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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신라실] 문자로 보는 신라,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국보 3호)

younghwan 2011. 5. 22.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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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는 6세기에 국가체제를 갖추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고구려와의 경쟁에서 조금씩 이기면서 진흥왕때는 영토가 한강유역과 함경도 동해안 일대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 기간 신라는 율령을 제정하고 불교를 공인하는 등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기간에 국가로서의 모습은 신라가 남겨놓은 여러 흔적에서 볼 수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문자를 새겨놓은 비석들이다. 특히, 진흥왕 순수비와 단양 적성비는 진흥왕이 화장된 영토를 순수하면서 기념으로 새겨놓은 비석들로 당시의 관직체제, 인물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의 영역을 보여주는 유물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진흥왕순수비 이외에도 신라는 국가정책 등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글자를 새겨놓은 비석을 많이 활용했는데, 그 내용은 법의 시행, 국왕의 순시, 댐과 성 등 토목사업의 과정과 책임소재 등을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비석은 특정한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라영역 전체에 걸쳐고 고루게 분포되고 있어서 국가운영의 중요한 수단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문자로 보는 신라
6세기 신라는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갖추고 대내외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소갈이와 수리시설의 보급을 통해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나라이름을 '신라'라 정하고 '왕'이라는 왕호를 사용하였다. 또한 율령을 제정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하였으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낙동강과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고, 동해안을 따라 함흥평야까지 진출하였다. 신라는 6세기에 정복한 지역을 신라지방으로 편성하였고, 확대된 영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문서행정을 통해 통치하였다. 이렇게 신라인이 남겨 놓은 역사의 흔적은 신라인들이 직접 써놓은 문자에서 더욱 뚜렷하게 찾을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국보 3호, 북한산 비봉에 있었던 비석으로 지금은 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진흥황 16년(555)에 세워진 것으로 진흥왕이 확장된 영토를 순수하면서 기념으로 세운 비석이다. 황초령,마운령,창녕에 4기의 순수비가 있으며, 단양 적성비를 비롯하여 다수의 순수비가 전국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넓어진 영토에 기념비를 세우다
신라는 6세기에 활발한 정복사업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법과 문서를 통하여 지방을 지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 각지에 세워진 비석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지증왕과 법흥왕대의 비문에는 법을 통하여 정복한 지역을 통치하고 지방의 분쟁을 조정하였으며, 더 나아가 비석을 세워 그 사실을 지방의 주민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또한 진흥왕은 정복사업으로 새로 차지한 영토인 창녕.북한산.황초령.마운령 등에 4개의 순수비를 단양에는 적성비를 세워 이를 기념하였다. 이들 비석에는 진흥왕이 신라영역으로 새로 편입된 지역을 돌아보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에 충성한 자들을 포상하며, 신하들이 함께 축하한 것을 기념하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1,5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 당시 새겨진 글씨들이 남아 있어서 당시 신라사람들의 문자생활이나 사회모습 등을 엿 볼 수 있다.


특히 측면에 새겨진 글씨는 아주 또렷히 남아 있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진흥왕 순수비가 있었던 북한산 비봉.


남산신성비 제1비(복제), 591년, 경주 탑동에서 출토된 것으로 당시 구역별로 산성 축성에 참여한 인원들과 축성내용을 담고 있는 실무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건축이나 토목현장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남산신성비는 591년(진평왕 13) 신라 왕경인과 지방인을 동원하여 경주 남산에 신성을 쌓고 건립한 비석입니다. 현재까지 10개가 발견되었으며, 비문에는 '신해 2월 21일에 남산 신성을 쌓을 때, 법에 따라 쌓은지 3년 만에 무너지면 죄로 다스릴 것을 널리 알려 서약케 한다'라는 서약부분으로 시작하여 축성에 관련된 인물, 축성 담당거리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제1비는 1934년에 발견된 것으로 여러 비들 가운데 처음으로 발견되어 붙여진 이름입니다. 화강암의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비문에는 9행에 169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지금의  함안 일대인 아량촌의 지방민이 남산 신성 축성에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신라의 지방통치체제를 살피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출처:중앙박물관>


남산 신성비에 새겨진 글씨


안압지 출토 명활산성비, 551년

돌에 글을 새겨 세상에 보이다.
6세기 신라에서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금석문이 많이 제작되는데, 앞 시기에 단편적으로 문자를 사용하던 단계와 비교하여 문자 발달사상 중요한 전환기가 된다. 특히 단단한 돌에 글자를 새긴 비문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비문의 내용은 나라의 법 시행, 국왕의 지방 순시, 댐과 성을 만든 과정과 책임 소재 등 국가에서 행한 공식적인 일을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비문을 새긴 비석은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산성이나 댐의 주변, 성벽, 교통로 등에 세웠다. 신라 전 영역에 걸쳐 분포하는 비석은 국가에서 중요한 사안을 돌에 기록하여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이를 영구히 보존해야하는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영일냉수리신라비(복제), 국보 264호, 포항 냉수리에서 발견된 것으로 이 비석은 재산분배를 확인하는 증명서 성격의 비석으로 남산신성비와 함께 실무적인 성격의 비석으로 오늘날의 공문서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중원고구려비와 비슷한 예서체로 쓰여진 글씨로 글자가 아주 또렷히 남아 있다.


포항 중성리신라비(복제), 501년, 포항 중성리에서 발견된 것으로 재산 분쟁과 관련된 판결내용을 담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영일 냉수리신라비보다 그 연대가 2년정도 빠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무적인 내용이 적혀 있는 비석이라 할 수 있다.


포항 중성리신라비에 적힌 글씨.


영천 청제비 탁본, 536년, 영천군 금호면 도남동

영천 청제를 쌓아 저수지를 만들면서 세운 비석의 탁본이다. 비 높이는 130cm 정도이며 화강암을 가공하여 만들었다. 비의 양면에 각각 다른 시기에 기록한 내용이 담겨 있다. 앞면에는 병진년인 법흥왕 23년(536)에 처음으로 청제를 건립하면서 기록한 내용이 있는데, 비를 세운 연년윌, 공사명칭, 규모, 동원한 인원수, 공사관계자 등이 기록되어 있다. 뒷면에는 정원 14년인 원성왕 14년(198)에 청제를 새로이 수리한 내용이 담겨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댐을 쌓고 논에 물을 대다
6세기 신라는 소갈이와 댐의 보급을 통한 농업 생산력을 기반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법흥왕대에 전국적으로 댐을 만들거나 보수하는 사업이 시행되었다. 제방을 축조하면서 물의 흐름을 제어하여 하천 주변의 땅을 개발하여 농경지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논농사도 발전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영천 청제를 쌓으면서 기록한 '청제비'와 대구에 있는 제방을 만들면서 쓴 '무술오작비' 등에 남아 있는데, 청제비가 세워진 곳에는 아직도 저수지가 남아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금속유물에 새겨진 문자
5~6세기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글자가 새겨진 것이 있는데, 신라에서 문자가 사용된 초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허리띠끝장식과 처옹그릇 등에 새겨진 '부인대','대부' 등의 글씨는 문장이라기보다는 단어로 된 문자라고 해야 할 정도이다. 그러나 호우총과 서봉총에서는 '광개토지호태왕'이나 '태왕' 등과 같이 고구려의 왕을 지칭하는 용어와 제작연대.제작자.용량 등 여러 내용이 새겨진 그릇이 출토되어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연수'명 은그릇, 451년, 경주 서봉총에서 출토되었다.


그릇에 쓰여진 내용은 "연수원년 태왕치세 신묘 삼월 중에 태왕이 교시하여 은 세근 여섯량으로 뚜껑을 만들었다."이다.


'대부'명 청동그릇, 5세기, 경주 황오동고분


그릇에 쓰여진 글씨, 이 그릇에 쓰여진 '태왕' 등과 같이 고구려의 왕을 지칭하는 용어로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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