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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67

달성 도동서원(사적 488호), 정통 성리학을 계승한 유학자 김굉필을 모신 조선 5대 서원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낙동강변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사적 488호로 지정된 도동서원이다. 이 서원은 조선중기 유학자 김굉필을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조선시대 5대 서원 중 하나로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 남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원래는 현풍현 비슬산에 세워졌던 것이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리고 1604년(선조 37)에 현재에 위치에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국가에서 '도동'이라는 사액을 내리고, 주변의 땅을 이 서원에 하사하였다고 한다. 김굉필은 조선전기 성리학자로 조선중기 이후 조선사회를 이끌어온 사림세력의 태두라 할 수 있는 김종직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1498년 무오사화로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되었을 때 조광조에게 학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조선시대 사림세력이자 유학자를 대표..

경남 고성 수림서원, 고려 개국공신 배현경을 비롯한 달성배씨 조상들을 모신 서원

경남 고성군에서 함안이씨의 위계서원, 허씨의 도연서원, 달성배씨의 수림서원이 모여 있는 마암면의 서원 중 고려 개국공신인 배현경을 비롯하여 달성배씨 조상들을 모시고 있는 수림서원이다. 이 서원은 구한말인 철종7년(1856)에서 새워진 서원으로 배향기능을 위주로 한 문중재실을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서원이다. 서원은 원래 학문적 업적이 뛰어난 사람의 업적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는 목적으로 그 학풍을 따르는 제자나 지역 유림들이 뜻을 설립되었는데, 조선후기 들어서면서 학문을 계승한다는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조상을 모시는 사당과 문중인사들이 모이는 장소로서 서원이 남설되었으며 그 폐해가 크서 영조대 이후에는 많은 규제가 있었고, 구한말에는 대원군이 전국 대부분의 서원을 철폐하였다. 이곳 수..

경남 고성 위계서원, 이인형을 비롯한 함안이씨 조상들을 모신 서원

경남 고성군 마암면에는 함안이씨의 위계서원, 허씨의 도연서원, 달성배씨의 수림서원이 가까운 거리에 자리잡고 있다. 이 세곳의 서원은 모두 지역 유림들이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 아니라 문중에서 뛰어난 분을 모신 후대 양성이 아닌 배향을 목적으로 세운 서원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 구한말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대원군의 서원철페령으로 훼철되었다가 복원된 서원이다. 임진왜란 유적지인 당황포와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마암면은 농지가 그리 넓다고 볼 수는 없지만 유력문중에서 세거지로 정할 정도로 경제력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 마암면 석마리에 함안이씨 선조들을 모신 위계서원이 마을 뒷편 조용한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 구한말인 1844년에 세워진 이 서원은 연산군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대사..

대구 달성 도동서원강당사당부장원(보물 350호), 담장이 함께 문화재로 지정된 강당과 사당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소재한 조선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김굉필 선생을 모신 도동서원이다. 낙동강 동안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이 서원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서원 중 하나로 건축물로도 문화재적 가치가 있어서 강당과 사당, 강당을 둘러싼 담장이 보물 35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서원은 선조 원년(1568)에 쌍계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어졌으며,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것을 중건한 것으로 선조 40년(1607)에 선조가 직접 도동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린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제외된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도동서원은 문루인 수월루, 한주문, 강당인 중정당, 사당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 목판을 보관하던 장판각과 서원 관리인 숙소인 ..

대구 달성 이양서원, 청백리 곽인방을 모신 서원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에 소재한 이양서원이다. 대구 인근 낙동강변 경치가 아름다운 현풍면에 있는 김굉필을 모신 도동서원을 찾아 가는 길에 있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서원이다. 조선 세조때 청백리인 곽안방을 모시는 서원으로 조선 숙종때 사당인 청백사에서 출발하여 서원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던 것을 해방 이후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지역유림들이 명망이 높은 학자를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일반적인 서원과는 달리 문중에서 조상을 모시기 위해 설립한 조선후기에 건립된 서원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양서원은 지금은 숲으로 가려져 있지만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서원으로 마을과는 약간 떨어져 있다. 서원의 건물배치는 동쪽에 사당인 청백사를 두고, 서쪽에 강당..

대구 달성 낙빈서원, 박팽년 후손들이 사육신을 모신 서원

낙빈서원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소재하고 있는 서원이다. 이 곳은 사육신 중 한명인 박팽년의 후손들이 정착한 달성군 묘골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낙동강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본래 이곳에는 박팽년을 모신 사당이 하빈사가 있었으며, 현손인 박계창이 사육신이 나타난 꿈을 꾼 후 사육신 여섯분을 함께 제향했으며, 인근에 강당을 건립하여 낙빈서원을 세웠고 1694년에는 숙종으로부터 사액을 받은 사액서원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낙빈서원은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것을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강당만 복원하였다고 하며, 사당인 육신사가 1970년대에 후손들이 집성촌인 묘골에 건립됨으로써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낙빈서원은 후학을 양성하던 서당에서 출발한 초기의 서원들과는 달리 문중에서 ..

안동 병산서원, 서애 류성룡선생을 모신 하회마을 인근 낙동강변에 위치한 아늑한 서원

안동 하회마을에서 낙동강 상류방향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소재한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 선생을 기리기 위해 만든 서원이다. 병산서원은 고려시대부터 이 지역의 교육기관이었던 풍악서당을 1752년 서애 류성룡이 이 곳으로 옮겨오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서애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원래는 학봉 김성일과 함께 도산서원에 위패를 모실려고 했으나 두분의 서열관계로 다툼이 있었으며, 서애 류성룡 선생은 그의 집이 있었던 하회마을 인근 이곳 풍악서당에 사당인 존덕사를 짓고 위패를 모셨고, 학봉 김성일 선생은 임하댐 아래 천전마을 인근에 호계서원을 세우고 위패를 모셨다고 한다. 낙동강변 경치가 수려한 곳에 자리잡은 병산서원은 우리나라의 많은 서원 중에서 도산서원가 함께 그 입지가 빼어난 곳으로..

파주 자운서원과 율곡 이이선생 유적지

파주 자운서원은 율곡 이이 선생과 그 제자인 김장생, 박세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서원으로 원래의 건물들은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과 한국전쟁 등으로 대부분 없어지고, 해방후 유림들이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 과거자료 고증을 통해서 복원한 건물들이라 한다. 건물자체로는 문화재로서 가치는 없지만, 이 곳이 율곡 이이 선생을 비롯하여 그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묘역이 가까이 있기때문에 선생이 태어난 강릉의 오죽헌과 함께 율곡 선생의 유적지로서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자운서원은 앞쪽에 강학공간인 강인당과 기숙사인 동.서재가 있고, 뒷쪽에 사당인 문성사가 배치되어 있는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자연경관이 뛰어나거나 여행객들이 빈번하게 다니는 교통로에 위치한 서원이 아니고, 율곡선생 가족묘..

안동 도산서원, 퇴계 이황선생을 모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원

낙동강변 안동 도산면 토계리에 자리잡고 있는 도산서원은 선조 7년에 건립된 퇴계 이황 선생을 위패를 모시고 있는 한국을 대표하는 서원이다. 선조8년(1575)에 명필 한석봉이 쓴 편액을 국왕이 하사하였으며, 광해군 7년(1615)에 월천 조목 선생을 종향하였다. 퇴계 이황 선생 제자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이 있으며 이들 또한 당대를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문신이다. 처음에는 이 두분도 도산서원에 배향되기로 하였으나, 두분의 서열을 정함에 있어서 지역에서 상당히 논란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서애 류성룡은 하회마을 인근의 병산 서원에, 학봉 김성일은 임하댐 부근의 호계서원에 모셔져 있다. 도산서원은 선현을 모시고 후진을 양성하는 영남 유림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으며 대원군의 서월철폐령에..

한국 민속촌, 옛 강변 풍경과 사람 사는 마을

전통 민속마을을 복원해 놓고 있는 한국민속촌 중심을 흐르고 있는 하천은 큰 하천은 아니지만, 옛사람들이 살았던 강변의 풍경을 어느 정도 재현해 놓고 있다. 큰 강이 흐르는 지역은 전통적으로 농토가 넓고 부유한 지역에 속하는 경우가 많으며, 경치가 빼어난 곳이 많다. 강변 경치 좋은 곳에는 관아에서 설치한 큰 정자가 있고, 지역의 토호들에 세워놓은 크고 작은 정자 또한 지금도 많이 남아 있는다. 또한 선현들을 모시고 제사를 올리며 후학을 양성하던 서원 또한 경치가 빼어난 강변에 세워진 경우가 많다. 용인 한국민속촌에서는 이런 옛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집약적으로 복원해 놓고 있어서 복원한 가옥들을 살펴보는 즐거움과 더불어 강변에 있는 정자에 앉아서 옛 사람들이 느꼇던 한가움을 같이 한번 느껴볼 수 있다. 또..

고택_정원 2011.07.11

한국민속촌, 민속신앙 서낭당과 유교식 사당

한국민속촌은 우리나라 전통마을의 모습을 복원한 곳으로 마을 공동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민속신앙인 서낭당의 다양한 모습을 마을 입구에 잘 꾸며놓고 있다. 예날부터 우리나른 마을 입구에는 질병이나 재해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을 하는 장승을 비롯하여 선돌.돌탑.솟대.당나무.당집 등 다양한 형태로 신앙대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를 매개로 신에게 마을 주민들의 안녕과 삶의 풍요를 기원하였다. 이는 만주,몽골,시베리아,일본 등 동북아시아 지역의 민족에게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물을 상징하는 물새를 장대위에 세운 솟대와 선돌 등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다.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당이 동아시아지역 토착신앙이라고 한다면, 조선사회 신앙의 중심은 조상을 섬기는 제례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유..

고택_정원 2011.06.26

보령 화암서원, 토정비결 저자 이지함 선생을 모신 서원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에 자리잡고 있는 토정 이지함 선생을 모신 화암서원이다. 화암서원이 위치한 곳은 보령시 동쪽 높은 산에서 발원하여 서해안으로 흘러드는 하천을 막은 청천저수지 안쪽편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 서원은 1610년에 이지함의 문인 구계우가 주도하여 건립하였고, 숙종때 화암서원으로 사액되었다고 한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철된 것을 일제강점기에 복원되었다. 원래는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을 청천저수지를 만들면서 1959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토정 이지함(1517~1578년)은 주선 중기의 유학자로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인 서경덕 선행 문하에서 수양했으며, 포천현감.아산현감 등의 관직을 지냈면서 걸인.노약자.기민 등을 구제하였다고 한다. 유학..

포천 화산서원, 백사 이항복을 모신 서원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 나즈막한 화봉산 아래에 위치한 화산서원이다. 이 서원은 조선중기의 명신 백사 이항복의 기리기 위해서 건립한 서원으로 숙종때 국왕으로부터 편액을 받은 사액서원이다. 서원 인근에 이항복 선생의 묘가 있으며, 서울출신인 백사 이항복의 집안에서 아마도 가산면 일대에 근거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사 이항복의 후손들은 조선시대에 많은 정승들을 배출한 집안으로 유명하며 이시영, 이회영 등 많은 인물들이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많은 기여를 했었다. 현재의 화산서원은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17년 지방유림들이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뒷쪽에 사당이 있고 앞쪽에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가 있으며, 강당은 두고 있지 않다. 화산서원이 있는 포천시 기산면은 조선시대 금강산 유람..

포천 용연서원, 한음 이덕형을 모신 서원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에 자리잡고 있는 용연서원은 '오성과 한음' 이야기로 유명한 조선중기 문신 한음 이덕형을 모신 사원이다. 이 서원은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중요 서원 중의 하나이다. 현재의 서원건물은 강당과 사당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서원이다. 원래는 동재.서재를 비롯하여 여러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한국전쟁때 소실되어 사당만 남아 있던 것을 1986년도에 강당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오성과 한음' 이야기를 전해줄려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포천시에는 용연서원과 화산서원이 있으며, 포천시 가산면에 위치한 화산서원은 오성이라고도 불렸던 백사 이항복을 모신 서원으로 용연서원에서 남쪽으로 약 10km 정도 떨어져 있다. 조선시대 금강산으로 가는..

용인 충현서원, 한국민속촌에 세워진 서원

용인 민속촌에 위치한 충현서원이다. 이 서원에는 용인지역에 묘가 있는 포은 정몽주, 병자호란때 삼학사 중 한명인 오달제, 구한말 순국한 민영환과 김석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원이다. 이 서원은 관광단지인 한국 민속촌을 건설하면서, 한국을 소개하는 측면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서원이다. 민속촌 중앙을 흐르는 개천이 내려다 보이는 경치좋은 곳에 위치한 충현서원은 제향기능만이 남아 있었던 경기도지역의 서원과는 달리 명산이나 경치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공부와 휴식이 강조되던 지방 서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민속촌에 소재한 충현서원은 이 곳을 찾는 많은 이에게 서원의 기능과 특징을 잘 보여주기 위해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는 한쪽편 구석에 위치하고 있어서 서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서원과 유학에 ..

용인 심곡서원, 정암 조광조 선생을 모신 대표적인 서원

정암 조광조는 14세때 성리학자 김굉필 문에서 공부를 시작했으며, 과거에 급제한 이후 호조,예조,공조의 좌랑, 홍문관 승지, 부제학 등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유학자 정치를 구현하려는 중종의 신임을 받아서 다양한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 이후 조광조의 개혁에 반감을 가진 중종반정 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세력의 역공을 받은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했다. 정암 조광조는 조선전기와 후기를 구분짓는 역사적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후대에 조선사회를 주도했던 사림세력을 추앙을 받았다. 정암 조광조를 모신 서원은 용인 심곡서원, 서울 도봉서원 등 전국적으로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 용인 수지신도시에 위치한 심곡서원은 그 규모는 크지 않지만, 그의 묘소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 역사적인 중요성으로 인해서 구한말 흥선대원군..

도봉산 도봉서원과 각석군, 서울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서원

서울 도봉산 등산로 입구 계곡에 위치한 도봉서원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서원 중 서울에 소재한 유일한 서원이다. 도봉산 기암괴석과 계곡의 맑은물, 큰 바위 등은 예로부터 명승지로 유명했다고 하며, 중종때 사림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정암 조광조 선생이 이 곳을 자주 들렀다고 하며, 1573년 선조때 조광조 선생을 모시기 위한 서원으로 창건된 사액서원이라고 한다. 서울출신인 백사 이항복 등 저명한 유학자들이 시문을 남긴 유서깊은 서원이다. 도봉서원은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헐린 것을 복원한 것이라 한다. 현재의 서원은 뒷편에 있던 사당만이 남아 있고, 앞쪽에 있던 강당과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는 복원되지 않았다. 도봉서원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건물외 도봉산 계곡의 바위에 여러 문인들이 각석으로 글..

남원 창주서원, 조선중기 문신 노진 선생을 모신 서원

남원 창주서원 조선중기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옥계 노진선생을 모신 서원이다. 조선시대에 서원은 주로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잡고, 향교는 관청이 있는 행정중심지에 있는 것이 보통이나 이 서원은 도심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옥계 노진선생은 경남 함양출신으로 오랜 관직생활을 하면서 처가가 있는 남원으로 옮겨와 살았다고 한다. 노진선생을 모신 서원으로 고향인 함양에도 당주서원이 있었으나, 두개의 서원이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원래 창주서원은 남원시 금지면에 섬진강을 바라보고 있는 지역에 있었던 것 같은데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50년대에 현위치에 새로이 지어졌다고 한다. 서원의 건물은 사당인 명덕사와 강당, 고직사 등의 건물이 있으며, 일반적인 서원과는 달리 서원을 관리하는 사람이 서..

정읍 태인 무성서원, 신라말 유학자 최치원 선생을 모시는 서원으로 호남지역 대표 서원

조선시대 태인현에 위치한 무성서원은 통일신라시대에 이 곳에서 군수를 지낸 최치원 선생을 모신 서원으로 조선중기 '상춘곡'으로 유명한 정극인 선생을 비롯하여 지역 출신 인물들도 같이 모시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전해오는 많은 향약 중에서 그 내용이 가자 충실하다고 여겨지는 고현동 향약이 이 곳 무성서원을 중심으로 시행되어 왔으며, 이 서원 건물 자체보다는 상당히 많은 문서류를 보관해 왔던 서원이다. 현재의 무성서원 건물은 19세기인 헌종 10년에 중건된 것으로 건물자체로서는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그리 높지 않다고도 할 수 있지만, '상춘곡'을 지은 정극인 선생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의 실록과 어진을 피난 시킨 서비들을 비롯한 무성서원 관련 인사들의 역사적 중요성과 서원이 보관해온 각종 문서들로 인해..

안동 도산서원, 서원 관리인 살림집인 고직사

안동 도산서원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살림집인 고직사는 강당인 전교당 옆쪽의 상고직사와 유생들의 기숙사인 농운정사 뒷편의 하고직사가 있다. 건물 규모는 유생들의 기숙인 농우정사나 동.서재봐다 약간 큰 것 같고, 도산서원 내에 다른 건물들에 비해서 약간 규모가 있어 보인다. 아마도 도산서원이 위치한 장소가 일반 민가와 상당히 떨어져 있기때문에 관리인들이 주변 민가에 살면서 출퇴근할 수 없어서 서원내에 항상 상주했었기때문인 것 같다. 또한, 고직사가 상.하에 따로 있는 것은 도산서원의 출발자체가 퇴계선생 생전에는 도산서당, 농운정사, 하고직사만이 있었는데, 선생 사후에 위쪽에 전교당과 사당인 상덕사가 건립되면서 제사 기능이 더해지고 서원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의 숫자가 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도산서원 상고직..

조선 관아 201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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