로 보아 원삼국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본다. 이 밖에도 문자의 사용을 나타내는 직접적인 자료는 벼루, 도자 등이 있다. 특히 하남 미사리와 풍납토성 출토 벼루는 한성기 백제의 문자 사용을 증명해 준다. 문헌을 통해서는 근초고왕 때의 박사 고흥이 서기를 편찬하였고, 근초고왕 때의 장군인 막고해가 '도덕경'의 문구를 인용한 기록으로 보아 일찍이 유교와 도가 사상이 들어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84년 침류왕은 동진으로 부터 고대국가 정신세계의 바탕을 이룬 불교를 받아들였다. 백제의 사찰건축을 통해서 당시 융성했던 불교문화를 알 수 있는데 대부분 사비기 절터에 해당된다. 이 밖에도 다양한 모양의 부호가 새겨져 있는 토기와 토기 안에 담겨져 있던 토우 등을 통해 고대를 살았던 백제인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토기에서 나온 토우(백제, 여주 연양리)


돌괭이(백제 5세기, 용인 청덕리), 이 돌괭이는 제의와 관련하여 토기의 타결이나 파쇄에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함께 출토된 단지의 깨진 일부분이 돌갱이의 선단부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모양이어서 이러한 추정을 가능케 한다. 풍납토성 경당 9호 수혈에서도 토기와 함께 출토된 석제 방망이를 타결에 사용하였던 도구로 보고 있어서, 이러한 사용 가능성을 뒷받침 해준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금동관음보살입상(백제, 공주 송정리, 국보247호, 복제)

놀이와 풍속
일본 도다이지 쇼소인에는 백제에서 일본 천황에게 선물했다고 전하는 바둑판이 소장되어 있다. 이 바둑판은 하나의 예술품이라는 찬사를 받아왔는데 자줏빛의 자단목에 선과 문양을 상아와 각종 안료로 화려하게 표현하였다. 특히 바둑판의 선은 19선이며 화점이 17개인데, 이는 한국의 순장 바둑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 흥미롭다. 바둑판을 담는 합은 바둑판보다 조금 크다. 역시 쇼소인에 소장되어 있으며, 바둑판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모습이다. 바깥면에 거북무늬를 연속적으로 배열하고 그 무늬 안에 금박과 은박을 하고 다시 검은 선으로 당화문을 그려 넣은 뒤에 투명한 각지르이 판자를 끼워 놓았다. 바둑돌은 화려한 바둑판과 함에 걸맞도록 상아의 표면을 염색하여 문약을 새기고 채색하였다. 양면에 화식조 무늬를 새겼으며 붉은색과 감색의 상앙에 각각 다른 새모양을 새겨 넣었다. 이 붉은색과 감색 바둑알은 한벌로 보인다. 흰 바둑돌인 벽기자는 석영, 검은 바둑돌인 흑기자는 사문암으로 만들었는데 양면의 꼭대기가 평평하게 되어 있다. 바둑돌을 담아 두었던 용기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뚜껑 윗면에 꽃나무 아래에서 꽃가지를 물고 있는 꼬리 긴 새를 장식하고 옆면에는 염주무늬와 4장의 꽃잎무늬를 늘어 놓았다. 또 하나는 뚜껑 윗면의 은판 무늬에서 중앙에 코끼리를 장식하고 아래쪽 암석에 꽃가지가 둥글게 자란 모양을 표현하였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바둑판상자(일본라사 쇼소인, 복제)


바둑판(일본 나라 쇼소인, 복제)


바둑돌, 바둑돌 상자, 복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