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지역박물관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관찰사가 근무하던 감영의 모습을 보여주는 곳

younghwan 2011. 6. 11. 22:32
반응형


 강원도 원주시 도심 중심부에 있는 옛 강원감영터에는 관찰사가 근무하던 선화당, 숙소인 내아, 출입문인 포정루 건물이 남아 있고, 감영내 출입문이 내삼문과 외삼문이 복원되어 있다. 감영 선화당 마당 한쪽편에는 행각을 복원한 건물이 있는데 강원감영 사료관이다. 이곳은 원주에 있던 강원감여의 역사적 배경, 감영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구성과 모습, 관찰사의 임무 등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조선시대 중요한 행정기구였던 감영은 충청도 공주, 전라도 전주, 경상도 대구, 강원도 원주, 평안도 평양, 황해도 해주, 함경도 함흥에 있었는데 대부분 대도시에 소재했었기때문인지 옛 건물들은 거의 남아 있지않고, 공주, 대구, 원주에 관찰사가 근무하던 선화당 건물과 포정루가 남아 있다. 그중 원주의 강원 감영 건물들이 원래의 위치에서 원형에 가까운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곳 강원감영 사료관은 전시유물을 그리 많지는 않지만 관찰사가 근하던 감영이 어떻게 생겼는지, 관찰사가 어떤 일을 했는 잘 정리해 놓고 있는 유익한 곳이다.

강원감영
강원감영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지방관청입니다.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서울을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여덟 개의 도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8도 아래에는 더욱 작은 지역으로 오늘의 '시'나 '군'과 같은 '목'과 '군', '현'이라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각 도의 관찰사는 왕을 대신하여 자신이 담당한 지역을 책임지고 다스렸습니다. 우리가 현재 서 있는 이 곳 강원도는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등과 함께 전국 팔도의 한 행정구역이며, 강원감영은 1395년부터 1895년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 전체를 다스렸던 관찰사가 머물던 곳입니다. 강원감영은 1665년(현종 6) 선화당이 세워지면서 많은 관리들이 일하는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하였고, 1895년 당시에는 총 57개의 건축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감영에는 관찰사가 일했던 선화당, 감영의 정문인 포정루, 관찰사를 만나기 위해 거쳐가야 했던 중삼문과 내삼문, 관찰사의 일을 돕는 사람들이 있었던 행각과 내아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출처:원주시청>


강원감영 옛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모형. 감영은 동쪽편에 원주천이 있고 사방에 낮은 산이 있는 읍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실제 지형과는 약간 다르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감영은 선화당을 중심으로 동쪽편에는 객사가 있고, 앞쪽에는 크고 작은 관아 건물들이 있다. 1895년 강원감영이 없어질때 총 57개의 건축물이 있었다고 한다.

관찰사
조선의 왕이 각 도의 책임자로 보낸 관리를 당시에는 관찰사 또는 감사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맡은 지역에 대한 행정권과 사법권, 군대 통솔권을 가지고 있었고, 1년에서 2년 정도에 걸쳐 강원도 곳곳을 다니며 목, 군, 현을 다스리는 수령이 어떻게 백성들을 돌보고 있는지 살려보았습니다. 이렇게 관찰사가 여러 곳을 살펴보며 돌아다니는 일을 순력이라고 합니다. 여름에는 주로 용동지역인 강릉과 삼척에 머물렀고, 봄.여름.가을.겨울에는 춘천과 원주에 있었답니다. 17세기 중반부터 관찰사는 원주에 계속 머물게 됩니다. 감사의 임기도 1년에서 2년으로 늘어나는데, 이때 선화당을 비롯하여 감사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집무실과 많은 건물들이 건축됩니다. 관찰사는 주로 원주의 감영에 머물면서 강원도의 다른 지방을 때때로 순력하는데 이러한 변화를 유영이라고 부릅니다. 관찰사는 높은 지위와 그만큼의 책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조선시대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지위를 품계라고 하는데, 종2품 이상의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 다른 부서에 있는 사람들의 추천을 받고, 또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해야 관찰사로 임명될 수 있었습니다. <출처:원주시청>



관찰사 신완의 편지


관찰사 서명선의 편지


역대 강원 관찰사 명단

관찰사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한해의 농사
관찰사가 순력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무었보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풍년일 때는 사람들의 경제생활에 여유가 있게되고, 사람들의 삶이 여유로울수록 나라의 살림 또한 풍족해지기 때문입니다. 풍년일 때는 사람들의 경제생활에 여유가 있게 되고, 사람들의 삶이 여유로울수록 나라의 살림 또한 풍족해지기 때문입니다. 흉년일 때는 반대로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고, 나라는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펼쳐야 했습니다. 실제 관찰사가 매달 왕이 있는 중앙에 보고하는 문서에는 농사에 가장 중요한 강우량, 즉 비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에 대한 측정이 빠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농작물의 생산량응 얼마나 되는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예전보다 더 넓어지지는 않았는지에 대한 조사가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지만 농경과 함꼐 전국 각 지방의 관청에서는 그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특산물에 대해서도 매년 조사하여 중앙에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사를 가거나 오는 전입.전출 현황, 주소지 변경과 출생.사망 신고 등 인구의 증감 사항에 대한 통계도 주기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출처:원주시청>


강원도 각읍무변이력성책


신분증명패

감영 향시 주관
조선시대에 지방에 사는 지식인이나 양반들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향시(문과향시, 무과향시, 생원지사시 초시)를 거쳐야 했습니다. 즉 강원도내의 응시자들이 과거를 보려면 감영이 있는 원주로 모여야 했고, 감영에서는 향시를 준비하고 시행하였습니다. 과거시험을 보기 전에 감사는 도회소라는 '과거시험준비-시행위원회'를 설치하여 과거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도회소 주관 아래 경시관, 도사 등이 감사가 지정한 문신 수령인 참시관 2인과 함께 과거를 준비하고 채첨하였습니다. 또한 과거시험을 치르기 전 녹영소를 통해 응시자 본인에 대한 확인 및 증명서 발급의 업무가 있었습니다. 녹영소는 별도 기관이 아닌 임시기구였으며, 행정자료인 호적을 함꼐 대조해야 했기 때문에 감영이 이를 담당하였습니다. 또한 과거의 예비시험인 조흘강도 감영에서 시행되었는데, 감사는 생원지사시 초시, 문과 초시, 무과 초시 등의 향시를 주관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속업무 또한 관장하였습니다. 응시자와 합격자의 성명 및 인적사항의 보고, 과거 시험으리 과정인 초장-중장-종장이 실제로 어떻게 시행되고 몇명이 몇 장의 시험지를 제출하였는가와 관련한 보고, 우수 답안지의 편집 및 보고 등은 무도 감사가 담당하였습니다. 감영에서 이루어진 과거시험(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들의 이름과 생년월일, 주소 등을 상세하게 적은 명단을 '사마방목'이라 하는데, 태조 때부터 1894년까지 치러진 총 230회의 시험결과늘 보면 전체 47,997명의 합격자 가운데 원주에 거주한 사람이 570명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전국에서 네번째로 많은 합격자수를 보여주는 내용인데, 그마큼 원주의 향학열이 높고 지역에 우수한 인재가 많았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원주시청>

군사훈련과 재판
관찰사는 나라의 정책을 시행하고 백성들을 보살피는 역할과 함께 자신이 담당한 지역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군사 훈련에도 책임을 맡고 있었고, 그래서 매월 군사훈련을 시행한 결과를 중앙에 있는 왕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군사훈련을 당시의 표현으로 조점.합조라고도 했는데, 원주에서 치악산을 무대로 산성에서 훈련을 실시했다고 하니다. 강원감영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지도에는 군사훈련에 사용된 무기를 보관한 군기고, 화약을 보관한 화약고, 군인들의 식량을 보관한 군향고 등 군대와 관련한 건물이 확인됩니다. 오늘날 법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투고 논쟁하는 가운데 판사의 결정으로 옳고 그름이 가려지는 것처럼 관찰사는 당시 조선시대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도둑질을 하거나 심각한 분쟁이 일어났을 때 이를 조정하고 판결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감영에는 죄인을 가두는 감옥이 있었고, 관찰사의 판결과 심문에 따라 곤장을 맞기도 하고, 금전으로 배상을 하기도 했으며, 무거운 죄를 짓거나 자신이 저지를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옥살이를 했답니다. <출처:원주시청>


과거시험 우등 답지 묶음

비장과 중군
조선의 중앙 정부에서는 관찰사의 일을 도와줄 사람들을 함께 파견하였습니다. 정6품이나 종5품의 도사, 정 3품(무관)의 중군, 종4품의 경력, 판관 등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관찰사의 참모와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을 비장 또는 막료라고 불렀습니다. 비장은 거두어들인 곡식 장부를 감시하거나, 관찰사를 대신해서 강원도 내의 농사 형편을 살피기도 했고, 식량이 모자라는 봄철에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도 했답니다. 비장청은 8명에서 10명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됩니다. 중군은 관찰사의 안전을 담당하거나 군사업무를 책임진 사람이었습니다. 중군은 2년의 임기동안 관찰사를 보좌하고 감영에 있는 군대를 이끌었습니다. 또 중군을 보좌하는 군관이 2사람, 그 외 29명 정도의 인원이 함께 업무를 도왔는데 이들은 군대와 관련한 업무와 더불어 치안을 담당한 오늘의 경찰이나 검찰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출처:원주시청>

영아전과 무임, 기술직 장인
감영에는 감사와 중군 및 영리를 보조해 주는 비서격의 업무를 보던 영아전, 각종 군사 및 경찰업무를 담당했던 무임, 기술적인 업무를 담당했던 장인 등의 사람들이 함께 일했습니다. 영리는 감영의 6방 행정사무를 담당한 사람으로 조선시대 당시 강원도내 26개 군현중 14개 군현에서 뽑힌 120명의 영리가 감영에서 교대로 일했다고 합니다. 영아전은 영리와 비슷한 사무를 담당한 이들로 감영이 소재한 곳, 즉 원주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충원되었습니다. 그리고 감영 내에서 각종 군사 및 경찰 업무를 담당하는 무임이나 장교, 관노비도 대부분 감영 소재지에 거주하였습니다. 강원감영에는 군관 3명, 화사 1명, 사자관 1명, 집사 16명, 지인 51명, 사령 26명, 군뢰 27명, 세악수 10명, 관노 42명, 관기 19명, 영비 9명 등이 있었고, 이 사람들은 집사청이나 관노청, 비장청, 영노청 등에서 각기 배정된 역할과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출처:원주시청>

심약과 검율
심약은 관찰사의 건강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종9품관인 심약은 주치의처럼 감사의 건강과 질환을 살펴보았고, 관찰사의 순력에 동행하면서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료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임금에게 바치던 삼을 책임지기도 했고, 매년 1원부터 10월까지 여러지역의 약재를 모아 중앙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강원감영의 옛 건물 중에는 심약이 머무는 심약당, 약재를 모으는 채약방, 인삼을 보관하는 보살고 등이 있습니다. 재판을 하는 관찰사에게 법률적인 조언과 자문을 해주는 검율도 있었습니다. 종9품관인 검율은 관찰사의 법률 보좌관으로 법률의 해석과 적용, 집행에 대한 사무를 책임지며, 법규와 형벌 집행을 도왔습니다. 즉 관찰사가 범죄사건을 처리할 때 사건내용을 잘 살펴서 처리하는 방법을 자문하는 역할을 했답니다. 감영 내에서 검율이 머무는 곳은 검율당이라 합니다. <출처:원주시청>


휴대용업무편람

영리와 영노비
감영에는 오늘날 도청의 공무원과 같이 강원도에 사는 백성들과 만나고 대화하며, 각종 문서와 서류, 세금업무 등을 처리하던 영리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강원도 각 지역에서 대대로 살아왔던 지방의 향리들 중 한 사람씩을 뽑아 임명하였습니다. 영리는 감영의 실무를 담당한 사람들로 관찰사의 명령을 받아 각 지방 수령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사정을 얼마나 잘 살피고 있는지를 감시했고, 관찰사가 순력할 때는 안내자 역할을 했습니다. 실질적인 감영의 업무는 중앙의 6조가 있는 것처럼 6방으로 나누어 영리들이 맡고 있었습니다. 이방에서는 주로 인사와 비서의 업무를, 호방에서는 세금과 농사 등에 관한 업무를, 형방에서는 재판과 죄인, 감옥에 관한 업무를, 끝으로 공방에서는 수공업과 건물의 건축 수리 등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그리고 각 방에는 비장이라고 하는 수장을 두었으며 호방과 이방, 형방의 우두머리를 삼공형이라고 불렀습니다. 영노니븐 감영과 병영에 소속된 노비로 건물을 새로 짓고 수리하는 일, 창고를 지키는 일, 군량을 운반하는 일 등을 맡아 하였고, 대략 31명 정도로 구성되었습니다. <출처:원주시청>


현재는 사료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복원된 행각 건물. 행각은 관아에 있었던 크고 작은 건물들로 주로 창고나 관아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머둘던 공간이다.

 


원주감영은 조선왕조 5백년 동안 한 곳에서 자리잡고 있었기때문에 그 터에서 여러가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동전과 금동허리띠고리

 


원주 강원감영에서 사용했던 각종 그릇들이 출토되고 있다.



강원감영터에서 출토된 그릇들


나막신과 쌍륙말

 

 


건축자재들

 

강원감영 사료관
강원감영 사료관은 조선시대 500년간 (1395~1895) 국가의 지방통치기구였던 강원감영의 역사를 살펴보는 공간이다. 원주에 강원도를 관할하던 감영이 설치된 역사적 배경, 감영에서 실제 일하던 구성원들의 모습, 관찰사의 역할과 임무, 일제시기 사진자료에 실려 있는 감영의 옛 모습, 그리고 1887년 4월 오횡묵 정선군사가 생생하게 묘사한 당시의 감영 전등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 수 있다. 또한 2000년 감영터를 발굴할 당시 출토된 많은 유물들 중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상평통보, 비녀와 수저, 나막신과 쌍육 및 기와류, 백자접시와 토기향로를 비롯한 자기류가 전시되어 있다. 이곳 사료관 옛 감영의 건축물 중 행각 건물에 해당한다. 행각은 일반적으로 궁궐, 관아, 사찰에서 가장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건물 옆에 세우는 보조건물로 감영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이나 일꾼들이 대기하거나 물품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출처:원주시청>


강원감영 사료관 내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