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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조선시대 한양의 중인들이 살았던 모습을 '웃대사람들'이라는 주제로 특별전시회를 했다. 웃대라 인왕산 기슭 아래 지금의 종로구 사직동.통인동.옥인등의 지역으로 경복궁 서쪽에서 인왕산 아래까지의 지역을 말한다. 이 지역은 북한산과 인왕산을 배경으로 한 경치가 좋은 곳으로 정선의 대표작 '인왕재색도'에 나타난 지역을 말하며, 실제로 겸재 정선은 이외에도 이지역 풍경이 담긴 작품을 여러점 남겨놓고 있다. 중인들이 살았던 웃대는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옥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지역의 실제 면적은 여의도의 절반정도로 조선시대 이지역에는 궁궐과 육조를 비롯한 관아와 가까웠기때문에 관아의 하급관리인 서리나, 궁궐의 신부름 등 잡일을 보던 별감 등이 주로 많이 살았다. 이 들 중인들은 조선후기에 옥계시를 중심으로 시를 매개로 교류했으며, 많은 계모임들을 가졌던 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다. 지금의 하급공무원들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에서 부정부패 등 폐해를 많이 일으키기도 한 계층이기는 하지만, 실무적 능력과 재능은 상당히 뛰어났던 계층으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상당히 많은 부를 축적하고 사회지배층으로 변신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웃대 중인'전은 조선후기 웃대라는 장소에서 펼쳐졌던 시사와 여기에 참여했던 중인들을 조명하는 특별전입니다. 인왕산 기슭인 웃대는 예로부터 도심속 명승지였으며, 중인들의 시사는 서울만이 갖고 있던 특징적인 문화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시구성은 크게 '웃대', '웃대의 시사', '웃대 문화를 이끌어간 이들은 누구인가', '웃대에서 청계천으로', '웃대 중인들이 바라본 한양의 보통사람들', '오늘날의 웃대' 등 6개 주제로 나뉘어 집니다. 먼저 '웃대'에서는 지도와 옛그림, 각종 문헌 기록을 통해 웃대가 갖고 있던 장소성과 특징을 확인하고, '웃대의 시사'에서는 중인문화의 절정을 보여주는 옥계시사를 중심으로 시사의 역사와 중인들의 의식.생활.예술 문화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그들은 시를 매개로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냈고 공동시집과 전기집을 발간하여 동류의식을 공유 하였습니다. '웃대 문화를 이끌어간 이들은 누구인가'에서는 시사에 참여했던 중인이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그리고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중인들의 통청운동을 살펴봅니다. '웃대에서 청계천으로'에서는 중인문화의 중심이 청계천 광교로 옮겨진 후 중인 시사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웃대 중인들이 바라본 한양의 보통사람들'에서는 권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대로 일을 처리해 나갔던 호조서리 '김수팽', 본국에서 보다 오히려 일본에서 시선으로 추앙받았던 역관 '이언진' 등과 같은 당시 서울사람의 다양한 군상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의 웃대'에서는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볼 수 있도록 오늘날 웃대 모습과 그 속에서 담겨있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도성대지도>에 나타난 한양웃대. 이 곳에는 지명에서 당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성격과 명소를 알 수 있다.

웃대는 어디인가?
웃대는 청계천 윗 지역으로 보통 경복궁 서쪽에서부터 인왕산 기슭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이곳은 현재 종로구 사직동.체부동.통인동.필운동.누상동.누하동.옥인동.신교동.청운동 일대이다. 이 지역은 동명은 많지만 실재 인왕산 지역을 제외하면 여의도 절반을 약간 넘는 면적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청풍계: 인왕산 동쪽 기슭의 북쪽 종로구 청운동 54번지 일대 골짜기를 일컫는 이름이다.
옥류동: 종로구 옥인동.통인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인데서 유래되었다.
누각동: 누상동에 있던 마을로, 이곳에 광해군 때 세운 인경궁 누각이 있었다고 전하는데서 마을이 유래되었다.
필운대: 선조대 이항복이 그의 장인 도원수 권율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면서 호를 필운이라 하고, 부근 바위에 '필운대' 세 자를 새겼다.
인달방: 조선초기부터 있던 한성부 서부9방 중의 하나이다.
도가동 필운동에 있던 마을로, 물건을 제조.판매하는 도가집이 있어 유래되었다.
송목동: 누상동.누하동.필운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소나무가 많아 유래되었다.
체부청동: 비상시에 군대를 지휘하거나 기타 군사업무를 마아보는 체찰사부가 있었기에 유래되었다.
전립동: 벙거지를 만드는 집이 있어 유래되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도성대지도(8세기 중반)와 수선전도(1864). 조선후기 서울의 모습을 상세하게 그린 대표적인 지도이다.

웃대의 원형
웃대는 북한산과 인왕산을 배경으로 한양 도성의 서북쪽에 입지한 지역을 일컫튼다. 이 지역은 입지마다 풍광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계층도 사뭇 달랐다. 왕족과 권력층의 세거지가 주로 웃대의 북쪽에 입지했던 반면, 중인들의 거주지는 인왕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옥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한양도성의 빼어난 두 명산이 연결된 웃대의 북쪽과 서쪽 언덕에는 한양을 조망하는 명승지가 형성되었다. 남동쪽으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서는 작은 필지들로 세분화된 골목길이 만들어지면서 주거지가 들어섰다. 백운동천과 옥류동천의 두 줄기 물길은 세종이 태어난 준수방 부근에서 합류하여 도성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으로 흘러간다. 옥류동의 물길을 따라서는 조선후기 중인들의 풍류와 문예의 공간인 천수경의 송석원에서 옥계시사 등 중인문학이 꽃피기도 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인왕제색도, 정선, 1751년, 삼성미술관 리움


옥동척강, 정선, 1739년, 삼성미술관 리움. 청풍계와 옥동의 지형관계를 알 수 있는 그림이다. 조현명을 비롯한 문인들이 이춘제의 후원이 서원에서 모임을 가진 뒤 옥류동에서 청풍계로 넘어가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수성구지, 정선, 1750년경, 국립중앙박물관. 진본은 아니고 디스플레이로 그림을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웃대 마을의 모습과 가옥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직동 뒷편 배화여고 아래쪽 동네를 말하는 것 같으며 왼편 언덕이 종로도서관이 있는 언덕으로 생각된다.


청휘각 <장동팔경첩>, 정선, 1745년, 국립중앙박물관


청풍계 <장동팔경첩>, 정선, 1745년, 국립중앙박물관. 청풍계는 자하문 아래에서 시작하여 흐르는 청계천 상류지역을 말하며 이 지역은 당시에도 부유층들이 살았던 곳이라 한다.


필운대 암각시 탁본


필운대 각자 탁본. 백사 이항복이 처가집인 권율장군 집에 얹혀 살던 시절 바위에 적은 글씨라고 한다. 필운대는 자하문 아래 청계천 상류지역을 말한다.

웃대 사람들
인왕산 기슭에 자리한 웃대는 궁궐과 관아에 가까웠기때문에 서리나 별감 혹은 겸인들이 많이 살았다. 서리는 육조나 그 주변 관아에 근무하였던 하급관리였으며, 별감은 왕명의 전달, 궁궐의 관리, 임금.왕비.세자의 잔심부름 등을 했던 액정서에 소속된 잡직관이었다. 그리고 겸인은 원래 양반가의 하인이었는데 조선 후기 당쟁을 거치면서 세도가와 결탁하여 힘있는 관청의 서리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웃대 사람들의 성향과 말씨. 정래교의 '완암집'에 실려 있는 <임준원전>과 황성신문을 보면, 웃대 사람들의 성향과 말씨를 알 수 있다.

0 경성의 민속은 남과 북이 다르다, ... 백련봉 서쪽에서 필운대까지가 북부인데 주로 가난한 집들로 얻어먹는 사람들이 산다. 그러나 때때로 의협 있는 무리들이 의기로 서로 사귀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며, 약속을 중히 여긴다. 또 시인 문사들이 시절마다 서로 모여 다니며 자연속의 즐거움을 맘껏 누렸다. 마음이 내키면 시를 읊었는데, 많이 짓는 것을 자랑하고 곱게 짓기를 다투었다. 풍속이 그러했던 것이다.
 - 정래교, 임준원전, 완암집 권4 -
0 사대부의 말투는 극히 화미절이하며, 북촌 사람들의 말투는 매우 부드럽고 조심스러우며, 남촌 사람들의 말투는 빠르며, 상촌 사람을의 말투는 공경스러우며, 중촌 사람들의 말투는 기민하며, 하촌 사람들의 말투는 상스러우며 ....
- 황성신문, 1900년 10월 9일 -
0 경복궁의 남쪽은 육조이다. 그 서쪽은 좁은 땅이다. 때문에 서리들이 많이 살며 일에 익숙하고 질박한이 적다.
- 이가환, 옥계청유첩서, 시문초 권2 -
0 상촌인은 평민 중에서 각 부의 서리 및 공경가의 겸인이 되는 자인데, 그들은 평민 중에서 가장 우수한 자라고 칭한다.
- 정교. 대한계년사 권3, 1898년 -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우대는 육조 이하 각사에 소속된 이배.고직 족속이 살되 특히 다동.상사동 등지에 상고, 통칭 시정배가 살았고, 아래대는 각종 군속이 살았으며, 특히 궁가를 중심으로 하여 경복궁 서편 누하동 근처는 소위 대전별간파들이 살고....
 - 녜로 보고 지금으로 본 서울 중심세력의 유동, 개벽 경성호 제5년(1924) 6월호


인달방에 거주했던 서리 박창문의 준호구

1816년 한성부에서 서리 박창문에게 발급해준 준호구이다. 준호구는 3년에 한번씩 실시된 호구조사자료를 토대로 발급해 주었다. 이 문서를 보면 한성부 서부 인달방 제9통 제3호에는 사복시 서리 박창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당시 53세였던 그는 처, 아들, 며느리 2명과 함께 여종 둘을 거느리고 살았다. 서부 인달방은 인왕산 아래 지금의 웃대 일대에 해당한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한경지략(유본예, 1830년)에 묘사단 누각동에 대한 설명. "누각동은 인왕산 밑에 있다. 연산 때 누각을 지었던 곳이므로 지금도 이 근처에 서리들이 많이 살고 있고 사대부들은 살지 않는다."

장혼, 정조의 편찬사업에 참여한 교정자
한쪽다리를 절었지만 집이 가난하여 몸소 땔나무를 하고 물 긷는 일을 하였다. ... 장성하여서는 널리 배우고 잘 기억하였으며 더욱 시를 잘하였다. 1790년(정조14)에 책을 읽어가며 교정을 보는 감인소 사준에 충원되었는데, 정조가 편찬에 참여한 여러 책들 가운데 장혼의 교정을 거친 것은 모두 선본이었다.  - 조희룡, 장혼전, 호산외기에서 -


몽유편, 장혼, 1810년, 국립중앙도서관. 장혼은 스스로 목활자를 만들어 아동과 청소년을 가르치기 위한 교재를 간행하였는데 어휘집인 <몽유편>도 그 중의 하나이다. 난해한 한자나 일상적인 용어 등에 한글로 토를 달았는데 책의 대상을 아동을 포함한 일반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조수삼, 뛰어난 언어능력의 소유자
풍채가 아름다고산수를 즐기는 기풍이 있어 문사는 한량없이 넓었으며, 시에 가장 뛰어났다. 세상 사람들은 추재가 지닌 복이 모두 열 가지라고 하면서, 남들은 그 가운데 하나만 지녀도 평생 만족할 것이라 하였다. 그 열가지란 풍채와 태도, 시문, 공령, 의학, 바둑, 서예, 기억력, 담론, 복택, 장수였다. 여섯번이나 중국 땅을 유람했는데, 그가 처음 중국에 갔을 때 도주에 우연히 강남지방 사람을 만나 함께 수레를 타고 가는 동안 중국말을 다 배워 연경사람들과 말을 할 때 필담이나 통역이 필요없었다고 한다.


추재집, 조수삼, 1929년, 국립중앙도서관. 조수삼의 시를 애송하던 김진환이 편집하여 1939년 간행하였다. 권7의 <기이>는 제목 아래 간단한 인물중심의 일화를 적고 그 내용을 칠언율시로 읊었다. 소재로 다른 71명은 온갖 신분의 사람으로 이름이 없으면 별명이나 모습을 묘사하는 식으로 각각 짧은 일화를 소개하였다.

* 자료출처: 서울시립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