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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고구려실] 고구려의 무기, 말갖춤

younghwan 2011. 4. 1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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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는 중국대륙의 혼란기라고 할 수 있는 5호16국, 남북조시대에 한반도북부와 만주 일대에서 크게 번성했던 국가이다. 고구려가 북방민족이 세운 중국 북조의 국가들과의 투쟁에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철갑기병을 비롯하여 강력한 철제무기, 산성축조기술과 전략적 운용능력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는 장수왕 이후 백제수도 한성을 공격해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등 이 시기에 남한지역에 많은 고구려의 흔적을 남겨놓고 있다. 대표적인 백제와의 투쟁의 흔적인 서울 아차산성에서는 무기류를 비롯하여 다양한 고구려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중앙박물관에서는 이들 유물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

 고구려 군사력의 바탕이 되는 무기류로는 고분벽화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기병의 활과 말갖춤 등이 특징적이다. 중세가 시작되는 시기에 로마를 비롯한 유럽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등자와 활을 사용한 훈족기병의 모습이 고구려에서는 일상화된 기병의 모습으로 세계적으로도 이른 시기에 강력한 기병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구려의 군사력은 동아시아에서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바탕으로 그 세력을 크게 확장할 수 있었던 같다.

고구려의 무기
고구려 군사력의 주요한 바탕은 우수한 제철 기술로 만든 강력한 무기에 있었다. 무기는 공격용 무기와 방어용 무기로 크게 나누어진다. 공격용 무기는 활, 창, 쇠뇌, 칼, 도끼 등이 있고, 방어용 무기는 갑옷과 투구, 방패가 대표적이다. 고구려의 활은 길이가 짧은 단궁으로 성능이 우수해서 당시 이미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고구려에서 활쏘기는 기본 무술 종목 중의 하나였다. 고구려의 갑옷은 작은 철판에 구멍을 뚫어 가죽끈으로 서로 연결한 비늘갑옷이 주로 사용되었다. 투구는 다양한 형태로 벽화에 묘사되고 있지만, 실제 출토된 것들은 소수다. 철제 무기들을 분석한 결과 오늘날의 강철과 같이 단단한 것으로 밝혀졌다. <출처:중앙박물관>


비늘갑옷, 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비늘갑옷은 가야에서 볼 수 있었던 철기시대 판금갑옷에 비해서 활동이 자유로워서 기마병들에게 적당한 것으로 보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갑옷의 형태가 아닌가 생각된다.


도끼, 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투겁창과 물미,  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에 출토된 것으로 보병들이 사용했던 무기로 보인다.


마름쇠, 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기바병에 대응하기 위해서 성곽주변에 뿌려 놓는 것으로 북방민족의 기병에 적절히 대응해온 고구려의 전술적 능력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화살촉, 쇠뇌촉, 서울구의동 보루, 경기도 연천 무등리 보루. 쇠뇌는 고구려를 비롯하여 동아시아에서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사용한 강력한 무기이다.

고구려의 말갖춤
말갖춤에는 말을 부리기 위한 재갈과 고삐, 말위에서 몸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안장과 발걸이, 말을 장식하기 위한 말방울, 말띠드리개, 말띠꾸미개 등이 있다. 말을 길들여 타는 데에 가장 먼저 고안되 도구는 고삐일 것이나, 오늘날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재갈은 말의 입안에 단단한 물질을 넣고 이를 당겨 말의 혀를 자극하는 통제수단이다. 이 가운데 금속제 재갈과 견고한 재질의 안장, 발걸이를 사용하면서 기병의 전투력이 크게 강화될 수 있었다. 고구려의 말갖춤은 무덤과 산성, 보루 등에서 출토된 유물과 무덤 벽화를 통해 그 모습이 전해지며, 고대 동아시아의 말갖춤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출처: 중앙박물관>

고구려의 철갑기병
고구려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동시에 중국의 혼란기를 이용한 대외 정복 활동으로 넓은 영토를 개척하고 독자적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고구려의 군대는 육군과 수군으로 구성되며, 육군은 기병과 보병으로 이루어졌다. 기병은 중장기병과 경기병으로 구분되는데, 이들을 적절히 배치해 효과적으로 전투를 수행하였다. 기병 중 사람과 말 모두가 철제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중장기병은 고구려 군사력의 가장 핵심적 존재였다. 동천왕대에 이미 '철기 5천'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로 기마전술에 의한 전투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개마무라로도 불리는 이들은 안악3호분과 덕흥리 무덤의 벽화 등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재갈과 발걸이, 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등자라고 불리는 발걸이는 전쟁과 무기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무기로 훈족으로 대표되는 중앙아시아 유목민 기병을 상징하는 말갖춤이라고 볼 수 있으며, 고구려 기병은 이들과 비슷한 시기에 등자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등자를 사용하면서 말을 타고 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게 됨으로써 전쟁의 방식을 크게 바꾸었다.


방울, 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말갖춤, 서울 수락산 보루

고구려의 남진
고구려는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해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다. 임진강 유역과 양주분지 일원, 한강 하류역, 금강유역에서는 고구려의 남진을 보여주는 유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교통로를 장악하기 위해 고구려군이 축조한 소규모 성곽으로 군사적 성격이 강하다. 특히, 아차산과 용마산 일대 보루들에서는 온돌 시설이 있는 건물지와 저수시설, 간이 대장간, 방앗간 시설 등이 다양한 유물과 함께 발견되고 있다. 이들을 통해 고구려의 군사조직과 생활상, 한강유역 지배방식 등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1979년 발견된 중원 고구려비 역시 5세기 고구려의 남진을 이해하는 데에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자료이다.


쇠스랑(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도끼(충북 청원 남성골)


삽날, 호미, 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서울 아차산성과 그 부근에서 출토된 철제 농기구를 비롯한 유물들은 당시 고구려군의 주둔 방식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아차산성에 주둔한 고구려군의 주위에 둔전을 개발하여 자급자족 형태로 군사들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삼국시대 조조가 운영했던 군사주둔 방식이다.


보습, 서울 구의동 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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