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 고속철 역사 부근에 있는 조선중기 청백리로 이름을 떨친 오리 이원익 기념관이다. 광명시청에서 지역을 대표하는 위인으로 기념관을 만든 것으로 보이며, 그의 생애에 대한 이해를 쉽게 할 수 있는 곳이다.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들은 주로 선생이 쓴 글씨들 위주이며, 선생의 업적에 대한 설명 위주인 것으로 보인다. 인근 충현서원터에 있는 선생의 종갓집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물을 전시하는 충현박물관과 중복된 느낌을 주며, 실제로 중요한 유물들은 충현박물관에 많이 전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리 이원익선생은 '오리대감'이라는 별칭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선조부터 인조때까지 벼슬을 지내면서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공헌하기도 하였다. 오리 이원익 선생이 후대에 많은 존경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청백리로 살았던 청렴함과 방납 등 많은 폐해가 있었지만 토호들과 지배계층의 극심한 저항으로 실천되지 못했던 대동법을 광해군때 경기도에 실시할 수 있도록 했던 관리로서의 식견과 능력을 높이 사고 있기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광명 오리이원익기념관
오리이원익기념관은 광명시의 위인인 오리 이원익(1547~1634)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역사문화공간입니다. 이원익 선생은 평생동안 청렴하고 유능한 관리로서 본분을 다하였으며 임진왜란의 국난 극복을 위해 온몸을 바치신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이 곳 소하동은 이원익 선생의 유적이 많이 남은 지역으로 선생의 호인 오리도 인근의 읾을 따서 붙인 것입니다. 기념관에는 선생의 연표 및 지방관리 시절의 이야기, 임진왜란 때의 활약, 개혁적인 관리생활, 청백리로서의 모습 등을 알려주는 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출처:광명시청>
오리 이원익선생 영정
이원익이 쓴 정몽주의 시, 조상에게
"중양의 좋은 날에 국화 바람부는데
고개숙여 읊조리니 흥취가 무궁하다.
우습다 다른 뜻은 조금도 못 이루고
관직에 분주하며 십년 공부 허비하니" <출처:광명시청>
이원익이 쓴 정몽주의 시, 평교관에 손수지어 써 붙인 글
"포은 선생 머리가 눈처럼 흰데
평교관 가운데서 곤드레 취해
먼 여행하는 형편 알아 줄 이 없으니
새로 지은 시 한 수를 스스로 쓴다." <출처:광명시청>
목민관 이원익, 안주지방을 살리다.
이원익은 37세에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41세에 이율곡의 추천으로 평안도 안주지방 관리(안주목사)로 나ㅏ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안주지방의 명주는 널리 알려졌는데 이원익이 부임한 후 뽕나무를 심어 양잠에 종사히게 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당시 안주지방은 가난한 마을이었지만 양잠의 시작으로 안주지방은 다양한 경제활동을 하게 되어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원익이 쓴 정몽주의 시, 양자강
"초를 꿰고 오를 안아 기상이 씩씩하니
이제도 여기에서 사해가 조회한다.
강물을 거슬러서 근원 찾아 간다면
곧바로 아미산의 제일봉에 닿으리" <출처:광명시청>
이원익이 손자에게 써 준시
"왕자가 달 밝은 누각에서 신선을 만날 제
옥피리 창아하여 학이 배회한다.
곡이 멎자 날아가 행방 묘연하고
산 아래 벽도화만 절로 피었다." <출처:광명시청>
이원익이 자손에게 써준 글
"아버지에서 아들로, 아들에서 손자로 한기운이 서로 전해지므로, 살아서는 한집에서 같이 살고 죽으면 한무덤에 함꼐 묻히려고 하니 이것은 천리와 인정의 지극함이다. 내 자손들은 풍수설에 구애하지 말고 이어 붙여 장사지내도록 하라. 세상사람중에 형제가 화목치 못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부잣집에서 그러한데, 이것은 재물이 있으면 다툴마음이 생겨 천륜을 상하게 하니, 재물이 바로 빌미가 되는 것이다. 자손들은 절대로 옮지못한 재물을 모으지 말고 불인한 부를 경영하지 말라. 다만 농사에 힘써 굶어 죽는 것을 면하면 옳을 뿐이다." <출처:광명시청>
임진왜란의 공신, 평양에서 한산도까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하게 되자 이원익은 안주목사 시절의 선정을 바탕으로 민병을 모집하여 평양성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고 1594년에는 영호남의 방어를 담당하는 사도도체찰사로 경상도 성주에 사기를 올리는데 공헌을 하였습니다. 이원익은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정규군과 곽재우장군 등 의병의 사기를 올리는데 공헌을 하였습니다. 경상도 지방의 금오(구미), 용기(포항), 공산(달성), 황석(함안), 화왕(창녕) 산성을 수축하여 적의 침입을 막는데 기여하였습니다. 전쟁 후 이원익은 선무, 호성 양대공신으로 추천받았으나 호성공신 2등만 받았습니다. <출처:광명시청>
인조 묘정에 배향하는데 대한 교서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왕위에 올라 예를 행하여 바야흐로 승부의 예제를 거행하고, 덕을 높이고 공을 숭상하여 이에 좋야의 전례를 실시하노라. 선대를 받드는 것이 망극하고 명을 하사하는 것이 새롭다. 아, 우리 종영은 참으로 국로로다. 몸은 옷을 이깆 못할 것처럼 가냘프나 관직을 맡으면 늠름하여 범하기 어렵고, 말은 입에서 나오지 못할 것처럼 수줍으나 일을 만나면 패연히 여유가 있다. 충근은 실로 중흥을 돕고, 청백은 다만 소절인 것이다. 만년에 변고를 만났으니 어찌 혼조의 위엄을 무서워하겠는가. 홀로 떳떳한 윤리를 수립하였으니 ........." <출처:광명시청>
대동법의 시행
이원익은 임진왜란 후 어려워진 백성의 삶을 구제하기 위해 개혁법안인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건의하였다. 조선의 세금제도 중 공물제도는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게 하였는데, 부담이 불공평하고 수송과 저장에 불편이 많았다. 또 방납의 부담 증가. 생산되지 않는 공물의 배정 등으로 백성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져만 갔다. 이율곡, 유성룡 등에 의해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내자는 논의가 계속 있어 왔는데 임진왜란이 끝나자 농민의 공납 부담이 높아지면서 공납의 폐해는 다시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광해군이 즉위하자 영의정 이원익이 재청하여 1608년 5월에 경기도에한하여 실시할 것을 명하고 선혜법이라는 이름으로 9월부터 실시되었다. 대동법은 과거 호당 부과되던 것에서 토지의 소유 규모에 따라 세금을 징수하여 가난한 농민의 부담은 줄었으며, 국가는 전세수입의 부족을 메우게 되었다. 대동법 실시 뒤 등장한 공인은 공납 청부업자인 어용상인으로서 산업자본가로 성장하여 수공업과 상업발달을 촉진시켰다. 또한 화폐의 유통을 촉진시키고, 운송활동의 증대를 가져와 교환경제체제로 전환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경제의 변화로 상공인층이 사회적으로 성장하고 농민분화를 촉진시켜 종래의 신분질서가 와해되는데 영향을 주었다. <출처:광명시청>
이원익이 손자에게 써 준 시
"홀로 누각에 올라 팔도를 바라보니
검은 구름 흩어지고 달 그림자 외롭다.
망망한 우주 무수한 사람 중에
몇명의 사나이가 대장부인가" <출처:광명시청>
이원익이 손녀에게 써 준 정몽주의 시, 삼봉에게
"정생이 동쪽으로 먼 길을 떠나는데
철령관은 화각 부는 가을에 높다.
막객들 가운데서 누가 첫째일고
사람 기댄 유공루에 달이 밝구나." <출처:광명시청>
이원익이 손녀에게 써 준 정몽주의 시, 김 소년에게
"만년에 글 읽으면 부질없이 뉘우쳐
책 덮고는 곧바로 멍해지게 하더라
김생은 이제 한창 나이 젊으니
창 앞에 가 다시 더 힘써 보구려" <출처:광명시청>
이원익이 쓴 정몽주의 시, 음주
"나그넷길 봄바람에 흥취가 마구 일어
좋은 곳 만날 때면 술잔을 기울인다.
집에 가서 돈 다 쓴 것 후회하지 말아라
넉넉하게 얻은 새로운 시 금낭에 가득하니." <출처:광명시청>
이원익이 쓴 정몽주의 시, 인일 조회 때의 눈
"궁전 그윽한 곳에 서설이 날아
바람따라 시신 옷에 나부껴 든다.
재주없이 양원의 시 지어 바치고
단지에서 배음하고 취해 못 간다." <출처:광명시청>
이원익이 손자 수약에게 쓴 글
이원익이 쓴 정몽주의 시, 금주의 위 지휘집에서 매그림을 보고 붓을 달려
"앉은 길 손 찬탄아며 매 그림을 보자니
풍상이 찬 벽에서 날개 칠 듯하구나
임금은 종산에서 사냥을 하시려니
이몸은 어느 때나 보라매를 바치리" <출처:광명시청>
이원익이 쓴 정몽주의 시, 사람을 보내며
"사나이의 앞날은 멀고 멀리니
필마로 추풍 속에 한강 닿거든
사업에 부질런히 힘써야 하리
등불이 좋아 서재 비쳐 주리니" <출처:광명시청>
이겸환의 교지, 오리 이원익의 7대손이며 승지,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으며, 순천.홍주.수안 등의 수령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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