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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백제실] 백제의 건국과 한성기 유물

younghwan 2011. 4. 18.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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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백제는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의 아들인 온조왕이 하남 위례성에서 백제를 건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부여계통의 세력이 한강유역으로 이주하면서 백제를 세웠다는 것을 말해준다. 초기에는 십제였다가 백제로 불리게되었다고 하며, 한반도 서남부지역 마한의 일개 성읍국가였다가 그 세력을 확장하여 고대국가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 백제의 수도는 하남 위례성이라고 기록에 남아 있으며, 그 위치가 풍납토성, 몽촌토성, 또는 하남의 또다른 지역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백제가 한성에 수도를 정한 기간은 약 500년(기원전18 ~ 기원후 475)에 이르며 백제역사 700년의 대부분을 한성에서 보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초기 백제의 유적이나 유물은 후대 웅진이나 사비에 비해서 많다고는 볼 수 없지만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 적지 않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백제의 건국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백제는 고구려 주몽의 아들인 온조왕에 의해 건국되었다. 온조는 형인 비류와 함께 고구려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비류는 미추홀에,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정착하였다. (기원전 18). 나라 이름은 십제라 하였으며 그 후 백제로 고쳐 불렀다. 온조왕 13년(기원전 6) 한산 아래로 위례성의 주민을 옮겼는데 한성의 위치는 풍납토성.몽촌토성 등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 풍납토성에서는 대형 집자리.제사관련 건물지. 도로 등이 확인되어 초기 백제 도성의 모습을 확인시켜 준다.


칠지도(복제품)는 일본에서 보관하고 있는 유물로 잘 공개되지 않고 있는 유물 중 하나이다. 이 칠지도는 <일본서기>에 근초고왕이 일본에 전해준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금실로 글자를 새겨놓고 있다. 이 칠지도와 비슷한 유물이 부여 군수리사지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며, 당시 출토된 유물 또한 분실되어 지금은 볼 수 없다고 한다.

칠지도는 일곱개의 가지가 달린 칼로 양쪽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현재 일본에 있는 이칼은 글자의 내용이나 문장의 형식등으로 미루어 백제왕이 왜왕에게 준 것으로 파악된다. 제작연대는 '泰_4年'을 중국 동진의 연호인 '태화4년'으로 해석하여 369년으로 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근초고왕이 일본에 전해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372년으로 보고 있다. 칠지도는 글자를 금실로 새겨 넣은 칼로서 백제의 뛰어난 금속 제작 기술을 보여주고 있으며 당시 백제와 왜와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철기 만드는 도구, 백제, 4~5세기. 달구어진 철괴를 망치로 두드려서 필요한 연모를 만드는 도구. 이러한 도구에는 집게, 망치, 받침모루, 끌 등이 있다. 전시된 유물은 덩이쇠(금산 수당리), 망치(서울 풍납토성, 완주 상운리), 줄(완주 상운리), 집게(서울 풍납토성, 완주 상운리)로 철을 다루는 연장들로 백제 영역의 다양한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쇠삽날 4세기 백제 수도인 한성 부근 서울 풍납토성, 고양 멱절산에서 출토되었다.


살포(5세기, 충남 금산 수당리 무덤)와  열쇠(4~5세기, 서울 풍납토성)


재갈( 4~5세기, 충북 청주 신봉동 무덤), 말띠드리개(4~5세기, 천안 용원리 무덤), 발걸이(4~5세기, 천안 용원리무덤)

백제의 성장과 영역확장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한나라의 군현을 막아 내고 마한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성장하였다. 고이왕은 관제를 마련하고 관리의 복색과 법령을 제정하는 등 국가조직을 정비하여 고대국가의 모습을 갖추었다. 4세기 근초고왕때에는 북으로는 황대도 일대를 장악하고, 남으로 마한의 전 영토를 확보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한성기는 마한의 소국인 백제국이 점차 마한의 여러 나라들을 통합하면서 백제라는 고대 국가로 성장하는 역동적인 시기였다. <출처:중앙박물관>


환두대로로 잘 알려진 고리자루칼(4~5세기)로 백제에서도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전북 완주 상운리, 충남 서천 봉선리, 충남 서천 봉선리, 충남 천안 화성리에서 출토된 고리자루칼

생산기술의 혁신
백제는 종래의 전통적 기반 위에 우수한 기술을 도입하여 토기.철기 등 생산활동에 있어서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다. 토기는 세발접시.굽다리접시.검은간토기 등이 제작되어 이전까지와는 다른 모양과 기술이 선보인다. 기와는 지금까지의 토기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동전무늬수막새 등 막새기와는 주로 한성기의 도읍에서 출토된다. 철 생산은 백제의 지방에서 주로 이루어졌으나 중앙에서 장악하고 통제하였다. 철기제작에 있어서는 상감기법이 성행하였는데, 칠지도 및 은상감 고리자루칼 등을 통해서 확인된다. 또한 철제 농기구의 발달은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다. <출처:중앙박물관>


잔(4~5세기, 서울 몽촌토성), 굽다리접시(서울 몽촌토성.풍납토성)


'대부'가 새겨진 항아리, 백제, 4~5세기, 서울 풍납토성. 풍납토성에서는 '대부'가 새겨진 항아리와 '정'이 새겨진 항아리가 출토되었는데, 고구려 아차산 보루에서 출토된 '대부정'이 새겨진 토기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는 중국에서 관리를 일컫는 말이며, '정'은 벽사의 의미가 있는데 기우제와 같은 제의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토기 겉면에 '大夫'라 적힌 글씨를 볼 수 있다.
 

세발접시, 백제, 4~5세기, 서울 몽촌토성.풍납토성.


검은간토기(4~5세기), 서울 석촌동 무덤과 충남 천안 용원리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단지(3~4세기, 충북 청주 시봉동 무덤)와 그릇받침(5세기, 경기 포천 자작리 집터)

금동관모
금동관모는 신분을 상징하는 꾸미개로 우월한 지위를 가진 사람의 무덤에서 주로 출토된다. 형태는 둥근 고깔 모양으로 모자의 뒷부분에 대롱모양의 장식을 달거나, 앞 또는 뒷부분에 화려한 장식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금동관모는 공주 수촌리, 서산 부장리, 천안 용원리, 익산 입점리, 나주 신촌리, 고흥 길두리 등 백제의 영역뿐만 아니라 가야와 일본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주목된다. 금동관모는 금동신발.중국 도자기 등의 고급물품과 함께 부장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것들은 백제가 마한의 세력을 통합해가는 시기의 유적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금동 관모, 백제, 5세기, 충남 공주 수촌리 무덤


유리 구슬, 백제, 5세기


귀걸이, 백제, 4~5세기,

백제
백제는 부여계의 이주민들이 한강유역에 정착하여 세운 나라로 점차 마한지역을 통합하면서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그 후 도읍을 웅진, 사비로 옮기면서 독창적인 백제 문화를 꽃피웠다. 한성기(기원전 18~기원후 475)는 백제가 고대국가의 체계를 확립하고 마한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백제의 기틀을 다진 시기였다. 대외적으로는 교류를 통하여 국제적인 지위도 확고히 하였다. 금강 유역에 도읍한 웅진기(547~538)는 고구려의 남진으로 약해진 국력을 회복하고 중흥의 발판을 마련한 시기였다. 무령왕릉은 당시 백제와 동아시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지니고 있어 역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사비기(538~660)는 문화적으로 가장 융성한 시기로 특히 불교 문화가 화려하게 꽃핀 백제 문화의 절정기였다. 부여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사찰이 세워졌으며, 백제금동대향로를 비롯하여 예술적인 공예품들이 이 시기에 주로 제작되었다. 국제적이면서도 세련된 백제문화는 신라와 가야 그리고 일본에도 전해졌는데, 특히 일본의 아스카문화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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