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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103

[중앙박물관 인도.동남아실] 인도 라자스탄 미술

인도는 남부 아시아에 위치하고 있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동아시아와는 다른 오히려 중동이나 서구와 가까운 형태의 예술적 전통이 있어 보인다. 국립 중앙박물관에는 인도 회화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도 북부지역의 라자스탄의 회화작품들을 보여 주고 있는데, 동아시아 회화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서양미술에 가까운 느낌을 주고 있다. 이 지역에는 16세기 이후 유럽이나 이슬람국가와의 교류가 활발해 지면서 문화적 교류가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무굴제국 등과 함께 인도의 세밀화 전통을 세웠다고 한다. 전시되어 있는 작품을 보면 17~18세기 유럽의 회화작품과 그 색상에는 그리는 방식이 비슷한 느낌이다. 라자스탄과 파하리 미술 라자스탄은 북인도의 서부와 중부에 걸쳐 있으며, 파하리는 라자스탄 북쪽에 위치한 히말라야 산맥..

중앙박물관 2012.05.18

[중앙박물관 인도.동남아실] 인도와 히말라야 지역의 불교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간라라지역 제외)의 불교 유물들이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관에 전시되어 있다. 인도는 불교이 발생지로 많은 유적지들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많은 유물 또한 출토되고 있는 것 같다. 이 곳에는 불교의 전래과정을 전달하기 위해 간다라 미술 위주로 전시된 것으로 보이며, 인도의 불교 유물은 많지 않은 수가 전시되어 있다. 주로 불상이 전시되어 있으며, 카슈미르와 인도 동부의 필라지역에서 출토된 불상들로 불교의 전성기인 굽타왕조 이후의 것들이 전시되어 있다. 불상은 간다라지역에서 처음 생기기 시작하여, 인도 동부지역으로 역전파된 것으로 보이며, 그 조각 수법이 상당히 섬세하고 화려하다. 히말라야 지역의 불교조각 히말라야 산맥 주변에 위치한 카슈미르, 라다크, 네팔, 티베트, 부탄지역에서는 인도..

중앙박물관 2012.05.18

[중앙박물관 인도.동남아실] 크메르미술, 앙코르와트로 잘 알려진 문화

크메르는 왕코르와트로 유명한 동남아시아 캄보디아에서 존속했던 왕조이다. 이 왕국은 당시 태국,베트남,말레이지아의 일부를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했고, 그 화려함은 힌두교사원인 앙코르와트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왕국의 수도 앙코르에는 앙코르와트를 중심으로 힌두교, 불교 사원과 궁궐 건물을 비롯하여 도시를 구성하였던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관에는 많지는 않지만, 크메르 문화를 간략게나마 이해할 수 있도록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크메르인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국교였던 힌두교와 민간신앙이었던 불교 유물들을 주로 전시하고 있다. 힌두교 유물들은 말로만 듣던 앙코르와트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주며, 불상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아시아의 불상들고 다른 색다른 모습의..

중앙박물관 2012.05.18

[중앙박물관 인도.동남아실] 베트남 고대문화와 도자기류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관에는 많지는 않지만 동남아시아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베트남 지역의 도자기류와 캄보디아 지역의 앙코르와트 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규모가 상당히 큰 국가로서 많은 유물들이 있었겠지만, 중국과의 교류를 보여주듯이 우리나라 고려청자와 조선 백자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여러 도자기류들이 있다. 베트남 도자기는 우리나라와는 약간 다른 느낌을 주고 있으며, 특히 동물의 모습을 형상화한 도자기를 많이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의 고대문화 베트남의 고대 문화 중에서 잘 알려진 것은 동선 문화이다. 이는 기원전 4세기~기원후2세기 무렵 베트남 북부 지역에서 형성된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청동기문화이다. 그 명칭은 1924년 ..

중앙박물관 2012.05.17

[중앙박물관 중국실] 중국 신석기 문화 유물인 옥으로 만든 예기

국립중앙박물관 3층 아시아관에 전시된 중국 관련 유물들은 초기 신석기 문화 유물들은 저장성 양저에서 발견된 옥으로 만든 예기들과 대표적 신석기 문화인 앙소문화 유물일 항아리 몇점이 있다. 예기는 고대 중국에서 귀족들이 종묘와 궁궐 등에서 의식을 거행할 때 사용하는 도구로 옥예기는 신석기시대 말기 씨족사회가 출현할 당시부터 사용되어 오늘날 까지 사용하고 있다. 중국 역사와 문화를 관통하는 종묘와 왕실 의식의 유물인 예기는 중국은 물론 한반도에서도 고대국에서 조선시대를 거쳐 현대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권력의 상징 - 예기 예기란 중국 고대 귀족들이 종묘와 궁실 등에서 의식을 거행할 때 사용한 도구이다. 사용자의 지위, 신분, 권력에 따라 엄격한 제한을 두어 사용되었으며 옥, 청동, ..

중앙박물관 2012.05.11

[중앙박물관 중국실] 고대 중국의 청동기

고대 중국에서 예기로서 역할을 했던 청동기로 곡식 등을 담는 그릇, 술잔, 솥 등이 있다. 이 것들은 대부분 실생활에 사용되었던 도구는 아니고 제사를 지내는 예기로서 의미를 갖고 있으며, 그 전통은 현대까지 내려와서 종묘제례 등의 제사에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당시의 이런 목적의 예기가 솥(鼎)을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로 전국 각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고대 청동기 중국의 고대 청동기는 하대부터 제작되었으며 몇천년이 지난 지금도 그 광택이 수려하여 당시의 수준 높았던 주조 기술을 알 수 있다. 상주 시기에는 예기로써 신분에 엄격한 제한을 두고 사용되어 이기라고도 하였으며, 진한대 이후 점점 쇄퇴하였다. 그릇 안쪽에 새겨진 금문을 통해 역사적 사실과 제작자의 이름등을 알 수 있다. 곡식담는 그..

중앙박물관 2012.05.11

[중앙박물관 중국실] 고대 중국의 도용, 불교 생활

도용은 중국에서 죽은이와 함께 묻는 인물.동물의 상을 말하며 명기의 일종으로 흙으로 빚어서 만든 것을 말한다. 이는 현실의 사람이나 가축 등을 본 떠 만들어 죽은이를 저승으로 호종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고대 사회에서 순장의 풍습이 없어지고, 그 자리를 차지한 도용은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토기의 형태로 많이 전해져 내려오며 예술적으로 우수한 작품들을 많이 남겨놓고 있다.중국 도용 중 대표적인 것이 진시황의 능에서 발견된 수많은 병사들이 대표적인 도용이라 할 수 있다. 전한시대에는 진시황의 것과 비슷한 형태의 것들이 많이 만들어졌으며, 북조에서는 조형미가 풍부한 도용들이, 당대에서는 귀족생활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당삼채로 만들어진 도용들이 있다. 고대 중국인의 생활 - 명기와 도용 중국은 전국시대 경제와..

중앙박물관 2012.05.11

전흥법사 염거화상탑(국보104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탑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국보 104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 고성 염거화상의 승탑이다. 이 승탑은 팔각집 모양을 하고 있으며 기단부에는 안상과 연꽃무늬를 새겨서 장식하고 있으며, 기와지붕을 얹은 모양을 하고 있는 팔각집모양의 탑신에는 사천왕상과 문을 번갈아 가면서 새겨놓고 있다. 이 승탑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승탑으로 후대에 만들어진 많은 승탑들이 이 탑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이 탑이 발견되었다고 전해지는 남한강변 절터에 뛰어난 승탑들이 많이 남아 있다. 염거화상(?~844)은 선종 산문 중 하나인 가지산문의 2대선사로 도의선사의 제자이다. 주로 설악산에 머물면서 선을 널리 알리는데 힘썼다고 한다. 이 승탑은 원주 흥법사 절터에 있었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른 없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서울..

[중앙박물관 고려실] 저무는 고려 왕조

고려는 공민왕 사후에 극단적인 반동정치가 있었다. 반동세력은 신흥강국인 명을 적대시하고 원을 가까이하는 시대착오적인 정치를 하였으며,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등을 극복하는데 큰 기여를 한 이성계, 최영 등의 세력이 국민의 지지를 받는 형국이 되었고, 새로이 등장한 신진사대부들은 이들고 힘을 합쳐, 토지제도 개혁 등을 통해 권문세가의 힘을 크게 약화시키고 조선 건국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저무는 왕조 공민왕이 피살되자 극단적인 반동 정치가 펼쳐졌다. 10살의 우왕을 즉위시킨 세력은 신흥강국인 명나라를 적대하고 명나라에 밀려난 북원과 교섭하는 시대착오적 외교를 펴는 한편, 폭력적 토지 겸병을 자행하며 정몽주 등 비판적인 신진들을 유배하는 전횡을 저지렀다. 이러한 가운데 왜구와 홍건적의 토벌로 민중의 여망을 한몸..

중앙박물관 2012.02.21

[중앙박물관 고려실] 개혁군주 공민왕

고려말 공민왕은 대표적인 개혁 군주로 원나라가 쇠퇴해자 친원파를 숙청하는 한편 영흥 일대를 회복하는 등 반원 정책을 추진하고 여러 제도적인 면을 개혁하였다. 물론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고려는 멸망하게 되었지만, 그의 정신은 후대 사람들이 높이 사서, 그의 신당이 조선 종묘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이는 조선의 건국이 후손이 없었던 공민왕을 승계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원나라 노국공주와의 깊은 부부애로 인해서 그 초상화는 노국공주와 함께 그려져 있다. 또한 공민왕의 지원을 받은 목은 이색을 중심으로 한 성균관 학자들의 성리학에 대한 연구는 후에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개혁군주 공민왕 원나라가 정치 불안 등으로 쇠퇴해 가자 고려 공민..

중앙박물관 2012.02.20

[중앙박물관 고려실] 고려시대 성리학의 도입

고려시대 원의 간섭기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유물로는 금속활자와 단군신화를 기록한 삼국 유사를 들 수 있고, 고려말 이후 우리나라의 정신 세계를 이끌어 온 성리학 또한 이 시기에 도입되었다. 성리학은 원나라에서 왕을 모시면서 오랜 기간 머물렀던 관료이자 학자인 안향.백이정 등이 관련 서적을 국내에 소개하였고, 충선왕과 함께 원나라에 간 이제현이 중국의 성리학자들과 학문적이 교류를 하면서 많은 학문적인 깊이를 더했다고 한다. 당시 초강대국 원나라를 중심으로 많은 교류가 있었기때문에 원나라 간섭하의 고려정권이었지만, 큰 영향을 미친 많은 학문적.기술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성리학의 도입 원나라에서 왕(충렬왕.충선왕)을 모셨던 안향.백이정 등의 관료들은 주자성리학 관련 서적들을 가지고 귀국함으로써 ..

중앙박물관 2012.02.19

[중앙박물관 고려실] 고려 시대, 원나라 간섭기

몽골의 침입으로 무신정권이 붕괴된 이후 고려는 80여년간의 원나라 간섭기를 보낸다. 몽골과의 투쟁, 일본 원정 등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지만, 팔만대장경을 제외하고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유물.유적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그린 당시 고려.원 연합군의 전투그림, 원나라 도자기 등이 당시의 모습을 전해주는 유물로 볼 수있다. 원간섭 하의 고려 무신정권이 붕괴된 후 개경으로 천도한 고려는 이후 80여년간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다. 고려국왕은 어린 세자 시절을 원나라의 대도에서 보내고 원나라 공주와 혼인해야 했다.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고려는 국왕의 호칭을 비롯한 각종 관제가 격하되었고, 왕위 교체에 대해서도 원나라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러나 원 간섭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일반 백성들이었..

중앙박물관 2012.02.18

[중앙박물관 고려실] 고려의 불교 문화, 팔만대장경

우리나라에서 고려를 대표하는 유물을 꼽으라고면 누구나 주저없이 대몽항쟁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팔만대장경과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심경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불교가 흥성했던 고려에서 불경과 인쇄문화는 밀접합 관계가 있었으며, 최초의 대장경 인쇄본을 비롯하여 많은 불경을 유물로 남겨 놓고 있다. 그 중 팔만대장경은 거란을 물리쳤던 경험을 바탕을 대몽항쟁기간 16년동안 다양한 계층의 참여로 만들어진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팔만대장경과 대몽항쟁 13세기에 들어 중국 대륙의 새로운 강자가 된 몽골이 무리하게 고려를 압박해오자 최씨 무신정권은 전쟁을 불사하며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백성들은 강화도 정권을 떠 받쳐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치열하게 몽골군에 맞서 싸웠다. 전쟁과정에서 약 2세기 ..

중앙박물관 2012.02.14

[중앙박물관 고려실] 고려의 불상, 불사와 발원

고려는 불교가 크게 흥성한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통일신라와는 달리 불상, 석탑 등은 화려한 문화재를 남겨 놓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신앙의 중심이 탑이나 불상 같은 상징물에서 불경 같은 것으로 변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고려시대에는 지방의 호족들이나 향리들을 중심으로 거대한 철불상을 제작하거나 사찰을 건립하는 등 많은 불사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경주 중심의 통일신라와는 달리 지방적인 색채가 강한 투박하면서도 지역색이 강한 토속적인 불상들이 많이 제작되면서 고려적인 특징을 갖는 많은 불교 유물들을 남겨 놓고 있다. 고려의 불상 국가와 왕실의 후원 속에서 성장한 고려시대의 불교는 민간에서도 현세적인 기복 신앙으로서 크게 융성하였다. 불상은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불교 예술품으로써 불화와 ..

중앙박물관 2012.02.13

[중앙박물관 고려실] 고려시대 무신정권, 불교 결사 운동

고려시대 중기 이후에는 무신정변으로 인해서 내부적으로 상당기간의 혼란기를 보내다 최충헌이 혼란을 종식시키고, 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무신 정권기의 혼란을 종식한 최씨정권은 이전에 비해서 유학자들을 발굴하여 행정능력을 갖춘 문신들도 과거를 통해서 등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불교 개혁 운동인 불교 결사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어 지눌을 중심으로 수선결사 운동과 무신집권층의 후원하에 백련결사 운동이 일어났으며 선종의 성격이 수선결사 운동은 오늘날 불교의 주도세력인 조계종의 성립으로 나아갔다. 무신정권 12세기 들어 고려사회는 귀족적인 문화가 무르익는 한편의로 농민의 유망과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등이 이어지며 그 모순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문벌을 견제하려던 의종이 측근에 치우쳐..

중앙박물관 2012.02.12

[중앙박물관 고려실] 고려시대 거란, 여진과의 관계

거란은 고려와 비슷한 시기인 10세기 초에 일어난 북방민족으로 요나라를 건국하였다. 거란은 우리나라 남북국시대의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세력범위을 중심으로 국가를 형성하였으며, 송나라 및 고려와 상당 기간의 투쟁기와 평화시기를 거친 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멸망하였다. 금나라는 거란을 멸망시켰으며, 중국 대륙에 진출하여 북송을 멸망시킨후 상당 기간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다 몽골에 멸망하였다. 거란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로 국보로 지정된 초조대장경 인쇄본이 있으며, 거란에서 만든 청동거울이 많아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금나라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로 함경도 지역에 금나라인들이 세운 비석이 있으며, 다양한 도자기들 또한 남아 있다. 거란과의 관계 10세기 초 내몽골의 시라무렌 강 유역에서 일..

중앙박물관 2012.02.10

[중앙박물관 고려실] 고려시대, 중국 송나라와의 교류

고려시대 중국에서는 오대십국을 통일한 송나라가 있었고, 북방에서는 거란,여진,몽골이 연이어서 크게 번성하였다. 고려와 송과의 관계는 북방 민족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발한 상호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유물로는 신안 보물선 등에서도 나타났듯이 송에서 만든 도자기류가 많은 것으로 보이며, 인쇄관련 서적류, 청동 거울 등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송(宋)은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와 통교하였다. 고려는 송으로부터 각종 서적과 예악.의학기술 등을 들여와 고려의 인쇄문화와 의료 및 각종 학문.사상과 의례를 발전시켰다. 뿐만 아니라 도자기.비단.약재.악기.차.향료.상아.물소뿔 등 지배층을 위한 사치품들을 주로 수입하고, 금.은.구리, 인삼.잣, 동물가죽, 마포, 화문석, 나..

중앙박물관 2012.02.10

[중앙박물관 고려실] 삼국사기, 고려의 관료 문벌과 향리

고려는 지방호족이었던 태조 왕건이 건국한 불교중심의 사회였지만, 국가를 움직이는 체제는 유학에 근거한 관료 중심의 사회였다. 강감찬, 윤관 등 고려를 대표하는 장군들도 사실은 문신일 정도로 문신 우위의 사회였다. 문신 우위의 사회를 대표하는 유물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를 들 수 있을 것이고, 각 문벌들의 흔적은 족보 등을 통해서 현재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관료와 문벌 고려시대 관료의 중심은 문신들이었다. 문신들은 정치와 일반행정은 물론이고 전쟁 시의 최고 지휘관도 도맡았다. 거란을 물리친 강감찬.강민첨이나, 표청의 반란을 진압한 김부식.윤언이 등은 모두 문신들이었다. 문신으로 출세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5품 이상 고위 관료의 자식은 음..

중앙박물관 2012.02.09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실] 천자로 불린 고려왕, 고려 인종 장릉 출토 유물

고려가 살았던 시기는 몽골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북방 민족의 요.금과 중국 민족의 송, 그리고 서역의 많은 나라들이 존재했으며, 서로 견제 및 협력관계가 형성되던 시기였다. 고려왕은 형식상 조공관계를 유지했지만, 국제관계의 역학 구도에 따라서 왕이라 칭하기도 하고 천자라 칭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역사 유적 또는 유물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가 고려 역사를 대표하는 유물 또는 기록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도 조선초에 역사에 대한 세탁이 한번 있었던 관계로 그런 현상이 생긴것으로 보인다. 국립 중앙박물관에는 고려 왕에 대한 대표적인 유물로 인종의 무덤인 장릉에서 출토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천자로 불린 고려 왕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 몽골이 일어난 13세기까지 동북아시아는 고려와 정통 중국 왕조인 ..

중앙박물관 2011.12.06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실] 호족의 시대와 후삼국 통일

통일신라 말기는 계속된 왕위쟁탈전으로 인해 극도로 혼란스러운 사회였으며, 중앙정부 통제력의 약화로 지방에는 다양한 호족세력이 등장한 시절이었다. 고려가 건국하기까지 약 100년에 가까운 세월이 이 시기에 속하지면, 워낙 혼란스러웠던 시절이었던 까닭에 많은 유물이 남아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역사기록에는 많은 사실들이 적혀 있으나, 유물로는 딱히 이 시대를 대표할 만한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고려태조의 후삼국 통일 고려는 한때 후백제에 비해 다소 열세였으나, 태조 왕건이 불교계와 6두품 출신 지식인을 우대하고, 혼인정책 등으로 크고 작은 호족들을 적극 포섭하면서 점차 형세를 역전시켜갔다. 특히 "백성으로부터 조세를 거둘 때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백성들이 바쳐야 할 세금을 크게..

중앙박물관 2011.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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