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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_향교_사당 156

남양주 홍릉.유릉 재실, 기존 왕릉 재실보다 크게 지어진 재실

조선왕조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 황제였던 고종과 순종의 능인 홍릉과 유릉은 기존의 조선왕릉과는 많은 면에 다른 점을 보인다. 가장 큰 변화는 제사시설이었던 정자각 대신 궁궐 정전과 비슷한 침전이 들어서 있고, 봉분 주분에 있던 문.무석인 등 석물 또한 침전 앞으로 옮겨졌다. 또한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참도는 2단에서 3단으로 바뀌었으며, 정자각 오른쪽으로 연결되던 것이 침전 가운데로 직접 연결된다. 석물은 석양과 석호가 빠지고 대신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이 참도 양쪽에 도열해 있다. 이는 기존 왕릉이 제후의 능이었다면, 대한제국 황제의 능으로 중국 명나라 황제릉을 참조하여 조성했기 때문이다. 왕릉을 지키는 관리들이 머무는 공간이자 능을 참배하기 위해 왕이 머물던 공간이었던 재실도 기존..

[성균관] 관리들 사무실인 정록청, 향축을 준비.보관하는 향관청

성균관은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고려시대 국자감을 계승하였다. 조선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직후부터 도성을 구성하는 중요 기관 중 하나로 성균관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7)에 대성전을 비롯한 문묘와 명륜당 등의 강학공간 건물들을 완공하였다. 의 성균관 직제는 지사(정2품, 겸임) 1인, 동지사(종2품, 겸임) 1인, 대사성 제주(정3품) 1인을 비롯하여 하급관리인 종9품인 학록, 실무자인 서리 등 많은 관헌들을 두었다. 오늘날 서울대학교 총장과 마찬가지로 성균관장은 왕이 국정을 펼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학식과 문벌이 있는 사람이 맡는 사헌부.사간원 등과 함께 청직에 속하는 관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정록청, 성균관 관헌들이 근무하던 사무실 성균관 유생들의 생활공간이었던 ..

담양향교, 조선시대 담양도호부 공립교육기관

담양향교는 담양도호부에서 운영하던 공립 중등교육기관이다. 담양군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대나무숲 죽녹원 서쪽편에 위치하고 있지만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곳이다. 이곳에 향교가 세워진 것은 조선이 건국되던 시기인 1938년(태조7)이라고 한다. 현재의 향교 건물들은 대체로 숙종대에 다시 지어진것을 여러차례 고쳐지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죽녹원 대나무숲과 함께 담양도호부 관아와 영산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담양향교는 외삼문, 명륜당, 내삼문, 대성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전학후묘의 형식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 제법 큰 고을이었던 담양도호부의 위상에 걸맞게 대성전에 동.서무를 제대로 갖추고 있으며, 강당 건물도 꽤 큰 편이며, 누마루처럼 문을 열면 주변 경치가 한눈에 ..

담양 창평향교, 옛 창평현 중등교육기관

담양군 고서면 교산리에 위치한 창평향교는 조선시대 창평현 관아에서 운영하던 공립 중등교육기관이다. 창평향교는 조선초 정종대에 처음 세워졌다고 전해지며, 성종대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중건하였다고 하는데, 그후에도 수차례 중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증암천이 흐르는 들판이 내려다 보이는 경사지에 세워졌으며, 대성전, 내삼문, 명륜당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경사진 언덕에 세워져서 향교마당은 넓지 않은 편이지만 언덕에 세워져서 전망이 꽤 좋은 편이다. 창평현은 담양군 남쪽지역인 창평면.고서면.대덕면.남면.수북면 등을 읍치로 하던 조선시대 지방행정구역으로 일제강점기에 담양도호부와 합쳐서 담양군이 되었다. 주로 영산강 이남 창평천과 증암천 유역의 넓은 ..

[성균관] 대학도서관 효시 존경각, 활을 보관하던 육일각, 제2 과거장 비천당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유기관으로 오늘날 대학과 마찬가지로 여러 부속건물들을 두고 있다. 성균관 강당 건물인 명륜관 뒷편에는 성균관 소장 장서보관하던 우리나라 대학 도서관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존경각과 유생들이 닦아야 주요 소양 중 하나인 활쏘기에 사용할 활과 화살을 보관하던 육일각이 있다. 또한 명륜당 서쪽에는 명륜당 주변 강학공간을 보완하는 건물로 강당격인 비천당과 일양재, 벽입재 등의 부속 건물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일제강점기에 성균관대학 도서관으로 사용되던 비천당만이 남아 있다. 성균관 존경각은 우리나라 대학도서관의 효시로 한때 수반권의 장서들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존경각은 성종6년(1475)에 한명회의 건의로 건립되었으며, 성종이 1만 여권의 책을 하사하여 최고 교육기관에 걸맞는 도서를 를..

담양 죽림재, 창녕조씨 집성촌인 분향리마을 문중에서 세운 마을 글방

담양 광주댐 아래 창녕조씨 집성촌인 분향리 마을 언덕에 위치한 죽림재는 문중에서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곳으로 서원과 비슷한 성격을 하고 있다. 이곳은 원래 조선중기 문신인 조수문(1426~)이 후학 양성을 위해 작은 정자인 죽림재를 세운 이후에 크고 작은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서원과 비슷한 규모로 확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마을 건너편에 조선중기 이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였던 양자징 주돌 창평지역 25개 성씨가 후학을 양성하기 건립한 수남학구당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죽림재가 있는 분향리 마을은 담양 일대에서 경치가 좋아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등 양반들이 세운 크고 작은 정자들이 들어서 있는 가사문학의 산실 증암천이 골짜기를 빠져 나와서 들판과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죽림재 ..

담양 수남학구당, 조선중기 지역민들이 세운 담양에서만 볼 수 있는 중등교육기관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에 위치한 조선시대 사설 중등교육기관이었던 수남학구당이다. 수남학구당이 위치한 곳은 조선시대 소쇄원, 환벽당, 식영정 등 지역 양반들이 세웠던 정자와 정원 많이 들어섰던 가사문학의 산실이라고도 여겨지는 영산강 지천인 증암천이 골짜기를 빠져나와 넓은 들판과 만나는 곳으로 지금은 광주댐이 있다. '창평학구당'이라고도 불리는 수남학구당은 유교 사회적 풍토를 조성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사설 교육기관으로 담양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태의 교육기관이다. 현재의 건물은 1988년에 크게 보수한 것을 4칸짜라 강당건물과, 2층문루, 관리사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는 18개 성씨가 참여하여 운영하고 있다. 수남학구당에는 원래 고려시대 건립된 향적사라는 사찰이 있었던 곳으로 조선시대 숭..

[성균관]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들 기숙사인 동재(東齋),서재(西齋)

교육기관으로서 성균관의 실질적인 기능을 담당했던 유생들이 머둘던 기숙사인 동.서재이다. 성균관 강당인 명륜당 앞 마당 동.서쪽에 회랑처럼 나란히 서 있는 건물로 각각 앞면 18칸으로 총 28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은 명륜당 마당 반대쪽을 향하고 있다. 명륜당 방향에는 국왕을 모시고 공식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회랑을 만들어 놓고 있으며, 생활공간인 바깥쪽 방향으로는 반칸씩 툇마루를 달아 놓았다. 한옥 건물의 작은 방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유생들의 생활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동.서재 건물은 한양에 성균관이 처음 세워졌던 1398년(태조7)에 세워졌고,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6년(선조39)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성균관 동.서재에는 진사나 생원에 합격한 후 입학한 상재상과 ..

[성균관] 명륜당(明倫堂), 유학을 가르치던 강당

성균관 명륜당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문묘)에서 교육을 담당하던 공간의 중심이 되는 강당 건물이다. 성균관은 서원의 건물배치에서 제향공간인 대성전을 앞에, 교육공간인 강당건물을 뒷편에 배치하는 전묘후학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는 데 이는 평지에 터를 잡았기때문에 위상이 높은 대성전을 앞쪽에 두었기때문이다. 지방 향교도 성균관의 건물배치와 격식을 따랐는데, 대부분 경사진 언덕에 터를 잡았기때문에 대성전이 뒷편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으며, 평지에 자리잡은 큰 규모의 향교인 전주향교, 나주향교, 경주향교 등이 전묘후학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 성균관에는 전국의 진사, 생원 중 200명 한도로 엄격하게 선발하여 기숙사인 동.서재에 머물고 공부하였다고 한다. 명륜당은 조선을 ..

담양 수북학구당, 진사를 많이 배출한 지역민들이 건립한 조선시대 중등교육기관

담양군은 광주광역시 북동쪽에 위치한 군으로 주변에 크고 작은 산들이 있으며 호남지방의 큰 강인 영산강이 발원한다. 조선시대 담양도호부와 창평현이 합쳐서 오늘날 담양군을 이루고 있으며, 영산강과 지천 주변으로 넓은 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있어서 경제적으로 풍족한 고장이었기때문에 호남지역에서도 대표적으로 양반문화가 발달되었던 곳이다. 담양에는 소쇄원을 비롯하여 부유층들이 조성한 크고 작은 정자와 원림들이 많이 남아 있다. 반면에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았던 서원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다른 지역에서는 많이 볼 수 있는 사설교육기관이었던 학구당이 몇곳 남아 있다. 담양군 수북면 병풍산(해발 822m) 남쪽 자락에는 조선시대 사설 중등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수북학구당이 있다. 이곳은 조선 중기 성..

장성 고산서원, 구한말 성리학자 기정진을 모신 서원

전남 장선군 진원면 면소재 가까운곳에 위치한 고산서원 구한말 대표적인 유학자였던 기정진을 모신 서원이다. 기정진은 순창출신으로 구한말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로 서경덕.이황.이이를 계승한 정통 성리학의 대가로 일컬어진다. 구한말 세도정치체제에서 잠깐 벼슬에 나간적이 있으나 일생의 대부분을 호남지방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는데 보냈다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중국 송나라와 조선의 정통 유학을 연구했으며 '납량사의', '정자설', '이통설'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장성 고산서원은 일반적인 서원과는 달리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서원으로 모셔진 인물 또한 기정진과 그의 제자들이다. 서원의 건립은 조선후기 영.정조대에 들어서면서 서원의 무분별하게 설립되면서 그 수가 급격히 늘어나서 사회문제가 되었기때문에 그 이후 서원..

장성향교, 옛 장성도호부 공립교육기관

장성군 장성읍 성산리에 소재한 장성향교는 조선시대 장성도호부 공립교육기관이다. 장성향교는 장성읍 소재지에서 약간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장성읍 소재지가 일제강점기에 호남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기차역과 가까운 현재의 위치로 옮겼기때문이다. 원래 장성도호부 관아는 향교에서 800여m 떨어진 성산초등하교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장성읍 지역에는 장성현이 있었고 남쪽에 진원현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지역이 피폐해져서 2개의 현을 합쳤다고 한다. 이때 장성향교와 진원향교가 합쳐져서 오늘날의 장성향교가 되었다고 한다. 병자호란 이후 내류지역의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장성군 북쪽에 입암산선을 쌓고 읍치를 성산으로 옮기면서 향교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현재의 향교 건물 또한 이때 세워진 것..

장성 필암서원(사적242호), 호남 제일의 사액서원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소재한 필암서원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하서 김인후(1510~1560)을 모시기 위해서 1590년(선조23)에 세워진 서원이다. 전북 태인의 무성서원과 함께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영산강 중류지역 양반사회의 중심이 되었던 서원이다. 서원은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을 제사를 모시는 기능과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으로서 기능을 갖고 있는데 필암서원은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이 더 중시되었던 서원이다. 처음에는 장성읍 기산리에 서원이 세워졌으나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인조대에 다른곳에 옮겼으나 수해를 입어 1672년(현종13)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1659년(효종10)에 '필암'이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구리 동구릉 재실,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이자 능참봉이 근무하던 곳

구리 동구릉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능을 중심으로 9기의 왕릉이 모여있는 조선 최대의 능역이다. 이곳은 풍수지리설에 따라서 북쪽의 검암산을 주산으로 태조의 건원릉을 모셨으며, 그 후 문종, 임진왜란을 극복한 선조, 조선후기 중흥기를 마련한 영조를 비롯하여 현종, 헌종, 효명세자로 불린 추존왕 문조 등의 능이 조성되어 있다. 동구릉은196ha의 넓은 면적에 9기의 왕릉이 모여 있기때문에 원래는 각 능마다 정자각 앞에 능지기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인 수복방을 두고 있었으나, 구한말을 거치면서 입구의 재실에서 그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실은 원래 무덤이나 사당옆에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지은 집을 말하며 삼국시대 시조묘나 신궁제도에서 그 기능이 유래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유학이 사회전반의 지배..

서울 인왕산 국사당과 선바위, 서울에 남아 있는 전통신앙 관련 사당

국사당(國師堂)은 국수당이라고도 부르는데 마을 뒷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는 동신을 모시는 마을 제당이다. 국사는 한자로 國師로 표기하는 하지만 한자에 담긴 뜻과 같지 않고 단순히 한자로 기록하기 위해 음을 취한것일 뿐이다. 실제로는 국사당이라는 말보다는 국수당, 국시봉, 국수봉 등 다양한 형태의 발음으로 나타난다. 국사당은 우리나라 중서부 해안지역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천신이 하강한 장소라는 의미의 천신사상과 관련되어 있으며, 산신당이나 서낭당 등 신당보다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그 위상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 남아 있는 전통신앙과 관련된 사당인 인왕산 국사당은 원래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선바위가 있던 인왕산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산에 국..

안동 화천서원, 하회마을 부용대 아래 겸암 류운룡을 모신 서원

안동 하회마을 건너편 낙동강 12경 중 하나인 부용대 아래에 위치한 화천서원은 서애 류성룡의 형인 류운룡을 모신 서원이다. 비교적 늦은 시기은 조선후기 정조대에 세워진 서원으로 당시 서원은 교육기능보다는 제사 기능을 중시하여 강학공간을 크게 짓지 않는데 비해 화천서원은 조선 중기의 교육기능 중심 서원과 비슷한 규모로 지어졌다.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강당과 주사만 남아 있던 것으로 1996년에 복원하였다. 서원건물은 대부분 최근에 지은지은 것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낙동강 명승인 부용대와 인근에 있는 옥연정사와 더불어 하외마을 양반들이 후학양성을 위한 세웠던 입지조건과 배경에 의미를 갖는 서원이다. 겸암 류운룡은 서애 류성룡의 형으로 당대에는 퇴계 이황의 문인이자 ..

[성균관] 전사청과 수복청,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으로 유생들이 강당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기숙사인 동.서재에 숙식하면서 공부하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공자와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중심으로 제사를 올리는 제향공간으로서의 역활도 아주 중요했다. 이는 지방의 중등교육기관인 향교나 사설교유기관 역할을 했던 서원도 비슷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로 성균관의 원래 명칭은 공자를 모신 사당이라는 뜻으로 문묘(文廟)라 한다. 성균관은 제사를 올리는 제향공간이 앞쪽에 있고,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학공간이 뒷쪽에 위치한 전묘후학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지방의 향교나 서원도 성균관과 비슷한 공간배치를 하고 있지만, 중앙정부에서 운영했던 문묘답게 사당을 관리하고 제사를 준비하던 공간이 대성전 서쪽편에 별도로 ..

[성균관] 대성전과 동.서무 (보물141호), 공자와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문묘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 고등교육기관으로 공식적인 명칭은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문묘(文廟)이다. 중국에서는 국자감, 지방에서는 향교라고 하며 건물의 배치와 기능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성균관은 공자와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제향공간이 앞쪽에 인재들을 양성하고 학문을 논하는 강학공간이 뒷쪽에 배치된 전묘후학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성균관대학에 그 명맥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지금은 매년 봄.가을에 공제를 제사하는 석전제를 지내는 제사기능만 남았다고 할 수 있으며, 전국 유림들의 중심이 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성균관 제향공간의 중심 건물인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해 증자.맹자.안자.자사 등 4대 성인과 공자의 뛰어난 제자들인 10철, 송조 6현, 그리고 우리나라..

파주 교하향교, 옛 교하현 공립교육기관

파주시 교하읍은 고려시대까지는 교하군, 조선시대에는 교하현이 있었던 지역이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두개의 강 사이에 있다고 해서 교하(交河)라는 이름이 붙었던 지역으로 그 범위는 넓지 않지만 한강 하구지역을 지키는 군사적인 요지였기때문에 오랫동안 독립적인 고을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파주시청이 있는 금촌동 서쪽편 지역이 옛 교하현에 속한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관아는 현 교하읍사무소와 교하초등학교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하현 공립 중등교육기관이었던 교하향교는 교하읍에서 약간 떨어진 파주시 금촌동 공릉천변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탄현면 갈현리에 있던 것을 영조대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현재의 향교 건물은 조선후기에 새로 지은 건물로 당시는 향교의 교육기..

파주 용주서원, 조선중기 문신 백인걸을 모신 서원

파주시 월령면 덕은리에 위치한 용주서원은 조선중기 문신인 백인걸을 모신 서원이다. 백인걸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유학자로 동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 조광조의 제자 중의 한명으로 기묘사화 때 큰 화를 입지 않았지만 명종대에 여러 벼슬을 역임하다 을사사화 때 파직되고 이후 유배되기도 했다. 이후에 복직하여 선조때까지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선조때 청백리로 뽑히기도 했으며 학문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율곡 이이와 파주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였으며,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율곡과 함께 파주지역 서원을 대표하여 이지역 유학자인 성수침 형제를 모신 파산서원을 세웠으며, 파산서원에도 같이 모셔진 인물이다. 백인걸은 파산서원에도 모셔져 있지만, 파산서원이 세워진 직후인 1598년에 별도로 조감, 김행, 신제현, 백유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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