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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아

홍산객사, 부여에 속한 4개 군현 중 하나인 홍산현 관아

younghwan 2010. 9. 21.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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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부여군은 조선시대 임천군, 부여현, 홍산현, 석성현의 1군, 3현이 합쳐진 행정구역으로 그 중 흥산현은 부여의 서남쪽 백마강 건너편 성흥산성 주변에 위치한 독립된 행정구역이었다. 구한말이 끝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직전 전국의 지방 관청들이 대부분 초등학교로 변신하면서 대부분의 관청 건물들이 없어졌지만 홍산객사는 남아 있는 관청 건물 중 하나이다. 아마도 이 건물은 1838년에 새로 지어진 건물이라 상태가 양호하여 살아남은 것으로 보이며, 또한 홍산초등학교는 특이하게 관청 건물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홍산객사는 지금 보기에는 낡아 보이지만 객사의 원형이 제대로 남아 있는 객사 중의 하나로 시골 장터인 홍산면 소재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홍산 객사는 현 단위 객사로서는 작지 않은 규모로 세워졌다. 아마도 조선후기 화재 후 중건때 규모를 크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현재 홍산현 관아 건물 중에서 내아와 동헌은 없어지고 객사만 남아 있다. 구한말 관청이 초등학교로 변한 이유는 여러 군.현의 통합으로 비게된 건물을 재활용하는 측면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객사의 경우 건물규모가 크기때문에 당시 수준에서는 학교 건물로는 향교 강당보다 훨씬 큰 규모로 많은 학생을 수용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홍산객사에서 궐패를 모셔두는 정당. 3칸 규모인데 이 곳에서는 별도의 출입문을 두고 있지 않다.


온돌방으로 된 서쪽 익실. 이 곳을 방문하는 인사들은 주로 이 곳에서 머물렀을 것으로 보인다.


동쪽편 익랑은 5칸 규모로 서쪽편보다 1칸이 많으며, 2칸은 방, 3칸은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곳에서 연회같은 것을 열었을 것으로 보인다.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삼문형식으로 된 객사문


객사 동쪽에 있는 경관을 위해 심어진 고목


객사 마당에 공덕비로 보이는 비석들이 있다. 다른 지방에 비해서 그 수도 작을뿐더러 원래 객사마당에는 공덕비를 두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도 후대에 이 곳으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여러 방향에서 본 홍산객사


객사 서쪽에는 발굴 작업이 진행중인 것으로 보인다. 내아 건물 등의 용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객사는 지방관청의 중심으로 그 지역의 중심이지만, 지금 이 곳 흥산객사 주변은 흥산면 소재지에서 안쪽으로 들어온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일제 강점기 이후에 도로의 위치가 변함에 따라 변한 것으로 보인다.




객사는 조선시대 관청의 손님이나 사신이 유숙하던 건물인데 궐패를 안치하고 대궐을 향해 제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였다. 불탄지 9년만인 1838년 당시 군수 김용근이 재건한 것이다. 가운데에 정당을 두고 좌우에 익실을 붙여 두었다. 대개 객사의 양 익실은 크기를 같게 하는데 비해 흥산 객사는 서로 다르게 만들었다. 동쪽 익실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익실은 온돌방이다. 가운데 정당 지붕을 양 익실보다 조금 높여 맞배지붕으로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이 객사는 목수 20여명이 5개월 동안 연인원 4000명의 인부와 함께 건립하였다고 한다. <출처:부여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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