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 위치한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지에 있는 그를 기리는 백야기념관이다. 장군의 생가는 홍성에서 안면도와 태안의 서해안으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한 평야지대로 지금도 부유층의 저택들이 여럿 남아 있는 지역의 경제력이 풍부했던 고장이다. 김좌진 장군은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비교적 이른 시기에 신학문을 공부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했다고 보여지며, 일제강점기에 청산리대첩을 이루는 등 무장조직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는 분이다.
생가터에 있는 백야기념관에는 많지는 않지만 장군이 활동했던 시기에 그의 행적을 찾아볼 수 있는 여러 문서들이 전시되어 있다. 주로 만주에서 무장세력을 조직하면서 만들어진 훈련교범, 서신, 전투결과보고서 등과 그의 무장투쟁활동과 관련된 각종 공식 문서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 편이다. 이 곳 기념관에서 볼 수 있는 각종 자료들은 김좌진 장군의 업적을 돌이켜보는데도 의미가 있지만, 만주에서 일제강점기에 무장투쟁을 벌렸던 사람들의 생각과 흔적들을 되돌아 보는데 의미가 있는 기념관이 아닌가 생각된다.
독립군 사용무기.
그림에서 많이 보던 일제강점기에 사용되었던 칼
애국지사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권총
북로군정서 활동
북간도의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던 중광단은 1919년 3.1운동 이후 정의단으로 확대.개편되었다가 무장 독립투쟁을 위하여 대한군정서로 재편성되었다. 이후 1919년 12월 대한 군정서는 임시정부의 명령에 의해 북로군정서로 개칭하였으며, 총재는 서일이 담당하였다.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에 임명된 백야 김좌진 장군은 독립군의 군사훈련과 무장 독립투쟁에 전념하였으며, 사관연성소 교장으로 초급장교를 양성하는 등 군비를 확장하였다. 김좌진 등의 노력으로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 이전의 북로군정서는 총 대원 약 1,100명에 달하였으며, 무기는 소총 800정과 기관총 4정, 대포 및 수류탄 약 2,000발에 이르는 등 대규모의 군대로 성장하였다. 1920년 10월 독립군 소탕을 목적으로 일본군이 간도에 침입하자, 김좌진은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과 함께 연합부대를 형성하고,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청산리대첩을 거두었다. 이후 일본군의 반격을 피하여 만주 밀산으로 부대를 이동한 북로군정서는 대한독립군 등고 연합하여 대한 독립군단을 형성하였다. <출처:백야기념관>
북로군정서 관련자료들, 사령부 일지, 사룡부 직원명단, 군자금 납입증명서, 사관학교 졸업증, 간부 훈련 교본이 있다.
청산리대첩
1920년 10월 일제는 간도의 독립군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대교모의 군대를 출동시켰다. 이에 백야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는 군대를 2개부대로 편성하고 백두산 부근으로 이동하던 중, 10월 21일 간도 삼도구 청산리 골짜기 백운평에서 일본군 기병대를 맞이하여 전투를 개시하였다. 이 전투에서 김좌진은 일본군을 백운평 절벽 밑으로 유인한 후 일제히 공격하여 일본군 1개 중대를 섬멸하였으며, 뒤에 도착한 일본군대에게도 타격을 가한 후 퇴각하였다. 이어 22일 새벽 김좌진은 천수평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기병대를 기습하여 몰살시켰으며, 또한 추격하여 오던 일본군을 홈범도의 독립군과 합동으로 어랑촌에서 격퇴하였다. 이후 부대를 소구묘로 편성한 김좌진은 계속하여 명개골, 천보산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 청산리대첩에서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 연합부대는 일본군 약 1,200여명을 사살하는 등 독립전쟁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출처:백야기념관>
이상룡이 김좌진에게 보낸 편지, 군정서 계통도, 간도독립군 계통, 서일의 합의서
독립군과의 전투상황, 길림독구서 조회 회신
길림독군서 조회 회신, 간도사건 사상자 조사서, 간도사건 사상자 조사표
청산리대첩 전투 장면을 재현한 미니어처
청산리전투 보도 독립신문
청산리전투 결과보고서
김좌진, 홍범도부대 상황보고서, 대한독립군단 재건 취지서, 대한독립군단원 체포 보고서
군자금 모금 상황 보고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김좌진 체포인도 요구서, 신민부 예심 종결문
독립군의 이동과 대한독립군단 활동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을 이끈 백야 김좌진 장군과 북로군정서는 청산리에 패배한 일본군이 한인 마을을 습격하여 한국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하자, 민간인 피해를 줄이기 위해 청산리지역을 떠나 만주의 밀산으로 이동하였다. 1920년 12월 만주 밀산으로 이동한 북로군정서와 독립군단들은 독립군의 연합단체인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구춘선의 국민회군 등 독립군단이 모여 결성하였으며, 부총재에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 등을 선임하였다. 또한 군대의 편제로는 1개 여단을 두고 그 아래 3개 대대와 9개 중대, 27개 소대를 두었으며, 총 3,500여 독립군으로 편성되었다. 그러나 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로 건너갔다가 자유시참변을 당한 후 강제 해산되었으며, 자유시 참변에서 살아남은 독립군들은 북만주로 다시 돌아와 1922년 8월 총재에 이범윤 총사령관에 김좌진을 선임하고 대한독립군단을 재조직하였다. <출처:백야기념관>
신민부 활동
1925년 3월 북만주 영안현에서 백야 김좌진 장군은 대한독립군단과 김혁 등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정서를 통합하여 신민부를 결성하고 북만주 지역을 관할하였다. 공화주의와 민족주의를 기본 사상으로 하는 신민부는 중앙집행위원.참의원.검사원 등 3권분립제도로 조직을 구성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김혁, 위원에 김좌진 등을 선임하여 지방조직을 강화하였다. 또한 김좌진의 통솔 하에 군대를 편성하고 독립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성동사관학교를 설치하고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였다. 1925년 4월부터는 기관지 '신민보'를 발행하고 문맹퇴치, 독립정신 고취에 노력하였으며, 산업 진흥에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민부는 군정파와 민정파의 대립이 발생하여 결국 1928년 12월 해체되었다. <출처:백야기념관>
3부통합운동과 한족총연합회
1926년부터 모든 독립운동 단체들이 통합하여 하나의 단체를 결성하기 위한 민족유일당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군 단체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1928년 4월 신민부의 백야 김좌진 장군과 정의부의 김동삼 등은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3부의 군사단체를 통합하기로 하고, 그해 9월 3부 통합회의가 개최되기도 하였으나, 각 부의 이해관계로 실패하였다. 1928년 12울에는 김좌진을 비롯한 김동삼 등 신민부와 정의부.참의부의 일부가 모여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1년 내에 군정부를 성립히기로 하였으나, 김동삼 등 주요 간부들이 체포되면서 1929년 5월 해체되었다. 이후 김좌진은 신민부와 정의부 일부를 합동하여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고 주석에 취임하였다. 한족총연합회는 옛 신민부의 관할 구역을 관장하였으며 영안현에 본부를 두고, 완전한 독립과 민족의 철저한 해방, 민족생활의 안정, 혁명 민중의 조직완성 등으로, 무장활동보다는 재만 동포를 대상으로 산업육성, 자치도모 등을 꾀하였다. 그러나 1930년 1월 김좌진이 암살되자 한족자치연합회로 개편되었다가, 그해 7월 한국독립당에 흡수되었다. <출처:백야기념관>
김좌진 피살설 연구
1
929년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김좌진 장군은 1930년 만주 중동선 산시역 부근의 정미소에서 작업을 하던 중 일제 고등계 형사 김일성의 사주를 받은 박상실에 의해 암살되었다.
김좌진 장군 흉상
김좌진 약력
김좌진 장군 집안에서 사용하던 제사상
서탁과 김좌진이 서당에서 공부하면서 배운 서책
벼루
대장자강회 회장 통지사, 산술학 교재, 신민회원 판결문
김좌진이 스승에게 보낸 서한
대항광복회 부활 취지 및 연혁, 대한 광복회 판결문
김좌진 군자금 모금 활동 판결문
국수 사발
대종교 활동 자료. 김좌진 장군은 민족종교인 대종교와 관련이 많았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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