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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_종묘

[덕수궁] 중화문(中和門), 중화전(中和殿) 앞 내조(內朝)와 품계석

younghwan 2012. 4. 6.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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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전은 구한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지위에 오르면서 그에 걸맞는 궁궐건물로 세운 덕수궁의 정전이다. 1902년에 중화전을 처음 세울때는 중층의 웅장한 건물이었으나 화재로 불타버린 후 1906년에 중건한 것이다. 구한말 조선의 경제력을 보여주듯이 다른 궁궐의 건물에 비해서 웅장한 멋이 덜하다는 느낌을 준다.

 조선시대 궁궐에서 정전은 국가적인 큰 행사를 치르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는 고대 로마의 바실리카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덕수궁은 현재 행각이 일부만 남아 있어서 개방된 공간형태를 하고 있다. 중화전의 출입문은 중화문으로 단층에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으며 정문인 대한문에서 직각으로 꺾여서 들어간다. 중화문을 들어서면 바닥에 박석이 깔여 있고 품계석과 삼도가 설치된 조선시대 조정이라고 부르는 국가의례를 치르는 마당이 있다. 덕수궁 자체가 구한말 어지러운 국내외 정세속에서 대부분 세워진 건물이라서 외조와 출입문 등이 경복궁이나 창덕궁에 비해서 왜소한 느낌을 주고 있다.



덕수궁 정전을 들어가는 출입문인 중화문. 중화전과 같이 평면 규모에 비해 기둥 높이가 훤칠하여 다른 궁궐 출입문과는 다른 없는 비례감을 보여주는 문이다. 팔작지붕에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으며 처마가 날렵하게 하늘로 치켜올려졌다. 출입문 앞에는 답도가 설치된 단층의 계단을 두고 있는데 그 높이는 다른 궁궐에 비해서 낮아 보인다. 원래 정전 출입문 앞 마당은 외조라고 불리며 주요 행사가 많이 펼쳐지는 공간인데, 덕수궁 앞 마당은 그리 넓지는 않다. 


중화문 편액과 단청. 중화문은 궁궐의 출입문답게 겹처마에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하고 있는 다포계 공포로 지어졌다.


중화문 계단에 설치된 답도와 석수(해치), 구한말 조선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국임을 자처했음에도 불구하고 궁궐 건물은 기존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중화문 앞 계단은 단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5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웅장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중국 자금성 태화문은 단층에 30여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답도는 공식행사때 국왕의 가마가 지나가는 길로 가마가 지나가는 위치에 놓인 소맷돌과 그 양쪽의 해치형상을 하고 있는 석수로 이루어져 있다.


중화문 추녀마루를 장식하고 있는 삼장법사 일행을 묘사하고 있는 잡상. 잡상은 기와지붕 추녀마루를 장식하는 10신상을 묘사한 토우로 궁궐이나 국왕과 관련된 전각에만 올려놓을 수 있었다. 자금성 정전인 태화전은 11개, 태화문은 9개, 일반 건물들은 보통 7개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에 경복궁과 마찬가지로 덕수궁도 중화전은 9개, 중화문은 7개, 일반 건물들은 5개로 이루어져 있다.



중화전 앞에서 내려다본 중화문. 설명대로 균형미가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주위에 회랑이 없다는 것이 정식 궁궐로서는 부족해 보이는 느낌이다.


중화문을 들어서면, 국왕과 세자, 신하들이 지나가는 길을 구분해 놓은 삼도형식의 답도와 문.무 양반을 구분하여 신하들에 서열에 맞게 도열할 수 있도록 표시한 품계석과 정전이 중화전이 눈에 들어온다.


큰 박석을 깔아놓은 삼도. 국왕이 지나가는 어도와 그 양쪽에 신하들이 지나가늘 길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공식행사를 진행할 때 비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는 의미와 걸을때 몸가짐으로 바로하도록 주의을 할 수 있게 일부러 울퉁불퉁하게 길을 깔았다고 한다.


중화전 월대에서 내려다 본 내조(內朝) 또는 조정이라고 불리는 궁궐 정전 앞 마당. 사방으로 회랑형식의 행각으로 둘러져 있다. 실제로 평상시에 사용하는 공간은 아니고 국가적인 공식행사를 치루는 상징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품계석은 정전 앞에 세워전 표지석으로 공식행사때 직위에 따라서 도열할 수 있도로 표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동쪽에는 문관, 서쪽에는 무관이 도열하며, 종1품에서 종3품까지 6개, 4품에서 9품까지는 정,종 구분없이 6개씩이 세워져 있다. 실제로 고위직만 내조에 도열해 있었으며, 4품 이하 하위직은 중화문 앞 외조에 도열했었다고 한다.


덕수궁 정전인 중화전 영역 또한 다른 궁궐 정전과 마찬가지로 4방이 행각으로 둘려싸여 있는 회랑형식을 하고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 이후 대부분의 행가이 훼손되었고, 모퉁이에 행각의 일부만 남아 있다. 덕수궁 정전은 가장 늦게 지어진 건물이지만, 건물의 훼손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덕수궁 중화전의 대한제국 황실 정전으로 지어졌다고 하지만, 행각이 비롯한 궁궐의 구성요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사방이 뚫린 개방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마, 궁궐 정전으로서의 의미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중화전 앞 마당의 동쪽편에서 바라본 중화문. 담과 회랑이 없는 정문은 뭔가 어색한 듯한 모습이다.


덕수궁 서쪽의 석조전에서 바라본 중화문.


덕수궁 중화문



중화전 일원(Junghwajeon Area)
1902년에 임시 정전으로 쓰던 즉조당 남쪽에 행각을 두르고 중화전을 건축해 궁궐의 중심영역으로 삼았다. 중화전은 원래 중층 건물이었으나, 대화재로 이 일대가 모두 불타 버린 후, 1906년에 단층으로 규모를 줄여 재건하였다. 중화문과 행각도 함께 다시 세워졌는데, 현재 행각은 동남쪽 모둥이 일부만 남아 있다. 중화전과 그 앞마당인 조정은 국가 의례를 치르기 위한 상징 공간이다. 2단으로 월대를 마련하고 바닥에 박석을 깔았으며 품계석과 삼도를 설치하는 등 전통 궁궐 격식을 따랐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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