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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_향교_사당 156

경기도 광주향교, 남한산성에 있던 광주부 관아에서 설치한 공립교육기관

경기도 광주는 고려 성종때 전국에 설치한 12개 행정구역 중 하나인 광주목이 설치된 지역으로 그 범위는 현재의 광주시,성남시, 서울의 강남지역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한성 백제의 수도가 있었던 지역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이성산성을 중심으로 한강유역의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했던 시기에도 광주호족은 전국의 유력 호족 가운데에서도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지역이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광주목은 인조대에 광주부로, 숙종대에는 광주유수로 승격되었다. 원래 광주의 중심지역은 현재 하남시 춘궁동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병자호란 이후에 관아를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하남시 춘궁동 일대에는 통일신라시대 산성인 이성산성과 고려초기 절터이 춘궁동사지가 있으며, 조선시대 공립교육기관..

파주 파산서원, 조선중기 학자 성수침과 성수종 형제 등을 모신 서원

임진강 남쪽편 파주시 파평면 늘노리에 위치한 파산서원은 조선중기 학자인 성수침과 그의 아들 성혼, 동생인 성수종과 백인걸을 모신 서원으로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 남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에 세워진 다른 서원들과 마찬가지로 이 서원은 파평면 일대를 지나서 임진강으로 흘러드는 눌노천이 내려다 보이는 경치 좋은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 서원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문신인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파주지역 유생들이 선조대에 세웠던 서원이다. 원래의 서원 건물은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으로 불타버리고 현재의 건물은 1966년에 복원한 것이다. 서원은 제향공간인 사당과 강학공간인 강당, 동.서재 등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지금은 사당만 복원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서원에 모셔진 성수침..

경주 양산재, 신라를 건국한 6부촌장을 모신 사당

경주시 탑동 신라시조 박혁거세 탄생설화가 있는 우물제사 유적인 경주 나정 안쪽에는 박혁거세를 왕으로 옹립하고 신라를 건국한 사로6촌의 촌장을 모신 사당인 양산재가 있다. 이 사당은 7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문화재로서 의미가 있는 곳이라기보다는 경주와 신라의 건국을 설명해주튼 장소라 할 수 있다. 양산재는 6부촌장을 모신 사당과 앞쪽에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 건물, 양산재를 관리하는 살림집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사당 건물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 지역은 경주 남산의 북쪽자락에 있는 남산신성 아래의 마을로 신라 사로 6촌 중 돌산고허촌이 있었던 지역으로 보인다. 주변에는 남간사 절터가 있으며, 남쪽으로 경주 포석정이 자리잡고 있다. 신라를 건국한 주체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사로육촌은 알천 북쪽에 위치한 ..

경주 서악서원, 김유신 장군과 최치원, 설총을 모신 서원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 장군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인 설총, 최치원을 모신 서원인 서악서원이다. 이 서원이 처음 세워진 것은 조선 명종때 경주 부윤 이정이 김유신을 모시기 위해 서원을 건립하였으며 지역 유림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설총과 최치원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서원을 세울 때 퇴계 이황이 서악정사라 이름을 짓고 직접 글을 써 현판을 달았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건하였다고 한다. 인조대에 사액서원이 되었고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존속한 서원 중 하나이다. 서악서원이 위치한 서악동은 선두산 동쪽편 자락에 위치한 마을로 경주를 남북으로 흐르는 형산강이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다. 주변에는 신라를 크게 중흥시..

경주 계림세묘와 숭혜전, 신라 김씨 시조인 김알지와 그 후손 중 처음 왕위에 오른 미추왕을 모신 사당

신라는 김씨, 박씨, 석씨가 돌아가면서 왕위를 승계하다가 신라 17대 내물왕(재위 356~402년) 때부터 '마림간'라라는 왕의 칭호를 처음 사용하면서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였다. 신라에 가장 오랜기간 왕위를 세습한 김씨의 시조는 계림에서 금으로된 조그만 궤짝에서 태어났다는 김알지를 시조이며, 그의 7대 후손인 미추왕이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미추왕릉이 있는 경주 대릉원에서 정남방향 담장밖에는 미추왕과 문무대왕,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모신 사당이 있고, 그 앞쪽에는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를 모신 사당이 계림세묘가 있다. 숭혜전은 원래 신라 마지막 임금으로 경주김씨의 실질적인 시조라 할 수 있는 경순왕을 모신 사당이었으나 고종대에 그 기능이 확장되어 김씨로서 처음 왕위에 오른 미추왕, 삼국통일을 ..

경주 양동민속마을, 전형적인 마을서당인 강학당

경주 양동민속마을 입구에서 동쪽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이 마을 여주이씨 집안의 서당인 강학당이다. 마을입구를 오가는 사람들과 넓은 벌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ㄱ'자형으로 앞면 4칸으로 어린학생들이 공부하던 넓은 대청마루 2칸과 양쪽에 온돌방을 1칸씩 두고 있는 구조이며, 건물 왼쪽에 어른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작은 대청마루와 책과 경판을 보관하던 장판각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작은 방이 있다. 서당은 삼국시대 이래로 지방의 호족들이 후세들을 교유시키기 위해서 세운 사립교육기관을 통칭하며, 당나라에서 유학과 문물 등을 많이 받아들였던 통일신라 이후 각처에서 성행하였다고 한다. 대체로 서당은 공립교육기관인 향교나 성균관에 들어가기 전 공부를 하던 마을단위의 ..

경주 양동민속마을, 전망좋은 언덕에 자리잡은 경산서당

경주 양동민속마을에서도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경산서당이다. 경산서당은 헌종대에 회재 이언적의 후손인 이의윤을 배향할 목적으로 세운 서당인데, 원래는 마을 뒷편 안계저수지 안에 있던 것을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조선후기 사설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서원은 대부분 처음에는 후대를 양성할 목적으로 세원 서당에서 출발하여 서원으로 바뀌고, 국왕으로부터 사액을 받는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경산서당이 세워진 조선후기는 전국각지에 서원이 난립하던 시기로, 국왕으로부터 사액을 받기가 쉽지가 않아서 서당의 형식을 계속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당을 제외하고는 건물규모나 배치는 서원과 큰 차이가 없다. 경산서당은 현재 강당, 동재, 삼문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왼쪽편에 관리사로 보이는..

경주 옥산서원(사적154호), 조선중기 문신이자 유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모신 서원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소재한 사적 154호로 지정된 옥산서원은 조선 중종때 문신 회재 이언적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전 서원이다. 옥산서원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1572년(선조5)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지역인사들과 함께 뜻을 모아 세웠으며, 1573년에 선조로부터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옥산서원은 서원의 건축양식이 정형화된 후기의 서원들과는 달리 건물의 배치나 건축양식에 있어서 자유로우면서도 형식적이고 절제된 형식을 반영하고 있다. 건물은 앞쪽에 강학공간, 뒷편에 제향공간을 두고 있는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으며, 서원을 출입하는 길이 있는 방향에 다른 서원에 비해서 넓은 고직사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서원 정문인 역락문을 들어서면 누각건물이 무변루가 있고, 그..

김해 수로왕릉 숭선전과 숭안전, 수로왕과 역대 금관가야 왕들의 위패를 모신 전각

수로왕릉은 우리나라 최대의 성씨인 김해김씨의 시조이자 금관가야을 건국한 수로왕의 능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최대의 성씨답데 그 능역은 상당히 큰 규모를 갖추고 있다. 대체로 유교적 형식을 갖추고 있는 조선왕실의 종묘와 유학자들을 모신 서원의 형식이 혼합되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로왕릉은 원래의 왕릉에 봉분과 문.무인석 등은 조선왕릉의 형식을 적용한 것으로 보이며, 그 옆으로는 종묘 정전에 해당하는 수로왕과 허황옥의 위패를 모신 숭선전, 역대 가락국 왕들의 위채를 모신 숭안전,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과 제기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비슷한 형태로는 박혁거세를 모신 숭덕전, 미추왕릉 앞쪽에 미추왕,문무대왕,경순왕을 모신 숭혜전, 탈해왕릉의 숭신전을 들 수 있다. 수로왕릉 능역은 대체로 삼국유사에 기..

김포 우저서원(牛渚書院), 전형적인 경기지역 서원

수도권 지역에는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서원이 김포에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자 유학자인 중봉 조헌 선생을 모시고 있는 김포 시내에 자리잡고 있는 우저서원이다. 우저서원은 낮은 야산 아래에 한강과 김포평야지대를 바라보고 있는 고풍스러운 서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저서원은 수도권에 소재한 서원이라서 그런지 고종때 서원 철폐령에 의해 제외되었던 서원 중의 하나이고, 규모도 지방의 서원에 비해서는 크지 않다. 우저서원은 조헌선생을 모신 사당과 학생들이 공부하는 강당, 동.서재로만 이루어져 있다. 조헌은 김포출신으로 조선중기의 유학자이자 임진왜란 당시 크게 활약한 의병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명종대에 급제하여 전라도사, 통진현감, 보은현감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관직에 물러난 뒤로는 충청도..

김해향교, 금관가야 중심지 김해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김해도호부 중등교육기관

낙동강하구 넓은 평야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김해는 옛 금관가야의 도읍지로 고려시대 이래로 종3품의 부사가 수령인 김해도호부 설치된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넓은 농토와 함께 조세운송과 물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낙동강 뱃길에서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고을이다. 김해에는 조선초기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김해읍성을 쌓았고, 가까운 곳에 산성인 분산성을 두고 있다. 옛 김해도호부의 관아건물로는 객사 후원과 교육기관인 김해향교만이 남아 있다. 김해향교는 관아가 있던 읍성 북문에서 20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고을 향교와 비슷한 입지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김해향교가 처음 세워진 것은 조선초인 태종대로 화재 등으로 여러차례 이전을 하여 영조대에 현재의 위치에 자라잡고 있다. 김해향교는 앞..

춘천향교, 옛 춘천도호부의 중등교육기관

춘천은 강원도의 도청소재지로 북한강과 소양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고장으로 강원도에서는 보기드물게 넓는 충적평야를 이루고 있다. 춘천에는 청동기시대의 무덤인 고인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청동기시대부터 이 지역의 중요한 세력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에는 한강유역 쟁탈을 위한 각축장으로 고구려의 돌방무덤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 이후에는 대체로 부사가 고을 수령인 도호부가 설치되어 지역의 중심시 역할을 했던 고장이었다. 현재 춘천에는 옛 관아건물로는 고종때 이곳에 이궁을 세울때 만든 출입문인 위봉문과 문루인 조양루만이 남아 있다. 춘천향교는 춘천도호부에서 운영하던 공립 중등교육기관으로 설립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중종때인 1520년에 크게 중건하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안성 양성향교, 옛 양성현 관아의 중등교육기관

양성현은 안성시 양성면 일대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때에는 서복홀, 신라 경덕왕 때는 적성이라 불렀다고 고려초부터 양성으로 고쳤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개국초부터 현감이 고을 수령인 양성현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 안성군과 통합되었다. 고을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편으로 양성향교를 제외하고는 옛 양성현 관아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인근에 덕봉서원이 있다. 조선시대 중등교육기관이었던 양성향교는 양성현 관아가 있었던 양성면 소재지에서 1km정도 떨어진 낮은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 향교는 비교적 늦은 시기인 1530년(중종25)에 세워졌으며, 조선후기에 1774년(1774)에 중창되었다. 앞쪽에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뒷편에는 공자와 선현들을 모시는 대성전을 두고 있다. 현재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가..

안성 덕봉서원, 숙종대 문신 오두인을 모신 경기지역을 대표하는 서원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에 소재한 덕봉서원은 조선 숙종대에 정치적 사건인 기사환국으로 죽은 오두인을 기리기 위해서 세워진 서원이다.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손되지 않은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경기도를 대표하는 서원이라고 할 수 있다. 숙종대에 창건된 덕봉서원은 창건된 해에 숙종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건물은 강당인 정의당과 사당이 덕봉사우가 일렬로 배치된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인 정의당은 정조18년(1794)에 중수된 것이라고 하며, 나머지 건물들은 대체로 최근에 지어진 건물들이다. 경기도에 소재한 다른 서원과 마찬가지로 건물의 규모가 단촐한 편이로,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보다는 제사를 올리는 사당의 성격이 강한 조선후기에 세워진 서원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

안성향교, 안성군 관아에서 설치한 중등교육기관

안성시 명륜동에 소재한 안성향교는 조선 중기 중종 27년(1532)에 처음 지어졌으나 특별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없고 일제강점기인 1932년과 1980년대에 크게 중수하였다고 한다. 안성 시가지와 평야지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세워진 이 향교는 앞쪽에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뒷쪽에 제향공간인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고 있다. 건물들은 그 연대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앞쪽에 앞면 11칸짜리의 큰 2층 누각건물 설치해 놓고 있는 등 독특한 건축양식과 짜임새 있는 공간구조를 하고 있다. 명륜당이 앞면5칸, 대성전이 앞면3칸으로 경기지역의 향교 중에서는 건물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안성군은 조선시대 종4품인 군수가 고을수령인 중간규모의 고을로 현재 안성시 중심부를 중심으로 남쪽과 서쪽..

안성 죽산향교, 조선시대 죽산도호부 중등교육기관

죽산향교는 안성시 죽산면 소재지 뒷편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시대 중등교육기관이다. 죽산향교는 조선초인 태종 13년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하며, 여러차례 중수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죽산향교가 소속되었던 죽산도호부는 종3품 부사가 고을 수령이 큰 고을이었기때문에 원래는 현재보다 큰 규모였다고 하며, 임진왜란으로 현재의 위치로 옮길때 그 규모가 작아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앞쪽에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뒷편에 제향공간인 대성전과 동.서무가 위치한 전학휴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조선후기 지방의 교육기능이 서원으로 옮겨짐에 따라 제향을 중심으로 그 기능이 바뀐 것으로 보이며, 현재도 대성전의 규모는 큰데 비해서 강학공간인 명륜당은 작은 규모를 하고 있으며 유생들이 기숙사인 동.서재는 남아 있지 않..

논산 돈암서원(사적383호), 김장생을 모시는 기호지방을 대표하는 서원

논산 돈암서원은 조선 중기 유학자로 기호학파를 대표하는 김장생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곳으로 충청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이다. 1660년(현종1)에 사액을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돈암서원은 보물로 지정된 강당 건물인 응도당이 출입문 왼쪽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출입문 정면에 강학공간인 또다른 강당인 양성당,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 양성당 왼쪽편에 장판각과 정의당이, 오른편에는 고직사가 배치되어 있고 뒷편에 사당인 유경사를 두고 있는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사당에는 김장생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인 김집,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과 송준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원래 돈암서원은 인근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지대가 낮고 홍수때 물이 잠기는 경우가..

논산 노강서원(魯岡書院), 조선후기 당파 소론의 영수 윤증을 모신 서원

충남 논산시 광석면 오강리에 위치한 노강서원은 조선후기 당파 중 소론의 영수로 불리는 윤증이 모셔진 서원이다. 원래 노강서원은 인조대에 동부승지.이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병자호란 당시 사간으로 척화를 주장했던 윤황을 모시기 위해 1675년에 김수항의 발의로 세워졌으고 1682년(숙종8)에 '노강'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717년(숙종43)에 당쟁의 결과로 사액이 철거되었다가 1781년(정조5)에 회복되었다. 노강서원은 이후 윤문거를 비롯하여 윤선거, 윤증 부자가 추가로 배향되었고, 소론의 영수 윤증을 모신 서원으로 지역에서 영향력이 있는 서원으로 발전하여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되었다. 소론의 영수로 알려진 윤증은 윤선거의 아들로 원래 송시열의 제자로 학문이 돋보였던..

논산 모선재(慕先齋), 조선중기 유학자 김장생의 선조를 모시기 위한 재실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는 조선중기 기호지방 유학자를 대표하는 사계 김장생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모시기 위한 재실인 모선재(慕先齋)이다. 재실은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지은 한옥으로 전통 한옥 건물 중 현재까지 많이 남아 있는 형태 중 하나이다. 이 재실은 18세기에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인근에 있는 사계 김장생을 모신 돈암서원이 지어진 이후에 그의 조상들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의 민도리집 한옥으로 오론쪽 1칸은 부엌, 가운데 2칸은 온돌방, 왼쪽 1칸은 대청마루를 하고 있으며, 앞쪽에 툇마루를 설치하고 있다. 건물 왼쪽에 앞편 3칸의 방과 부엌으로 이루어진 별도의 건물이 있고, 출입문 솟을대문 양쪽은 광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보물 1569호), 노강서원 강당과 함께 기호지방을 대표하는 서원 건축

돈암서원은 율곡 이이 선생의 제자로 조선중기 유학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기호학파를 대표하는 김장생을 중심으로 김집, 송준길, 송시열의 위패를 모시기 있는 서원으로 구한말 서원철폐령 때 살아남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로 노강서원과 함께 기호지방을 대표하는 서원이다. 원래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가 경회당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던 곳에 김장생이 양성당을 세원 후학을 양성하던 서당이었던 곳에 후학들이 그의 학문적 업적을 기려 1634년(인조12)에 건립한 서원이다. 보물 1569호로 지정된 돈암서원 강당인 응도당은 서원에서 유생들이 학문을 논하던 강학공간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사당과 나란히 배치된 다른 서원이나 향교와는 달리 직각방향으로 틀어서 배치되어 있다. 이 건물은 1880년에 돈암서원이 현재의 위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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