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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중인은 양반 사재부와 일반 평민인 양인의 중간 신분에 속하는 계급층이나 실제로 경국대전을 비롯한 조선시대 법전 등에는 중인신분에 대한 특별한 규정이 없으며, 조선의 법제도에 따르면 양인이면 누구나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기때문에 법률적으로 속박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서을출신은 관직진출 등에서 제한이 있었기때문에 이들을 일반 양인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중인이라는 관습적인 명칭이 생긴것으로 보이며, 서울 인왕산 자락 웃대에 살던 관아의 서리, 역관, 의관, 음양관, 화원 등 기술직에 종사했던 하급관리들과 지방의 향리.아전 등 중간계층을 통칭해서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사회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장자상속에 따른 토지겸병에 따른 계급의 고착화에 따라서 이들 중간계층도 차츰 세습화,계급화되어 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변화와 함께 중앙관청의 행정실무와 기술직을 맡았던 계층들은 전문적인 지식과 행정능력을 바탕으로 착취와 비행을 일삼으면서 일정 수준 이상으로 경제력을 가진 계층이 되었다. 이들은 양반들을 상대하면서 행정실무에 종사하고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 언행이 상당히 세련되었고 대인관계가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시모임인 시사나 친목계 등을 조직하면서 나름대로의 중인문화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는 서구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이들이 근대사회로 들어서면서 부르조아 계급을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중인 명칭의 형성시기. 중인이라는 명칭이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시기는 중인의 세습화가 높아졌던 17세기경이다. 조선후기 문헌에서는 이들 중인계층에 대한 당시 사람들이 생각을 알아볼 수 있다. 중인은 경국대전을 비롯한 법제도에 없는 계층으로 조선후기에 관념적으로 생긴 계층이라 할 수 있다.

"인조대 '통의 절목'을 내려주셨으니, 서얼의 과거 응시를 허락하고 유학하는 자는 업유라 칭하고 무학하는 자는 업무로 칭하되 유학을 함부로 칭하는 자는 군보로 내리도록 하고 사역 이하 중인으로 소속시키도록 하였다" - <적얼명분변>, 행하술 -

"저희들이 제학을 세업하여 지체가 비록 낮고 미천하나 본래는 구초 이래 구별된 자들이 아니고 재능에 따라 수용하는 것이 옛 상식이었습니다. <대전통편> 에도 의.역.율.역 등에 정통한 자는 경외현관을 계수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 문헌을 훑어보면 한 구절도 벼슬길이 막힌다는 글구가 없는 것입니다. 인조 이후 의역은 그 업을 세습하게 되고 비로소 중인 명칭이 생겼습니다." - <경릉 행행 시 올리기로 했던 상언초문>, 상원과방 -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중인명칭의 유래
중인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 있다. 이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했던 곳이 서울의 중간지대이므로 중인이라 했다는 설, 양반도 평민도 아닌 중간계층이라는 의미로 중인이라는 설, 당파싸움에 휘둘리지 않고 중립을 지켜서 중인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지역개념설과 계층개념설. 중인이라는 개념은 여러가지가 있는 데 그 중 서울에서 하급관리가 살았던 지역을 말하는 지역개념설과 정조가 언급한 하급관리를 비롯한 중인들의 품성과 언행, 살아왔던 배경 등을 고려한 계층개념설이 있다.

"대대로 이어온 국법에 중인과 소민을 조시(시전) 근처에 살도록 허가하여 생리(생활)에 편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중로'라는 이름이 나오게 된 바이다" - 비변사등록 11책, 1742년(영조18) 10월 11일 기사에서 -

"대개 중인의 무리들은 양반도 아니고 상인도 아닌 그 중간에 있기때문에 가장 교화하기 어려운 자들이다" - 정조실록 33책, 1791년(정조15) 11월11일 기사에서 -

"예로부터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재주를 안고 한을 품고서 올바른 도리를 저버리고 무득 정도를 벗어나 다른 길로 빠져 들어가는 수가 많다. 이른바 중인이라는 자들은 나아가 사대부가 될 수도 없고 물러나 상민이 될 수도 없어 스스로 불우한 처지에 절망하여 실제적인 일에는 뜻이 없다." - 정조실록 15책, 1799년(정조23) 5월5일 기사에서 -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정치개념설. 또다른 개념으로는 조선후기 당쟁이 오랜세월을 거치면서 당파가 고착되고, 이에 속하지 못한 계층을 일컫는 정치개념설이 있다.

"대저 중인세가의 보첩을 고열하면 세수관직이 거개 십세내외에 불출하니 그 연대를 추고하면 당론시기하던 때라, 혹 동인에, 혹 서인에, 혹 남인에, 혹 북인에 각기 사상을 따라 분문 조호하고 자신과 다른 자를 배척하는 차제에 당론에 불입한 자는 중인이니, 그후 수 삼백년 당론시대에 중인이 고귀한 관직을 얻지 못함은 이유가 확유하도고. .... 그런 즉 중인의 중자는 동서남북에 치우치지 않은 중립의 중자가 적당한 줄로 사려함"  - 현은, 중인내력의 약고에서 - <출처:서울역사박물관>



경국대전, 1603년. 조선의 제도를 정리한 법전이 경국대전에는 중인신분에 대해서 언급이 없고 서얼의 관직진출에 대한 제한만 있다. 중인신분은 관념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반계수록, 18세기. 반계수록에 중인에 대한 개념을 정리해 놓고 있다.

"서족은 본래 서인이지만 관직에 나아가게 된 자와 교생(서원에 소속된 학생)이 된 자들을 속칭 중이라 한다."  - 유형원, 향약사목, 반계수록 권9 -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홍재전서, 정조 1787년.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는 중인에 대한 개념정리를 하고 있다. 정조가 중인계층에 대해서 여러번 언급한 것으로 보아서 이들 계층에 대한 좋지않은 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인에는 편교.계사.의원.역관.일관.율관.창재.상기.사자관.화원.녹사의 칭호가 있다. 시정에는 액속.조리.전민의 이름이 있다. 이것이 중인과 시정의 명분이다." - 정조, 책문 명문조, 홍재전서 권 11 -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의관
의관은 의술에 종사하는 관원으로, 의관이 되기 위해서는 전의감 주관으로 치러지는 의과와 일종의 승진시험인 취재에 합격해야 했다. 의과는 취재와 달리 의학 생도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 의학을 공부한 양인 이상이면 응시할 수 있었다. 취재는 혜민서와 전의감에 소속된 의학 생도를 대상으로 했는데, 아무리 취재 성적이 좋다 해도 의과에 합격하지 않으면 원칙적으로 의관의 고위직에 오를 수 없었다. 의관도 기술직 관원으로 기본적으로 한품서용에 의해 계속적인 승진이 보장되지 않았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의관 역시 역관과 마찬가지로 오를 수 있는 최고 직책은 당하관 정3품인 내의원의 정이었다. 이밖에 의과와 취재를 통하지 않고 의관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정원이 12명으로 규정되어 있는 의약동참으로 추천을 받는 일인데, 대부분 양반인 유의에서 나왔다. 하지만 특별한 공로를 인정받은 민간 의원에서도 등용되는 일이 있었다. 불을 달군 침을 사용하는 번침법을 고안한 인조 때 이형익, 종기 치료에 독보적이었던 숙종 때 백광현, 집안에서 전해지는 고약을 사용하여 임금 머리의 부스럼을 낫게 한 정조 때 피재길 등이 그러하다. 이들의 기록은 청구야담, 이향견문록 등에서 보이는데, 특히 피재길의 경우 내의원 침의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1739년(영조17) 7월 16일 기사에 보인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침구경험방, 허임, 효력있는 침구법을 모아서 기록한 의서


두창경험방, 박진희. 천연두의 증세와 처방을 기록한 의서


휴대용약갑


침놓는 방법을 그린 그림


침통

역관
역관은 외국 사신의 영접, 외국으로 가는 사신단의 수행과 통역, 번역 등을 주된 업무로 담당하였던 기술직 관원이었다. 잡과의 하나인 역과(한학.왜학.몽학.여진학)를 통해 충원되었는데, 초시와 복시 2단계의 시험을 거쳐 최종합격자를 선발하였다. 역과에는 사역원 생도와 관원들이 응시할 수 있었다. 사역원은 통역담당 관서이자 교육기관으로 생도방이라는 교육시설을 두고 언어영역별로 생도를 모집하였는데, 생도들은 교육기간 중 취재(과거와는 별도로 하급관리를 뽑기 위해 실시하던 임용시험)라는 시험을 통해 역관으로 임용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역관의 고위직 진출을 위해서는 역과를 통해야 했다. 역과 합격자는 합격증서로 백패를 받았는데, 백패는 문과 응시생들의 예비시험에 해당하는 소과에 합격할 때 받는 문서이다. 조선초기에는 모든 과거합격자가 홍패를 받았지만 역관을 기술직으로 천시하면서 문과합격자와 구별하여 백패를 지급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역관.의관 등 기술직 관원의 경우 고위 공직자로 나아가는 데 제한을 받았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역관을 교육하고 양성하는 사역원의 정3품 부정이 역관이 오를 수 잇는 최고의 자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역관은 대대로 역관직을 세습하거나 다른 기술직 관원으로 진출할 수 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역과 합격자를 많이 배출한 역관 집안에는 남양 홍씨, 밀양 변씨, 천녕 현씨, 우봉 김씨 집안 등이 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교회선생안, 19세기말. 사역원에 소속된 역관은 외국어에 대한 번역과 통역을 담당하던 사람들로 지금의 외교부 소속 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이 제대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학식을 가져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중국을 방문하는 사절단을 수행하면서 무역을 통해서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사원원에 소속된 역대 '교회'들의 명단이 수록된 책이다. 사역원은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 등의 외국어에 대한 번역, 통역 및 문서작성을 담당한 기관이었고, '교회'라는 관직은 해당 과목별로 외국어 교수 역할을 수행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중간노걸대언해, 18세기. 역관들은 실용적인 회화가 가능했던 사람으로 대중무역에 종사했던 상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국제정세에 민감했던 사람들로 보인다.

역관들의 외국어 학습 및 역과시용으로 사역원에서 간행한 중국어 교습책이다. 14세기에 고려상인이 중국에 장사하러 가면서 실제로 부딪치는 여러 사건을 생생한 대화체로 기록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김인즙이 역관이 되기까지
김인즙(1871~?)은 조선후기 전형적인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계영은 사자관(승문원.규장각에 소속되어 문서를 정서하던 관원)으로 관직생활을 하였고, 후에는 첨지중추부사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김인즙에게는 율학교수 김우영의 양자로 들어간 김인항(1868~?)이라는 형이 있었다. 김인즙은 6살이 되던 1876년에 승문원 이습 과정에서 정식으로 선발되었는데, 형 김인항을 포함하여 총 19명이 뽑혔다. 이습 과정에서는 기본적인 한학 학습은 물론 글씨 연습, 관문서 작성, 중국문서에 사용되는 이문학습 등을 골고루 익혔다. 10년이 지난 1886년에 이르러 '효력부위(정9품) 용양위 부사용'이라는 정식 관원의 품계와 직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2년 뒤인 1888년에 김인항과 함께 역과에 응시하여 나란히 합격하였다. 김인즙은 정식 역관이 되기까지 12년이라는 세월을 견습생활로 보냈던 것이다.


김인즙 차첩, 1876년. 김인즙이라는 역관은 어린나이에 그 재주와 역량을 인정받아 역관생활을 시작했지만, 실제로 역과에 합격하여 정식관리가 되가까지는 12년이라는 긴 시간의 교육기관이 필요했다고 한다. 지금의 외교관과 마찬가지로 상당한 수준의 교육이 필요했던 전문직이라 할 수 있다.

1876년 3월에 승문원에서 동몽 김인즙을 승문원 이습(견습생)으로 선발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당시 김인즙의 나이는 6세에 부과하였으나 글재주가 있어 어린 나이부터 이미 역관 후보생으로서의 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시대 승문원은 중국, 일본 등과 주고 받는 문서를 전문적으로 작성하던 기관으로서 해당분야의 전문 관원이 배치되었고, 분야별 양성교육을 실시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김인즙 교습. 역관에 군직이 부여되었던 것은 비상시에 참전하여 외교적인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86년 5월에 병조에서 발급한 인사 문서로서 사자관 이습 신분인 김인즙을 효력부위(정9품) 용양위 부사용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사역원 소속 관원들에게는 의례히 군직이 부여되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김인즙 역과백패

1888년 5월 예조에서 발급한 과거 합격 문서로서 사역원 한학생도 신분인 김인즙이 역과에 응시하여 2등 제7인으로 합격하였다는 내용이다. 조선시대에는 생원.진사시 합격자와 잡과 합격자에게 백패라는 합격증서를 발급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