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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고궁박물관] 조선 왕실의 문예, 국왕 짓고 쓴 글

younghwan 2010. 11. 20.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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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국왕이 직집 지은 글을 어제, 글씨를 서필이라고 한다. 어제와 어필은 국왕의 권위를 나타내며, 국왕의 일생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선왕의 일대기를 기록한 실록과 더불어 어제.어필을 수집하고 간행하는 것이 크게 중요시 되었다. 특히 숙종~영조 시대에는 역대 왕들의 어제와 어필을 편집하고 인쇄하여 책이나 첩으로 많드는 것이 성행하였다.

 조선시대에 국왕은 공적.사적으로 많은 글들을 친히 짓고 썼으며, 서원에 편액을 내리거나, 궁궐 건물의 편액을 직접 쓰기도 했다. 국왕이 쓴 글들은 모아서 책이나 첩으로 만들거나 돌이나 나무에 새기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그 내용이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오는 경우가 많다. 고궁박물관에는 많은 양의 어필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상당수는 영조가 적은 글이다. 조선시대 국왕이나 왕세자가 쓴 글들을 보면, 피상적으로 보이는 국왕의 근엄함 뒷면으로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상당히 많이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규장각 (1694). 창덕궁 규장각에 걸었던 현판으로, 숙종 임금의 글씨이다. 규장각은 본래 역대 왕의 개인기록을 보관하던 도서관이었으나 정조 때 비서실의 기능을 부여하고, 과거시험 및 문신교육의 권한을 더하였다.


어필간행목적 (1746). 영조가 자신의 어필첩을 간행하면서 당시의 어필 간행 관례와 보관 방법 등을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영조가 나이가 들어서 국왕으로서 후세에 교훈을 남기고 본인의 족적을 되돌아 보고자 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지금 편집하여 인쇄하는 것은 평소에 써 둔 것이다. 크고 작은 글자체는 음각하여 한 첩으로 만들고 양각한 것은 한권으로 만들어 어제초집궤에 함께 두었다. 글 속에 기으란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나는 본래 글 짓는데는 솜씨가 없으니 시 한 수 글자 한 자를 어떻게 후세에 남기겠는가? 그렇지만 나라에는 근래 관례가 있어 역대 왕들의 글과 글씨를 혹 편집 인쇄하여 권이나 첩으로 만든다. 차후에도 계속해서 편집 인쇄함은 이치상 당연하다. 현재 번잡하게 어제와 어필을 올리니 감독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극것들을 취사 선택할 수 있겠는가? 선택할 때 어떤 방법으로 정밀히 가려낼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까닭으로 나는 왕위에 오른지 이십여년 즉 1746년 여름에 관각에 있는 신하로 하여금 어제문을 편집하도록 시켰다. 궁궐 안에는 항상 돌에 새긴 것과 나무에 새긴 것이 있다. 지금 매 글자마다 찍어 장이나 권을 만든다. 다가오는 세대에는 다시 찍더라도 역대 왕들의 어필 아래에 첨가 보충하면 된다. 이처럼 된 후라면 비록 수백만의 문자가 있더라도 누가 감시 잡스럽게 찍을 것인가? 나의 뜻을 첩 끝에 붙여 둔다. 지금 내가 문장과 글씨에 이처럼 열심인 것은 어찌 나만을 위함인가? 의도는 선대를 거듭 계승코자 함이다. 문필에 이처럼 열심이거늘 정치야 말할 필요가 있는가?" <출처:고궁박물관>




태조가 숙신옹주에게 주는 가옥문서(1401). 태조가 태상왕으로 있으면서 그의 후궁 소생인 숙신옹주에게 집을 지어주고 만든 문서를 새긴 것이다. 태조가 나이가 들어서 어린 옹주를 대하는 진심이 묻어나는 구구절절 세세한 항목까지 직접 손으로 적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왕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는 글이다.

"건문3년 신사 9월 15일. 첩의 몸에서 난 딸 '며치'에게 문서를 만들어 주는 일로 말하자면, 비록 나이가 어리고 첩의 소생이지만 내 나이 앞으로 칠십을 바라보는데 내버려 둘 일이 아니다. 동부에 속하는 향방동의 빈 터는 작고한 재상 허금의 집터인데 잘 다듬은 주춧돌과 함께 사들이고 재목 등은 하인 시켜서 베어와 집을 지은 것이다. 본 채 두어 칸은 앞 뒤 툇마루 이어진 것인데 기와로 덮었다. 동쪽으로 붙여 지은 집은 기와로 덮고, 부엌 한 칸은 기와로 덮고, 주방 세 칸은 풀로 덮고, 창고 세칸은 앞 뒤 툇마루로 이어진 것인데 기와로 덮고, 누다락으노 된 곳간 두칸은 풀로 덮고, 안 사랑 네 칸을 풀로 덮고, 서방 두 칸은 앞 뒤 이어진 툇마루로 풀로 덮고, 남쪽으로 세칸은 앞만 툇마루로 풀로 덮고, 또 누다락으로 된 창고 세칸은 기와로 덮었다. 모두 스물 네칸 등을 차례로 만들어서 주고 아울러 본 문서도 함께 주는 것이다. 영영토록 거주하대 후일 딴 말이 있으면 이 문서 안의 사연을 가지고서 관청에 알려 변별할 것이다. 자손이 대대로 가질 것이며 오래도록 거주할 일이다. 태상왕" <출처:고궁박물관>


서예이론을 적은글(1746년). 왕희지가 썼다고 알려진 서예이론서인 필진도의 일부를 영조가 진체와 촉체로 쓴 것이다. 진체는 왕희지체이며 촉제는 석봉체 영향을 받은 송설체이다. 국왕의 취향과 식견을 보여주고자 적은 글씨라 할 수 있다.

"종이는 진이요, 붓은 칼 끝이요, 먹은 방패요, 벼루는 못이요, 글씨는 장군이요, 도우는 이는 비장이요, 거드는 이는 군사이다. 장군이 마음을 바르게 하여 진 위에서 칼을 잡고 방패를 잡고서는 성지를 한 바퀴 둘러본 후에야 진 속에서 칼을 휘두르고 못가에서 방패를 씻는다. 삼군은 칼을 들고 방패를 잡고서 좌우에 줄을 지었다. .. 옛적 당의 서예가인 유공권은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마음이 바르면 글씨도 바릅니다'고 하였다. 지금 나는 '정심' 두자를 첫머리에 두고 다시 '심정' 두 자를 끝 부분에 넣었다. 때는 유조 중춘에 양성 씅. 중춘의 중자는 모자로 해야 한다." <출처:고궁박물관>


역대임금의 필적을 모은책. 선조에서 숙종까지의 어필을 모아 판각하여 목판으로 찍은 책이다. 목판본 열성어필은 숙종 년간에 처음으로 간행되었고 경조과 영조초에도 간행되었다. 그중 선조임금 난초그림과 창덕궁 후원에 있는 '옥류천'을 적은 글씨이다.


연화만(19세기). 김정희의 추사체로 쓴 헌종의 어필이다.


숙종이 김수항에게 쓴 편지 (17세기).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수항에게 국정과 인사에 대해서 자문을 얻고자 하는 편지이다. 조선후기 국왕과 신하간의 의견을 교환하는 방법과 내용을 잘 보여주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병자호란때 죽은 김상헌의 후손으로 송시열과 함께 서인세력을 대표하는 사람다. 김수항과는 이렇게 친밀한 사이인것 처럼 보이지만, 경종의 세자 즉위와 관련한 기사환국으로 세인세력이 물러날 때 진도로 귀향가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서울에 기반한 안동김씨를 대표하는 인사로 그 후손들은 구한말 세도정치를 이끈 안동김씨들로 조상과 후손이 다른 모습으로 비쳐지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영의정은 뜯어서 보십시오. 시국 정세가 매우 어렵고 논의가 분분한 요즈음 내가 믿고 의지한 사람은 오직 경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계속해서 참척을 당했다고 합니다. 고질병이 계속되고 조정에 돌아올 기약이 없으니 근심스런 생각은 어찌 말로 다 표현하리오. 생각건대 근래 대마도도에서 온 문서는 매우 마음을 놀래게 하고 그들의 의도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지금은 나라가 태평한 지 이미 오래고 인물도 많습니다. 하지만 근래 재앙으로는 전쟁의 조짐 아니 것이 없는데 해변의 방비책은믿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에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면 속수무책으로 망하기만 기다릴 수 밖에 없습니다. 말이 이정도까지 나오니 나도 모르게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지금 이 문서의 허실은 비록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유비무환의 대책이 있느지 결단코 때에 맞추어서 계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레서 체부는 이전에 이미 일을 그러쳤으니 지금 다시 설치하기도 어려우며 지금 병조판서를 새로 임명하더라도 역시 일이 잘못되는 우환이 있을까 걱정됩니다. 나의 생각은 선조떄의 고사에 따라 전임대신과 현직대신들 가운데 사람을 뽑아 병조판서를 겸하게 하고 마음을 다하여 경계업무를 처리했으면 하는데 이 방법이 어떠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겸임해도 괜찮다면 어느 대신이 겸임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왜적에게 문서가 온 이래로 슬픔 속에서 근심이 만 갈래라서 이런 일을 가지고 그대에게 의논합니다. 마침 그대가 병황이 있기 때문에 만나기가 쉽지 않아서 이처럼 편지를 보내어 물어 보는 것입니다. 나의 지극한 뜻을 알아서 상세히 회답함이 어떠하십니까?" <출처:고궁박물관>


숙종이 사직단 옆 소나무에 대해 읊은 시 (1702). 숙종이 1702년에 사직단 곁에 있는 소나무에 대해 읊은 시를 1772년 영조대에 현판에 새긴 것이다.

"정원가에 소나무 얼마나 오래되었느냐. 뿌리는 하나인데 가지 뻗어 아홉이라. 영원히 사는 사람 없는데 늙지도 않는 것도 어찌 있으랴. 차가운 기운을 견디는 너의 절개를 부러워하노니 재실에서 하루종일 벗삼아 논다."  숭정기원후 임오년 2월6일 몸소 대제에 임하여 지으셨는데 임진년 (1772) 4월에 삼가 어필로 새기다. <출처:고궁박물관>


순조가 박주수에게 보낸 편지(19세기) 왕세자 시절 외사촌 동생 박주수에게 보낸 서찰이다. 박주수의 아버지는 호조판서 박종보이며 고모가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이다. 닫힌 공간인 궁궐에 살던 세자가 외가친척과 어린 시절에 주고 받은 편지로 보이는데 인간적인 풍모가 묻어나는 편지이다. 세자이지만 어린나이라서 그런지 먹을 것에 관심이 많고, 인척간의 정이 절절히 묻어 있는 편지이다. 순조는 정조의 아들로 안동김씨 세력에 휘둘리면서 어렵게 재위 기간을 보낸 국왕으로 알려져 있다.

"소범주에게 전함. 밤사이에 어떠한 상황인가? 나는 잠을 잘 자고 있다. 집을 나가서 연달아 독서를 하는가? 가까운 시일 안에 경석과 함께 궁으로 들어오는 것이 어떻겠는가? 우선 이만 줄인다. 즉일에.. 밤사이에 부모님을 모시고 잘 지내는가? 나는 오늘 서연에서 또 소대도 하였는데 매우 편리하였다. 그대는 금년에 발이한 날을 다시 만났으니 세상에 드문 일이라 할만하다. 탕과 떡을 배불리 먹었는가? 부채와 붓.먹을 보내니, 아우.누이동생들과 나누어 가지라. 미선은 자당께 드리는 것이 어떻겠는가? 우선 이만 줄인다. 합찬을 보낸다. " <출처:고궁박물관>


경종이 민진후에게 보낸 편지 (1708). 왕세자때 시강원 스승이자 외삼촌인 민진후가 먼 길을 떠날 때 잘 다녀오라고 보낸 편지이다. 경종은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기사환국으로 잘 알려진 세자 즉위 건 부터 서인세력으로 부터 핍박을 상당히 많이 받았던 국왕으로 재위 기관에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은 왕이다. 왕세자의 스승인 민진후는 숙종때 정비이 인현왕후 민씨의 오빠로서 송시열과 함께 서인세력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서로 대척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사제관계를 맺어 주었다는 것에서 숙종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두사람 모두 성격이 모질지는 못한 것으로 보이며, 인현왕후의 동생에 대해서 외삼촌이라고 칭하고 있는 경종의 글에서 인간적인 연민의 정과 그의 어려운 처지를 느낄 수 있다. 이런 경종을 멀리하지 않은 민진후 또한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고 그의 관대한 성격이 보이는 것 같다.

"어제 경연하는 여가에 저에게 인현왕후때의 일에 대해서 들려 주었습니다. 한 밤중에도 사모하는 감정이 일어나 억제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외삼촌께서 만리 길을 떠나신다하니 길이 멀지 않습니다. 더욱 이별의 감회가 절실합니다. 여기 감과 낙죽을 보내어 적으나마 저의 마음을 표시하고자 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 <출처:고궁박물관>



숙종이 김창집에게 내린 시 (1702) 장희빈사건으로 죽임을 당한 김수항을 꿈에서 만나게 되어 그를 생각하는 감회를 적은 시를 그날 입직한 그의 아들 김창집에게 내린 것이다. 숙종과 김수항을 비롯한 서인세력과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글 인 것 같다.

"지난 밤 꿈에서 그대와 만났습니다. 깨어나 자리에 앉아서 밤이 몇시인가 물어보니 새벽 종소리가 이미 울리고 있었습니다. 쓸쓸한 감회를 견딜 수 없어 촛불을 밝혀 나의 감회를 적어 둡니다. '새벽 꿈에서 분명히 그대를 만나 술을 내리라고 재촉함이 예전 그대로이다. 어제 보내온 글을 읽어 보니 쓸쓸한 감회가 더해 원래 느낀 감정이 잘못된 것이 아니로다.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하는 순수한 정성은 나이 들수록 더욱 깊어 기사년의 일을 말하려니 지금도 부끄럽다." <출처:고궁박물관>


숙종이 숙명공주에게 내린 시 (1699). 고모인 숙명공주가 질병이 나서 집에 직접 방문하여 병이 낫기를 바라며 지은 시이다. 안타깝게도 공주는 며칠후 60세로 돌아가신다.

"숙명공주에게 줌. 비온뒤라 봄바람이 더욱 거세. 비취빛 깃발이 궁궐에서 펄럭이누나. 고질병이 몸에서 시원스럽게 떠났으니. 다시 보면서 기쁘게 회포를 풀도다. 높은 누각에 좋은 자리 만들고 이름난 동산에는 경치가 아름답다. 화락한 이 자라에 누가 음악을 연주하리오." 1699년 4월 4일 종덕재에서 씀.


정조가 세심대에 올라 지은 시 (1791). 정조가 봄날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 사당인 선희궁 부근 동산에 있는 세김대에 올라 꽃을 감상하며 지은 시이다.


영조가 짓고 쓴 시 (1753). 영조가 60세에 사계절을 읊은 오언시이다. 백성이 농사 짓는 것을 부지런히 해서 음식을 넉넉히 먹고, 넓은 집에서 좋은 옷 입기를 바라고 있다.


홍문관을 찾은 감회를 적은 시 (1760).  영조가 학술연구와 임금의 교육을 전담하는 핵심 관서인 홍문관을 찾은 감회를 적은 글이다.

"오늘 국초 밤에 홍문관을 방문했다는 사건을 적어두고, 특별히 이곳에 와 사실을 대략 기록해 둔다. 탁지로 하여금 새겨서 걸어 두게 하고 또 첩으로 인쇄하여 만들어서 여러 신하와 승지 시위 가운데서 옛적에 홍문관을 거쳐온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하나는 홍문관에 보관하여 후대에 영원히 남기고자 한다. 홍문관의 모든 사람은 오늘 내가 간절히 힘쓰는 뜻을 본 받아서 자신의 깊은 실력을 다 드러내어 나의 얕은 학문에 보탬이 되도록 한다. " 황명 승정기원후 세번째 경진년(1760) 10월 7일 씀.
 "과거 어느날 밤에 홍문관에 들른 일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오늘 뜻밖에도 낮에 이곳을 방문하였다. 옛날 한나라 광무제는 깊은 밤 책 읽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고, 당태종은 문학을 크게 일으킨 18사람 가운데서 방현령, 두여회를 얻었다. 한.당을 본받아서야 되겠는가? 우리나라의 옛일을 본받음이 마땅하다. 옛날 야찬과 어시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어제에 분명히 실려 있다. 나는 늘그막에 삼강을 추모하였으나 본래 만학으로 책에서 배운 그대로 실천하지 못했다." <출처:고궁박물관>



효종이 동고동락한 이들과의 우애를 적은 글 (1641). 봉림대군 시절 병자호란 때 심양에 인질로 잡혀 갔을 때 그를 배종한 8명의 무사와 겪은 갖은 고생을 회고하며 쓴 글이다. 병자호란 이후 중국 심양으로 인질로 끌렸갔을 때의 어려운 처지와 심경이 절절히 묻어나는 글이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세상에 태어나면 모두 형제이다. 친하기로는 형제가 제일이며, 의리도 형제가 제일이니 천하의 모든 사람을 형제라고 부를 수 있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 말은 의미는 넓으면서도 또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서명'에 이르기를 '백성은 우리의 동포이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사람을 포면서 동포라고 여긴다면 형제라고 여겨도 좋다. 천하의 모든 사람도 형제라고 여길 수 있거늘, 하물며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고, 어려운 시기를 겪고, 친근함과 의리가 나날이 돈독하며, 삶과 죽음에서 떨어지지 않은 우리들에 있어서랴? 우리 아홉명은 제각각 다행한 것이 있다. 그 조상으로 말한다면 대대로 교분이 있는 사이고, 그 친함으로 말하자면 오이덩쿨이나 칡덩쿨처럼 맺어진 사이요, 그 나이로 말하자면 기러기 날아가는 것처럼 비슷비슷하다. 그 가운데 한 두 사람이 친척관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대대로 내려오는 교분이나 나이로 말한다면 모두 형제이다. 구태여 친척인 이후에 친해진다고 할 필요가 있는가? 지난해 경진년(1640)에 우리 여덟 사람이 고기비늘 처럼 차례로 심양에 들어 왔는데 다만 신진익이 예전부터 있었다. 함께 한 집안에 갇히었는데 아홉명이 벌집에 사는 듯 하였다. 앉아 있으면 부평초가 모여 있는 것 같았고, 움직이면 고기떼가 몰려 다는 듯하였다. 문학을 논하다가 피로하면 농담도 하고, 싫증나면 장기와 바둑도 두었다. 길게 느껴지는 낮과 밤을 지내고 하루 이틀 지나니 어느덧 일년이 되었다. 서로 타이르고 권면하는 것이 차례로 훈과 지르 ㄹ부는 듯하였다. 형제같은 친근한 의리가 넘쳐 흘러 줄어들지 않았으니 어찌 우리들의 행복이 아니겠는가? 모두가 말하기를 '수계첩을 만들어 훗날 펴 보고서 서로 생각하고 더욱 친의를 다지는 여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아! 난정이 비록 오래되긴 하였으나 글을 짓고 술을 마셨을 뿐이다. 낙사가 비록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나이 순대로 차례를 정였을 뿐이다. 모두 어려움 없을 때 만나서 좋은 경치를 찾아 연회를 즐긴 것이니 부러워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아홉명이 만난 때는 어느 때이며, 몸을 맡긴 곳은 어느나라인가? 문장과 술, 나이대로 차례를 정하는 즐거움은 비록 바랄 수는 없지만 친의의 감정은 어려움에 처할수록 더욱 굳어지니 예전 사람들도 역시 이런 모임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자연의 운행질서는 순환하기를 좋아해 괴로움이 다하면 즐거움이 오는 것이다. 동쪽 우리나라로 돌아간 후 그대들과 산수 속에서 축을 어루만지고 앉아서 술잔을 들고 태평성대를 즐기면서 이렇게 말하리라. '옛날의 괴로움이 오늘의 즐거움이 되었다. 옛날에는 젊었는데 지금은 늙었다. 늙을수록 더욱 즐거우니 그 즐거움이 무궁하리라.' 문장과 술, 나이대로 차례를 정한 행적의 거의 따라갈 수 있으리라. 여러 형제들은 힘쓸지어다." <출처:고궁박물관>



영조가 내린 교훈의 글 (1744). 사도세자가 성인식을 치를 때 영조가 훈시하고 쓴 네편의 글 중 첫번째 것이다.

"진실된 마음을 바탕으로 말이나 행동을 꾸미면 좋기는 하다. 하지만 진실된 마음만 강조하면 질박하거나 촌스러운 곳으로 흐르고, 말만 앞세우면 지나치게 꾸민는 것으로 흐르고, 관대하고 어질기만 하면 유약한 곳으로 흐르고, 조화에만 힘쓰면 혼잡한 곳으로 흐른다. 지금 내가 십육자로 훈유하는 첫 머리에 둔다. 학자에게 물어보더라도어찌 이 방법을 넘을 것인가?"
"넓고도 굳세게 뜻을 세우고, 너그러운 마음과 간편한 정책으로 백성을 통히하며, 공평한 마음으로 모든 사물을 똑같이 보며, 어진 이를 임명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부리라." <출처:고궁박물관>


영조가 나이들어 시력을 시험하려고 쓴 끌 (1758) 65세 때 노년에 이른 영조가 자신의 시력을 시험해 보고자 작을 글씨로 쓴 것이다.


규공애민.절용축력 (1744). 영조가 경제업무를 담당한 호조에 내린 현판으로 조세를 고르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씀씀이를 절약하여 힘을 축적하라는 뜻이다.

임금이 짓고 쓴 글
임금이 지은 글을 어제라 하고 임금의 글씨는 어필,어서,신한이라 하며 장차 임금이 될 세자의 글씨는 예필, 글은 예제라고 칭하였다. 어제.어필은 제왕의 풍모를 전해주고 왕조의 위엄을 보여주는 것이었기에 존승의 대상으로 삼았다. 임금은 주요 관직을 제수할 때 어필로 직접 써서 내려주기도 하고, 국가기밀 사항이나 중요한 일로 신료들에게 국정을 자문하는 편지를 노내기도 했다. 어머니, 아들과 딸 그리고 친지들에게 문안 편지를 보내는 등 공적.사적으로 친히 글을 짓고 썼다. 또 서원에 내리는 편액, 궁궐이나 사직 등 건물 편액도 직접 썼으며, 건물내력, 감상이나 추억에 관한 글도 현판에 썼는데, 이들 어필 현판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왕이 승하하면 새로 즉위한 왕은 선왕의 실록 편찬과 함께 어제.어필을 수집하고 간행하였다. 역대 왕들의 글과 글씨를 편집.인쇄하여 권이나 첩으로 만들거나 나무 또는 돌에 새겨 보관하기도 하였다. 1662년 (현3) '열성어필첩'이 처음으로 간행된 이후 숙종.경종.영조 시기에 집중적으로 간행되었다. 원본과 탁본 그리고 돌에 새긴 것까지 함꼐 보존되어 있다. 국왕의 서체는 학문 경향과 예술 성향을 대표하는 것으로 시대에 따라 송설체, 석봉체, 촉체, 추사체 등으로 변화하는 모습도 살필 수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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