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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부여/삼한실] 동예,옥저, 삼한의 유물

younghwan 2011. 4. 8.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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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이 한나라에 멸망할 무렵 한반도 북쪽과 만주 지역에는 부여가 고대국가로서 존재하고 있었고, 동해안 지역에는 동예와 옥저가 있었다. 부여는 북만주 지린성 일대에 있었던 고대국가로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의 원류가 되는 국가로서 우리나라 고대 국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국가이다. 부여의 남쪽에 존재했던 동예와 옥저는 통일된 정치체제를 구축하지는 못하고 연맹체와 비슷한 성격을 가졌던 국가로 대부분의 기간동안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국가이다.

 북쪽에는 부여가 있었다면 남쪽에는 진국에 이어서 삼한이 오랜 기간동안 존속하였다. 호남지역의 마한, 경남지역의 변한, 경북 지역의 진한으로 구성된 삼한은 고조선의 세력교체시 이동한 세력들이 근거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한과 변한은 중국, 일본과의 교역을 통해서 많은 부를 축적했던 것으로 보이며, 상당한 문화 수준를 보이는 유물들이 이들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옥저는 연해주와 함경도 일대에 존재하였다. 해안을 따라 동북방향으로 뻗어 있었으며 주된 생업은 농업과 어업이었다. 읍락의 군장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통일된 정치체를 이루지 못하여 고구려의 견제옥저는 연해주와 함경도 일대에 존재하였다. 해안을 따라 동북방향으로 뻗어 있었으며 주된 생업은 농업과 어업이었다. 읍락의 군장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통일된 정치체를 이루지 못하여 고구려의 견제와 지배를 받으면서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였다. 언어,음식,주거,의복 등의 풍습이 대체로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옥저의 문화는 두만강 일대의 단결-크로우노프카문화로 추정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손잡이항아리, 옥저, 함북 웅기 송평동 패총


손잡이항아리, 옥저, 함붕 종성 지경동(왼쪽) 함북 온성 삼봉리(오른쪽)


항아리


손잡이항아리, 옥저, 함북 웅기 송평동 패총

동예는 한반도 동북부와 강원도 일대에 존재하였다. 옥저와 비슷한 수준의 사회였으며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다. 산과 물을 경계로 영역을 엄격하게 지켰으며 이를 어길 때에는 노예나 동물로 보상하였다. 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바다를 통한 어업도 활발히 하였다. 동예의 문화는 출입구가 있는 집자리와 경질무문토기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특히 불탄 흔적의 집자리가 많은데, '병을 앓거나 사람이 죽으면 옛집을 버린다'는 기록과 관련해 주목된다. <출처:중앙박물관>



바리, 동예


항아리, 동예


바리, 동예


깊은 바리,


허리띠고리, 진한, 1~2세기, 경북 경주 사라리 무덤


 허리띠고리, 마한, 2~3세기, 충남 천안 청당동 무덤


허리띠고리, 원삼국시대, 경남 창원 다호리. 충남 천안 청당동 무덤

유리구슬 만들기
유리는 이산화규소(SiO2), 산화납(PbO), 산화바륨(BaO) 등을 1,000~1,500˚C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액체 상태로 녹인 용액을 고체 상태로 굳혀 만든다. 유리 구슬을 만드는 방법은 거푸집에 찍어서 만드는 방법, 봉에 찍거나 감아서 만드는 방법 등 여러가지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유리 제품은 기원전 2세기 초에 충남 부여 합송리 널무덤에서 출토된 유리 대롱옥이다. 이 시기의 유리 구슬은 주로 봉에 유리용액을 감아 늘려서 자르는 방법으로 만들었으나, 삼한 이후에는 거푸집을 이용하였다. 경기 하남 미사동, 전남 해남 군곡리와 경북 경주 황성동 유적에서는 유리 구슬과 곱은 옥 거푸집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거푸집, 마한, 1~3세기, 경기 하남 미사리집터. 유리구슬을 만드는 거푸집으로 수십내지 수백개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이 구멍에 가는 심을 끼우고 용액을 부어 구멍이 있는 구슬을 만든다.


충남 천안 청당동 무덤, 경북 포항 옥성리 무덤에서 출토된 유리로 만든 장신구


목걸이, 변한 2~3세기, 경남 김해 양동리 무덤
수정을 여러 면으로 다듬은 구슬과 곱은옥을 꿰어 만든 목걸이이다. 유리, 수정, 마노, 호박 등으로 다양한 형태의 구슬을 만들었다.


경남 창원 삼동동 무덤


경남 김해 양동리 무덤에 출토된 꾸미개. 삼한의 꾸미개는 옥과 구슬로 만든 목걸이, 귀걸이, 옷 장식 등이 있다. 옥으로 장식하는 것은 청동기시대 이전에 시작하였으나, 삼한 이후에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유리와 수정, 마노, 호박 등을 이용하여 곱은 옥, 여러면으로 된 구슬, 대롱옥, 둥근옥 등 다양한 형태의 구슬을 만들었다.


 새장식 항아리, 진한 3세기, 울산 하대리 무덤


항아리, 변한 기원전 1세기, 경남 창원 다호리 무덤. 삼한시기의 대표적인 와질토기로 밀폐된 굴가마에서 구워 회색을 띤다. 형태는 민무늬토기에서 변화된 것이 많으나 점차 굽다리가 붙는 등 다양한 형태로 변화한다.


현악기(복원품), 마한, 기원전 1세기, 광주 신창동 저습지

부여.삼한
고조선이 멸망한 전후, 중국 동북 지역에는 부여와 고구려, 한반도 동북 지역에는 옥저와 동예, 중남부 지역에는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이 있었다. 사회 발달 수준은 국력과 위치에 따라 서로 차이가 있었다. 부여와 고구려는 주변 세력과의 갈등과 긴장 속에서 문화 역량을 강화하여 일찍이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옥저와 동예는 고구려의 지배 아래 예속된 상태였으며, 마한.진한.변한은 점차 백제, 신라, 가야로 통합되어 가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철기 생산이 본격화되면서 쇠로 만든 농기구와 무기가 널리 쓰였다. 철기의 사용으로 농경의 효율을 높일 수 있었고, 국가의 지배질서도 빠르게 확립되었다. 새로운 토기 제작 기술이 도입되어 회색토기가 만들어졌고 목기와 칠기 등 다양한 생활용품도 사용되었다. 무덤으로는 돌무지무덤, 널무덤, 덧벌무덤 등이 만들어졌다. 한편 활발한 대외교류가 진행되면서 중국.북방.왜와 문물을 교환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부여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존속하였던 고대국가이다. 영역은 중국 지린성 일대로 추정되는데 중심지는 주변 나라와의 전쟁을 겪으면서 이동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기원후 2세기 무렵 인구가 약 40여 만에 이르렀으며, 왕은 중앙을 지배하고 지방은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의 관리들이 통치하였다. 농업과 목축으로 생업을 삼았으며 말과 구슬, 모피 등의 특산물이 있었다. 부여의 유적으로는 지린 동단사.남성자 유적, 유수 노하심 무덤유적이 알려져 있다. 부여 왕실의 후손이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한 지배계층이 되었으므로, 부여는 우리나라 고대국가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자료참조:
1. 중앙박물관
2. 다시찾는 우리역사, 한영우, 경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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