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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고구려실] 고구려인의 일상과 불교

younghwan 2011. 4. 15.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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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는 오녀산성이 있는 환인성에서 성읍국가로 출발해서, 압록강 중류지역에 있는 길림성 지안시에 위치한 국내성, 마지막으로 대동강 유역의 평양성으로 수도를 이전했다. 그래서 고구려 유적은 대부분 압록강 중류의 지안시, 북한의 평양일대에 분포하고 있기때문에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유물이나 유적을 실제로 보기는 힘든 형편이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유물들은 고구려 전성기때 한국유역에 남아 있는 여러 산성들에서 조금이나마 유물이 출토되고 있으며, 신라에서 가져간 고구려 물건들이 경주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북방민족과 긴장관계에 있었던 고구려는 산성을 비롯하여 성곽을 쌓는 기술이 발달하였으며, 지배계층은 주로 성곽 안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지역에 있는 고구려 궁궐인 안악궁은 역사이래로 가장 규모가 컸던 궁궐건물로 보이며, 이로 미루어볼때 고구려의 생활 수준은 당대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박물관에는 많지는 않지만 고구려인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을 볼 수 있으며, 이들 유물들 상당수는 서울의 고구려산성이 아차산성에서 출토된 유물이라고 한다.

고구려인의 일상
고구려의 성 내부에는 여러 건물과 정비된 도로 등 다양한 시설이 있었다. 귀족의 집은 사랑채와 안채로 이루어지며, 마구간, 차고, 부엌, 다락창고, 방앗간, 고깃간 등의 부속시설과 잘 꾸며진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주요 건물은 기와로 지붕을 덮었고 난방 시설로는 부분 온돌을 설치하였으며, 일상생활에서 평상이나 좌상을 사용하였는데 방안에서 신발을 벗는 습관이 있었다. 디딜방아로 곡식을 찧었고, 가루로 내어 시루에 쪄 먹었으며 아래층에 기둥만 있고 본체가 위에 있는 고상식 구조의 다락창고에 곡식을 보관하였다. 부엌에서 조리한 음식을 소반에 받쳐 들고 안채나 사랑채로 가서 상차림을 하였는데, 주인과 손님의 상을 따로 차렸다. 말이나 소가 끄는 수레를 탔다. 일반적으로 마차는 남자용, 우차는 부인용이나, 귀족 남자들도 외출할 때 우차를 많이 이용하였다. 바퀴살이 있는 개량된 수레바퀴를 만들어 사용하였고 질좋은 철기를 생산하였다. <출처: 중앙박물관>


'호우'글자가 있는 청동그릇, 고구려, 415년,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유물로 바닥에 그 연대를 알 수 있는 글자가 쓰여 있다.


그릇 바닥에 쓰여진 글씨. 광개토왕릉비와 같은 글자체의 글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을묘년'은 광개토대왕의 장례를 치른 다음해(415)이다. 따라서, 대왕을 장사지낸 1년 뒤에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이 그릇을 신라사신이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경자 庚子' 글자가 새겨진 접시, 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2보루에서 출토된 것으로 '경자'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연꽃무늬 수막새, 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1보루.


네 귀 달린 항아리, 청동, 고구려 5세기, 경북 경주 금관총에 출토된 것으로 당시 신라와의 교류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집게, 철, 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2루. 철을 가공하는데 사용하는 도구로 보인다.


세발 뚜껑단지, 고구려, 5~6세기


부뚜막, 철, 고구려, 5~6세기, 평북 운산 용호동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실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무덤주인의 사후 세계를 위해서 만들어 부장품으로 묻은 것이다.


집모양 토기, 고구려, 5~6세기, 평양구역


수레 굴대 부속, 철, 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2보루


시루와 솥, 고구려, 5~6세기, 서울 구의동 보루. 서울 아차산성 부근에 주둔했던 사람들이 사용했던 생활용구로 볼 수 있다.


불에탄 곡물(조,쌀), 고구려, 5~7세기, 경기 연천 무등리 2보루


굴뚝, 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4보루.

고구려의 불교
고구려의 불교는 소수림왕 2년(372)에 중국 전진왕이 사신과 순도스님을 시켜 불상과 경문을 보내면서 전해졌다. 그리하여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왕실과 국가의 후원을 받으며 사찰이 건립되고 불상이 조성되었다. 절터로는 청암리사지, 상오리사지, 원오리사지, 정릉사지 등이 조사되었다. 청암리 사지는 문자왕 7년(498) 조성된 금강사지로 비정되며, 상오리사지,정릉사지와 함께 일탑삼금당 가람배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정릉사지는 '사寺','정릉定陵' 등의 명문이 있어 전 동명성왕과 관련된 능사로 보고 있다. 불상은 고운 점토로 빚거나 금동을 주조해 만든 것들이 전해지는데, '연가7년(539)이 새겨진 불상'은 명문이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고구려 불상은 중국 남북조시대 불상의 영향을 받아 얼굴이 길고 옷자락이 몸 양 옆으로 힘차게 퍼진 특징을 보여 준다. 그밖에, 고구려인들의 불교적 세계관은 무덤벽화 안에서도 자주 표현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영강 7년'이 새겨진 광배(복제).

불상의 몸 전체를 감싸는 배 모양 광배다. 연꽃과 넝쿨무늬로 장식하였고, 전면에는 꽃무늬를 새겼다. 광배 뒷면에 '영강7년'으로 시작되는 7행 58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영강'은 고구려 양원왕 때의 연호로 551년에 해당된다. 명문내용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미륵삼회에 참석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미륵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이 광배의 본존이 미륵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연가7년'이 새겨진 부처

1963년 발견된 고구려 불상이다. 광배 뒷면에는 연가7년(539)에 현재의 평양으로 추정되는 지역인 낙랑의 동사라는 절에서 천불 신앙을 유포하고자 이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4줄 47자에 걸쳐 새겨져 있다. '연가'는 고구려 독자의 연호이다. <출처:중앙박물관>


흙으로 만든 부처와 보살,

1937년 평안남도 원오리 옛 절터의 발굴조사에서는 틀에 넣어 만든 많은 수의 소조불이 300점 이상 출토되었다. 이들은 가부좌로 앉아 배 부분에 손을 깍지 낀 선정인 자세의 부처와 시무외 여원인의 손모양을 한 보살들로 이루어져 있다. 6세기 중엽이후에 만들어진 출토지가 분명한 고구려불상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앉아 배 부분에 손을 깍지 낀 선정인 자세의 부처.

 

 시무외 여원인의 손모양을 한 보살들.

 


흙으로 만든 부처와 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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