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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 이원익 선생은 조선 중기 명조에서 인조대의 문신으로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다. 오리대감이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의 극복과 대동법을 실시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중앙의 다양한 관직을 역임했으며, 지방관으로서 안주목사 시절 민생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으며, 임진왜란때에는 평안도 순찰사로서 선조의 피난길을 선도하고 군사를 모으는 등 큰 공을 세웠다. 학풍으로는 남인계열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중기까지 큰 사회적 모순이나 많은 폐해를 끼쳤던 공납제도를 개혁하는 대동법을 실시하게 하였다.

 광명시 소하동에는 그가 생전에 살았으며 후손들이 살아왔던 종택이 있으며, 종택에는 그를 모신 서원인 충현서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옛터만 남아 있다. 종택에는 그의 영정을 모시는 영우와 정자인 관감정이 남아 있다. 오리 이원익 선생의 많은 유품들이 종가에 전해내려 오며 일부는 오리이원익기념관에 전시하고 있지만 상당수의 유품들은 종택에 지어진 충현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유품들로는 그의 영정을 비롯하여 여러 문집들, 당시 문인들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글들이 있다.


오리 이원익 영정.


평양 생사당 구장 이원익 영정(1595년)과 이원익 서기성생사철환도상배루(1605년, 선조38)

평양 지방의 서리들이 이원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에 모셔졌던 영정이다. 이원익이 1595년(선조28) 우의정에 임명되기 전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영정의 좌측상단에 있던 화기와 <오리집>에 수록된 내용을 통해 작품의 제작 경위를 알 수 있다. 다부지고 굳은 절개를 느낄 수 있는 얼굴모습과 오른손에는 부채를 쥐고, 왼손은 관대를 잡고 있는 모습과 손톱이 긴 것이 특징이다. 이는 주로 고승들의 초상화에서 주로 나타나는 특징이라서 화승(승려 화가)이 그린 영정으로 추정된다. <출처:충현박물관>

이원익이 평양 생사당을 철거하고 자신의 도상을 환수하여 배접한 후에 쓴 기록이다. 내용이 <오리집>에 수록되어 있어 그림의 경위를 알 수 있다.
"평양 생사당을 철거하고 도상을 환수하고 배접한 후에 쓰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어가가 서쪽으로 피난 갈 시 나는 이조판서로 어명을 받고 먼저 관서에 가서 도순찰사를 겸하여 평양감사를 맡았다. 1595년에 우의정에 임명되어 조정에 돌아왔으나 평양에 있는 서리들이 이익을 보기 위해 나에게 공적이 있다하며, 인민들에게 쌀과 베를 수합하여 화공으로 하여금 나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사당을 지어 간직하였다. 1599년 내가 사당을 철거하고 그림을 가져오게 하였다. 1604년 호성훈도상을 기록할 때 이 그림을 개장하여 얼자인 효전에게 주고 얼자가 자손이 없을 경우 그림을 종가에 돌려주게 하였다. 1604년 여름에 직접 기록하다." <출처:충현박물관>


홍천 유배시절에 상촌 신흠의 시에 화답하며..
"두 사람의 처지가 모두 쫓겨난 신하 신세이니
 간간히 들려오는 소식에 서로 눈물을 적시는 구려
 청평산 자락 소양강물은 잠시도 쉬지 않고 동쪽으로 흘러 한강나루에 이릅니다." <출처:충현박물관>


오리집 목판. 이원익의 문집인 <오리집>의 목판본으로 본래 안동의 병산서원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국학진흥원에 소장되어 있다.


오리선생집, 1691(숙종17)

이원익의 문집으로 1691년에 간행된 초간본이다. 증손 이상현이 이원익의 손녀사위인 허목과 권유에게 서문을 받고 함경도관찰사 이서우의 협조로 간행된 것이다. 내용의 대부분이 소차로 이루어져 있어 임진왜란 당시의 정치상황과 전말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총6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현재 종가에 5권만 소장되어 있다. <출처:충현박물관>


오리집, 1705년(숙종31)

오리 이원익 선생의 시문집이다. <오리집>은 1687년 경 증손 이상현과 문인 조경, 허목 등에 의해 처음 간행되었고, 이후 1705년 경 4세손 이존도가 이서우의 서문과 강영의 발문을 받아 속집과 함께 중간하였다. 이책은 중간본으로 1722년(경종2) 이원익의 5대손 이인복이 보완하여 펴낸 뒤, 종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다. <출처:충현박물관>


이원익 행서서간, 1626년(인조4). 이원익이 동료의 사직소식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한 편지글이다.

"조보를 통해 영감님이 사직소를 올렸다는 소식을 듣고 본가에 계시리라 생각하고, 입성하자마자 노비를 보내 문안을 드렸으나, 출타하신지 오래되었다 하니 개탄스런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저는 팔십의 쇠한 몸이라 선영 밑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칠 예정이었으나, 황공하게도 왕명이 내려져 부득이 조정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으니, 상봉할 기약이 없어 암울할 뿐입니다." <출처:충현박물관>


서간, 1595년(선조28). 1595년 이원익 선생과 함께 활동한 문인이자 학자인 정경세가 주고 받은 편지이다. 내용은 이원익에게 경북 상주의 서니들이 쌀 두바리와 버선을 보내왔는데, 이를 정경세가 마련한 것이어서 이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담고 있다. <출처:충현박물관>


서간, 1632년(인조10). 1632년 이원익이 정경세에게 보낸 편지로, 자신의 근황을 소개하고 정경세의 안부를 걱정하는 편지이다. 이원익 선생이 세상을 뜨기 2년 전에 쓰인 편지로, 이원익과 정경세의 깊은 애정을 이해할 수 있는 편지 가운데 하나이다. <출처:충현박물관>


충무공 기승, 18세기. 충무공 이순신의 유고 및 충무공과 관련된 각종 기록, 교명 등을 모아 놓은 문집이다. 1710년(숙종36)에 6권2책으로 간행되었다. <출처:충현박물관>


동고유고. 동고 이준경의 문집으로, 이원익은 이준경의 문인이었다. <동고유고>에는 이원익 선생과 관련된 글이 여러 곳에 보이는데, 이준경의 이원익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출처:충현박물관>


이원익과 이준의 문답편지, 17세기

이원익과 이준이 주고 받은 문답편지를 엮은 것으로 이준 문집의 필사본 중 일부이다. 이준은 류성룡의 문인으로,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싸운 인물로, 선조와 인조 대에 국방과 외교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던 문인이다. 이준은 이원익 선생의 신도비에 찬문을 썼을 정도로 매우 신임이 두터웠던 인물이었다. <출처:충현박물관>


창석선조속집. 이준의 문집으로 속집의 일부이다.

이원익의 교유관계
이원은 당시 성행하였던 성리학의 관념적인 논의와 당파싸움에 휩쓸리지 않고, 한 당파의 독주를 견제하는 실천하는 정치인이자 행정가였으며, 한편으로는 평소 온화한 인품과 애민정신으로 여러문인들의 존경을 받기도 하였다. 당대 정계의 원로인 동고 이준경의 문인이었던 이원익은 자신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했던 류성룡과 가까이 지내며, 남인 계열의 문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이원익을 남인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서인으로 분류되는 이항복과 이덕형과도 두터운 친분을 가지는 등, 주로 그와 같이 당파를 초월했던 인물들과 교유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박물관에는 이원익과 가깝게 교유하였던 당대의 인물들의 서책과 서간들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출처:충현박물관>


한음문집, 1668년(현종9). 이덕형의 시문집으로 12권5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1613년 계축옥사로 영창대군이 강화도에 유폐되자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덕형은 은전을 베풀자고 주장하였고 이로 인하여 비판받았을 때 이원익은 상소를 올려 그를 적극 옹호하기도 하였다. <출처:충현박물관>


백사집, 1726년(영조2). 이항복의 시문집이다. 이항복은 오성부원군에 봉군되었기 때문에 '오성대감'으로도 많이 알려졌으며, 호가 백사이다. 1590년 정철 사건의 처리를 태만하게 하였다는 이유로 위기에 처했으나, 이원익의 적극적인 옹호로 진정된 바 있다. <출처:충현박물관>


세채록 시, 1726년(영조2). 1726년 이원익의 4대손 이존도가 68세 때 작성된 것으로, 집안의 장수한 분들을 기념하는 글이다.


소학언해

중국 송나라 주희가 어린이들에게 유교의 기본 덕목인 충.효.예를 가르치기 위해 교육적 목적에서 편찬한 책으로, 조선시대 양반가에 널리 읽혀졌다. 전시된 책 역시 이원익 종가에서 전승되어 오던 것이다. 종이의 질이 우수하고 글씨도 미려한 점 등으로 보아 명문 집안의 서책임을 알 수 있으며, 한글본으로 국어사 연구에 있어서도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충현박물관>


경상. 상판의 양단이 들린 두루마리식 천판과 조각장식을 한 사랑방용 책상이다. 경상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사찰에서 불경을 올려놓고 읽을때 사용하던 상이었다.

조선시대 선비문화와 종가 사람들
종가란 성씨으 시조로부터 장자로 이어진 가문을 말하며, 예로부터 이어져온 우리의 가족제도이다. 종가에서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조상을 사당에 모시고 불천위 제사를 지내며, 한 가문의 명예와 전통을 잇는 역할을 한다. 그 중 소장가는 대종가에서 파생되어 국가에서 시호를 받은 중시조를 모시는 가문이며,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종가와 오리 이원익의 종가 역시 이에 속한다. 이원익 종가는 조선후기에 들면서 대표적인 남인가문으로 성장하였다. 그의 후손들은 이원익 선생이 생전에 당부하였던 충효와 애민정신을 받들며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이원익 종가 사람들은 대대로 장수를 누린 것으로 유명한데, 시조인 익령군 이치부터 평균 80여세에 이를 정도로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장수를 누렸다. 종가의 후손들은 대체로 지방의 수령직을 역힘하며 목민관으로서의 명성을 이어갔는데, 5대손인 이인복은 안동부사 시절, 한 겨울에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어 사람들이 묻자 "3대동안 입어본 적 없는 가죽옷을 어떻게 입을 수 있냐"고 했다는 일화에서 집안의 가풍을 집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이원익 종가의 정신을 이어받은 충현박물관은 앞으로 '조선시대 종가박물관'의 역할에서 더 나아가, 종가의 청백리 정신과 충효.애민사상을 현대사회에 널리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출처:충현박물관>


이원익 유서, 1630년(인조8). 이원익이 84세가 되던 해인 1630년에 직접 쓴 유서이다. 그 내용은 후손들 간에 우애를 잃지 말 것과 항상 검소할 것을 강조하고, 자신의 장례 역시 간소하게 치를 것을 당부하고 있어, 그의 청백리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출처:충현박물관>


이원익 신도비명. 이원익 신도비에 적혀 있는 비문의 내용을 옮겨 적은 것으로, 신도비명을 쓴 이준의 문집인 <창석집> 중, 신도비명의 내용을 분리하여 배접한 것이다. 이준의 신도비명과 함께 현재 <오리선생문집>에 전하는 이원익 묘지명의 글을 짓기도 하였다. <출처:충현박물관>


이원익 신도비 탁본


도망, 1604년(선조37년)

1604년 이원익이 아내 영일정씨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시이다. 이 만시는 만장에 쓴 것으로 장사를 지낸 후 내용은 베껴 보관하고 태우는 것이 관례이나 이원익이 손수 쓴 것이라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어 보존해온 것으로 보인다.
"상투 틀고 쪽 찔러 부부가 된 지 지금에 와서 여러해가 지났구려
 벼슬하러 사방을 나다녔으니 독수공방하는 날 얼마나 많았던가
 한 방에 함꼐 한 날이 며칠이었는가 게다가 난리도 겪고 병도 앓았지 않은가
 십여연 동안을 혼미하였으니 캄캄하다 은정이 끊어진 것
 타고난 천성은 본래 순박하였으니 평생에 악한 짓을 하지 않았다.
 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사람이 이런 액을 만났을까
 난리 속에 이리저리 피해 다닐 때 다행히도 구렁텅이에는 버려지지 않았다.
 이날에야 겨우 고향에 돌아왔는데 또 어찌 슬픈 일에 서러워야 하느냐
 이승과 저승이 둘 다 유감은 없으나 자녀들이 모두 곁에 있구나
 나는 병에 시달리며 아직 죽지를 않고 지루하게도 숨만 쉬고 있노라
 널을 어루만지며 그대를 떠나 보내니 그대 할 일 다 마친 것 부럽소
 그대를 따라갈 것 몹시 원히지 세상에 오래 사는 것 원치 않으니
 황천에서 혹시나 서로 다르게 되면 업보의 인연 응당 이전과 같으리" <출처:충현박물관>


서여손수약부연풍현, 1628년(인조6). 1628년 이원익이 연풍현감으로 부임하는 손자 수익에게 써준 당부의 글이다.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다스릴 때 유념해야 할 덕목을 정리한 것으로 자신이 지방관으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들이다. <출처:충현박물관>


이원익이 쓴 정몽주의 시, 4월1일 고밀현에서 꾀꼬리 소리를 들으며,

"한낮에 옛 현성을 지나는데
 녹음 짙은 마을에 여름바람이 푸르구나
 넌지시 벽을 닦고 시귀를 적으니
 흘러나오는 꾀꼬리의 처음 우는 소리구나" <출처:충현박물관>


고성에서, 17세기 초반

"산 아래 외로운 성엔 달이 늦게 오르니
 한번 취하여 서로 머물러도 기약은 없었네
 명년의 오늘 저녁은 어느 곳에서
 저 맑은 빛을 누구와 함께 말하리" <출처:충현박물관>


이존도 유서, 1734년. 이존도는 이원익의 4대손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선조갈문, 1592년(선조25). 이원익의 조부인 수천군 이정은의 묘갈부터 3대손인 삭령군수 이상현의 묘표에 이르기까지 집안에 전해지는 비문들의 탁본으로 모은 총3권으로 구성된 탁본첩이다. <출처:충현박물관>


이존도 영정, 1740년(영조16)


오리영우 편액, 1693년(숙종19)

1693년 10월 이관징이 쓴 편액이다. 건물은 이듬해 건립되었다. 인조가 이원익에게 하사한 관감터에 사우를 세웠다는 내력이 있어 건물의 건립연대를 확인하는데 귀중한 자료 역할을 하고 있다. 1631년(인조9) 관감당을 하사하였으나 1637년 병자호란으로 소실되어서 폐허로 남아 있다가 1694년에 이원익 서거 60주년을 기념하면서 사우인 오리영우가 건립되고,아울러 관감당도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충현박물관>


오리영우 열쇠패


차첩, 1696년(숙종22). 조선시대 관아에서 내리는 증서로, 1696년(숙종22) 정1품아문이 충훈부에서 이원익의 3세손 이증현이 사망함에 따라 3년상을 치른 뒤, 이존도를 이원익의 적장손임을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이존도가 이 차첩을 받을 당시의 나이는 38세였다. <출처:충현박물관>

 
계첩, 17세기초반. 이원익이 어느 관청의 으뜸벼슬인 도제조에 재임할 때 있었던 해당관청의 계회에 대한 계첩으로 추정된다. 관직에 호성공신이포함되어 있어, 1604년 이후의 것으로 보이며, 또한 연보에 1615년(광해군7) 사역원도제조를 사직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역원도제조일 떄의 자료로 추정된다. <출처:충현박물관>

전사통감, 18세기. 이원익의 4대손 이존도의 저술로, 중국 공자의 <춘추>에 근본을 두고, 주희의 <자치통감강목>의 범례에 근거하여 저술한 중국 역사책이다. <출처:충현박물관>


녹표. 조선시대 월급 급여명세서로, 이원익의 4세손인 정2품 자헌대부 이존도의 것이다. 조선시대 관리들의 급여는 조선전기에는 1년에 4번 계절별로 지급되었다가, 이 후 1671년(현종12)부터 월급제로 바뀌었다. 전시된 녹표에 적혀 있는 급여는 쌀2석2두, 콩 1석5두이며, 감찰과 당시 관리들의 녹봉을 담당하는 기관인 광흥창 관리의 수결이 보인다.<출처:충현박물관>


기언, 1689년(숙종15). 1689년 왕명으로 간행된 허목의 시문집이다. 일반적으로 저자의 호를 따서 '미수기언'이라고도 부른다.


선고, 18세기 중반. 이원익 선생의 5대손 이인복의 시문집이다.


열성어필, 1723년(경종3).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글씨들을 모은 첩으로 현종3년에 문종에서 효종까지의 어필을 모아 펴낸 이래로 대를 이어 간행되었다. 본 열성어필은 태조부터 경종임금까지의 어필을 모은 것으로, 1723년 이원익의 5세손인 이인복이 안동지방 부사로 재직할 때 하사받은 것이다. <출처:충현박물관>


금오계첩, 1714년(숙종40). 조선시대 사법기관인 의금부 관리들의 계모임의 참석자 명단을 기록하고 모습을 그린 것으로 금오는 의금부의 별칭이다. 이 모임은 1714년 11월에 열렸으며, 당시 종3품 중훈대부 의금부도사였던 이원익 선생의 5세손 이인복이 참석한 모임이기도 하다. <출처:충현박물관>


백패, 1750년(영조26). 1750년 2월, 이원익의 6대손이자 이인복의 둘째 아들인 이언충이 35세 때 진사시에서 2등 제17인으로 합격하였음을 증명하는 백패이다. <출처:충현박물관>


홍패, 1714년(숙종40). 1714년 이원익의 5세손 이인복이 과거시험에서 갑과 제3인에 급제하였을 때 받은 교지이다. 당시 이인복의 나이는 32세였으며, 처음 과거에 급제했던 것은 1705년 23세의 나이로 생원이 되었을 때였다. 홍패는 대과급제자들에게 내려지는 교지이며, 백패는 생원, 진사 등과 같은 소과합격자들에게 내려주는 교지이다. <출처:충현박물관>


교지, 1729년(영조5). 1729년 6월25일, 당시 61세였던 이원익 4대손 이존도에게 동지중추부사를 임명한다는 교지이다. 동지충추부사는 중추부의 종2품의 관직으로 관장하는 직무는 없과 문관과 무관 중에서 당상관으로 소임이 없는 자를 대우하기 위한 관직이다. <출처:충현박물관>


이존도의 처 권씨 정부인 교지, 1729년(영조5)

* 자료출처: 충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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