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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고궁박물관] 조선의 궁궐

younghwan 2010. 11. 5.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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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궁궐은 왕과 가족이 거주하는 공간이자 정치와 행정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수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의 궁궐로는 법궁이자 북궐로 불린 경복궁과 가장 오랜기간동안 국왕이 머물렀던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 서궐인 경희궁, 남궐이라 할 수 있는 덕수궁이 있다. 궁궐은 크게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인 정전과 편전, 국왕과 왕비가 머물던 내전, 세자가 머물던 동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궐내각사를 비롯하여 많은 부속 전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경복궁 고궁박물관에는 많지는 않지만 궁궐과 관련된 여러 문화재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주로 건물의 공사내력을 적은 상량문과 각종 건물에 내걸었던 현판, 화재를 예방하고자 하는 부적의 의미를 갖는 여러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궁궐에 대한 이해는 박물관보다는 실제 궁궐의 건물을 보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보조적인 의미로 박물관에 전시된 내용을 한번 둘러보는 의의가 있는 것 같다.


'수水'자 새긴 육각형 은판.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물을 의미하는 '수水'자를 적은 부적용 은판이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발견되었다.


화재를 막기 위한 '수水'자 부적. 화재를 막기 위한 부적의 용도로 만든 것이다. '수水'자 하나를 크게 윤곽으로 하여 그 안에 작은 '용龍'자를 가득 채웠다.


용그림부적. 용은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동물로 물을 다스리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화재를 막기 위한 용도에서 상량문과 함께 넣었다.


경복궁 근정문 상량문. 목조 건축물의 공사내력을 적은 글이다. 경복궁 근정문에서 발견되었다.


경복궁 근정전 상량문. 근정전 중건공사 내력을 적은 글로 상층 종도리 하단에서 발견되었다.


근정전 중수공사 관계자 명단.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참여를 밝힌 글. 왕명을 받들어 실질적으로 경복궁 중건을 주도한 흥선대원군의 업적을 공사 감독관 목록에 함꼐 넣지 않고 격을 달리해 따로 쓴 글이다.


건구고궁, 영조가 등극하기 전에 머물던 창의궁 정당에 걸었던 현판으로 '건구'는 하늘에 올라가지 않고 숨어있는 용을 가리킨다. 영조 글씨


복수당 현판. 경희궁 복수당에 걸었던 현판이다. '복수'란 '시경'의 "복록으로 편안하시도다"라는 글귀에서 취한 것이다. 영조 글씨


돈덕전 현판. 덕수궁 돈덕전은 고종이 외국사신을 접대하던 서양식 건물이다.


옥당현판. 옥당은 학술연구와 임금 교육인 경연을 전담한 홍문관의 별칭이다. 김진규 글씨


수라간 현판. 수라간은 임금의 음식을 마련하던 부엌이다.


활자를 마드는 관청 현판. 창덕궁 주자소에 걸었던 현판으로 주자소는 솰자를 만들던 관청이다. 김병국 글씨

궁궐의 현판
현판이란 글을 쓰거나 새겨 건물의 문 위나 벽, 기둥에 거는 널빤지를 말하며, 보통 가로로 내걸리기 때문에 횡액이라고도 불린다. 궁궐의 전각이나 관청.사원.사찰.민가에 걸렸던 현판들은 각각 건물의 격식과 성격 등에 따라 크기.형태.글자체.글자수 등이 결정되었으며, 이 때문에 현존하는 현판들은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시대에는 건물의 수만큼이나 많은 현판이 제작되었을 것이나 전쟁과 화재 등으로 인해 소실되거나 훼손되어 조선전기의 것은 희소한 편이다. 일부이긴 하지만  경복궁.창덕궁.경희궁.경운궁 5대궁궐의 건물에 걸렸던 주요 현판드리 현재까지 남아 있다. 궁궐에 걸렸던 현판은 왕이나 세자가 쓴 것이 대다수이고, 고대 혹은 당시의 명필이나 외국사신의 글자를 모방하여 글씨를 새긴 것도 있으며, 필자가 알려지지 않은 경우도 상당하다. 궁궐 문에 걸었던 현판이나 왕 또는 세자가 글씨를 쓴 현판에는 품위 있는 문양을 넣거나 조각으로 장식하였다. 조선시대 궁궐의 현판은 예술적 가치와 더불어 왕조사나 제도사 연구를 위한 사료로서도 높은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이다. <출처:고궁박물관>


동궐도, 국보 제340호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것으로, 건물뿐 아니라 주변의 자연환경까지 실제와 같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어 궁궐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각 철의 표지에 적혀 있는 '八一'부터 '八十六'까지의 표시는 동궐도가 세 벌 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림에 그려져 있는 건물들의 소실 여부와 재건된 연대 등으로 짐작하여 볼 때 1824년에서 1830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동궐도는 고려대학교박물관과 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본이 있으며, 이 대형사진은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본을 촬영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조선의 궁궐

궁궐은 왕이 국가를 통히하는 정치와 행정이 중심이자 왕실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수도에서 가장 중요한 곳에 위치한다. 조선은 건국 후 고려 구세력의 기반을 제거하려는 정치적 이유에서, 그리고 당시 풍수지리 사상을 반영하여 나라의 번영을 도모하려는 목적으로 적합한 궁궐터를 새로이 정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조선의 궁궐은 동양의 전통적인 도성 조성 방식에 따라 그 중심에 주로 국가적 행사를 거행하고 국정을 논의 하는 건물인 정전과 편전을 두었으며, 조정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뒤쪽으로는 왕과 왕비의 취침공간을, 동쪽에는 세자가 기거하는 곳을 마련하였다. 궁궐의 건물은 목조 구조에 기와를 얹었으며, 건물 실내의 바닥은 정전과 편전 등의 경우 전돌 또는 마루를 깔고 취침 공간의 경우에는 온돌 시설을 갖추었다. 또한 건물의 외부는 왕의 권위와 존엄을 드러낼 수 있도록 여러가지 색상과 길상 문양을 이용한 단청으로 장식하였다. 조선의 건국 직후 세워진 경복궁은 궁궐 가운데서도 가장 중심인 정궁으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시기와 용도에 따라 별도로 지어진 이궁들이 있어 왕실 가족과 관료들이 상황에 맞추어 궁궐을 옮겨가며 사용하였다. 경복궁이 법궁으로서 권위를 갖고 있었던 반면, 왕실의 생활공간으로는 넓고 아름다운 후원이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이 선호되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타 고종 5년(1868)에 재건될 때까지 270여 년간 터만 남아 있었으므로 존속기간은 250여년에 불과하며, 창덕궁은 520여년간 궁궐로 사용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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