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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중인은 경국대전에 정확하게 그 신분에 대해서 명시한 바가 없으며, '경국대전'에 정의된 '한품사용조'라는 규정에 의하여 그 적용범위가 기술직을 비롯한 하급관리에 관례적으로 적용되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한품사용자'란 2품이상을 지낸 자의 서얼들을 기술직이나 하급직으로 진출하게 해주는 제도로 과거진출에 제한이 있었던 당시 고위직의 서얼들에게 특혜를 주는 조항이었으나, 조선중기 인조대에 의관이 세습직으로 변하면서 관례적으로 계층화되면서 일반 기술직에도 일괄적으로 이 조항이 적용되면서 이들은 관직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홍문관 등 삼사관직에 오를 수 없도록 왜곡하여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영.정조대 이후에 이들은 다양한 형태의 청원 등을 통해 신분을 한계를 뛰어 넘고자 했다. 이들은 구한말에 들어서면서 외국어능력을 비롯한 다양한 전문지식과 실무능력으로 개화세력에 적극 참여했으며, 현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일부는 친일을 통해, 일부는 전문지식을 활용하여 부를 축적하고 사회주도세력으로 변신한 것으로 보인다.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던 중인들, 통청운동
중인과 서얼은 '경국대전'의 한품사용조로 인해 중서로 병칭하여 부르는 관례가 있었다. 이들은 조선왕조 관직의 꽃이라 하던 청직(글로써 업무를 수행하는 문한관으로 주로 홍문관.사간원.서헌부 등 삼사관직)에 오를 수 없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서얼계층에서 먼저 자신들에게도 벼슬길을 열어달라는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1724년 영조 즉위 후 시작된 서얼들의 통청운동은, 18세기에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1777년(정조1) 3월 정유절목의 발표로 이어졌다. 이로써 규장각 검서관에 서울 출신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이 등용되었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한 서얼들의 통청운동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1851년(철종2) 4월 15일 "서류의 허통을 명하노니 모든 사환에 있어서 각별히 수용하라"는 조처가 내려졌다. 이처럼 서얼들의 통청운동이 어느정도 결실을 맺자, 이에 자극을 받은 기술직 중인들이 1851년 4월 25일 통례원에 모여 통문을 만들며 중인 통청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하버드 연청도서관 소장의 '상원과장'(역과 합격자 명부를 적은책)에 상세히 전해지고 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구한말 '상원과방'이라는 책에 통례문에서 통문을 돌린 기록이 묘사되어 있다.

"오래도록 막혀 있으면 반드시 터놓아야 하고 원한이 쌓이면 반드시 풀어야 하는 것이 천리지생이다. 중서의 벼슬길이 막힌 일은 우리나라의 편벽된 일로 원통하고 답답함을 품은 지 이에 몇백년이 되었다. 서족은 다행이 조가의 더할 나위 없이 정당한 성덕을 입어 문관은 승문원, 무관은 선전관에 임용되고 있는데, 우리들 중인명색은 패택의 시대를 맞아 홀로 함께 은혜를 입지 못하니 향유지탄조차 없겠는가? 이제 바야흐르 의논을 모아 글을 써서 원통함을 호소하고자 먼저 통문을 발하노니 이달 29일 마동에 있는 홍현보의 집에 모여 상의하고자 한다. " _ 1851년, 통례원에서 통문을 돌리다, 상원과방 -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이 기사의 끝에는 통례원 방효선 등 45인이 함께 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정확히 누가 참석하였는지는 명단에 적혀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당시 중인들은 통례원.관상감.사역원.전의감.혜민서.율학.산학.도화서.내의원.사자청.검루청의 대표자들이 도화서에 모여 각 관청별로 통청운동을 담당할 유사들을 정하고, 총책임자을 맡을 도유사도 뽑았다. 이후 7월 13일에는 각 관청별로 거사자금을 걷었는데, 1670명에게 234냥이 모금되었다. 이처럼 3개월 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마침내 임금에게 글을 올리는 거사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상원과방에 기록된 철종의 경릉 행차시 올릴 목적으로 작성된 상언. 실제로 올렸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저희들이 제학을 세업하여 지체가 낮고 미천하나 본래는 국초 이래 구별.계한된 자들이 아니고 재능에 따라 수용하는 것이 옛 상식이었고, 대전통편에도 의.역.율.역 등에 정통한 자는 경회현관을 계수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 문헌을 훑어보면 한 구절도 벼슬길이 막힌다는 글구가 없는 것입니다. 인조 이후 의역은 그 업을 세습하게 되고 비로소 중인의 명칭이 생겼습니다. ...문계의 통청, 음로(조상의 공덕으로 벼슬을 얻을 수 있는 길)의 사송을 한미한 사람에까지 미치면서 신 등만이 홀로 크고 작은 과거에 급제한 영예를 안은 자가 있더라도 철한이 된 듯 한 번도 벼슬자리의 후보에 추천되지 않고, 뛰어난 임금이 다스리는 시대의 버려지는 물건이 되어도 원통한 죄를 뒤집어 쓰는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습니다." - 1851년, 경릉 행행 시 올리기로 했던 상언초문, 상원과방 -  <출처:서울역사박물관>

1,872인의 이름으로 올린 이 상언초문을 보면 당시 중인의 처절한 설움이 느껴진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조선 초 중인이라는 신분이 따로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인조대에 들어와 의역이 세습되면서 중인이라는 명칭이 생겨났고 높은 벼슬길에도 오를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서얼의 통청운동이 성공한 뒤 자신들만 청직에 오를 수 없게 된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어떤 처벌이 있더라도 '영원히 우회하는 바가 없다'고 마무리 지었다. '상원과방'에는 '경릉 행행 시 올린 상언초문'이 실려 있으나 실록에는 단지 철종이 '경릉과 건원릉에 찾아가 친제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웃대에서 청계천으로
웃대의 중인시사는 개항 직후인 1876년에 결성된 육교시사로 이어지면서 청계천으로 활동무대를 옮겨갔다. '육교'는 청계천 하류에서 6번째 다리인 광교의 별칭으로 이 일대는 역관과 의관 등 기술직 중인들의 집중적인 거주지였다. 경아전이 중심이 되었던 웃대 시사들과 달리 육교시사는 기술직 중인들이 중심을 이루었는데, 광교 일대 동인들의 집을 돌아가면서 시모임을 가졌다. 주요 동인은 강위, 백춘배, 김석준, 배전, 김재옥, 지운영, 변위, 김경수, 방승혁 등이 있다. 육교시사는 전통적인 시사의 형식을 빌어 모임을 가졌지만 계급적 울분이나 강개를 토로하던 성격에서 벗어나 북학에서 개화로 변화하는 교량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맹주이던 강위는 추사의 제자로 북학파와 개화파를 이어준 대표적 인물이었다. 대부분이 의.역관이었던 육교시사 동인들은 직업적 특성상 조선말기 서양 세력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상황에서 발빠른 행보를 보여주었다. 개화 상소를 올리고 개화서를 수입하여 널리 알리는 외에 종두법 등 서양의학을 수입 보급하는 등 선진문화의 수입과 계몽에 앞장섰다. 아울러 사회개혁에 대한 강열한 의지를 불태우던 혁신세력으로 정치적 막후 역할 내지 행동대가 되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배전의 근대의식
배전(1843~1899)은 광교부근에 경매실이란 서실을 두고 육교시사의 동인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개화파 박제형이 쓴 '근세조선정감'이란 책의 평어를 썼는데, 이 책은 박제형이 1882년 제3차 수신사의 수원으로 일본에 갔을 때 대원군과 한국의 정치현실에 대한 일본 조정과 민간의 그릇된 평가를 보고 발분하여 쓴 것이었다. 이 책의 각 항목마다 평어를 쓴 배전은, 대원군 및 그 치적에 대한 자기 나름의 독자적 견해로 올바른 평가를 보여주고자 했다. 더불어 이 평어를 통해 배전의 개화사상과 주장도 엿볼 수 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개화파 박제형이 쓴 '근세조선정감'이란 책에 배전은 평어를 썼는데, 대원군과 한국의 정치현실에 대한 일본 조정과 민간의 그릇된 평가를 보고 발분하여 쓴 것이었다

"서경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고 이미 정녕하게 말했다. 대개 임금은 백성을 위해서 세우는 것이고 백성이 임금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면 하나의 사회에는 반드시 지혜와 의기 있는 자를 택해서 회장으로 삼는데 나라도 또한 이와 같다. 까닭에 서양말에 '천하를 사회라고 한다면 사회의 총리는 모름지기덕 있는 자로 뽑아야 한다.'하였다. ... 미국에서 대통령을 선거하는 것은 마고에 지극히 공정한 법이다. 임금이 그 위를 사유로 하고 천하를 세업으로 자손에게 전함으로써 문득 헤아릴 수 없는 폐단이 생긴다." - 배전의 평문 중, 근세조선정감 -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이처럼 배전은 임금은 백성을 위해 세워졌으니 백성의 권리를 보호해 주어야 하며, 나아가 백성이 지혜로운 사람을 임금으로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세기말 조선의 개화사상가 배전은 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미국의 대통령선거를 꼽았던 것이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종두법을 실시한 한말의 개화인, 지석영
지석영(1855~1935)은 역관집안 출신으로 1882년 임오군란 직후 사회정세의 급변이라는 배경에서 개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는데, 이를 모든 국민에게 펼치려면 국문을 활용해야 한다고 여기 국문보금운동의 일환으로 '자전석요'와 '언문'이라는 사전류를 펴냈다. 지석영의 활동 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음 널리 알려져 있듯이 종두법의 보금에 관한 일이다. 1876년 육교시사 동인 박영선으로부터 '종두귀감'을 받아본 지석영은 이에 자극을 받에, 1879년 부산의 일본 병원인 제생의원에 가서 종두법을 배웠다. 이어 1880년에 제2차 수신사 일행을 따라 일본에 가서 종두약 제조법을 배워서 돌아왔다. 당시 개화파와 수구파의 정권다툼에 의해 개화파 입장에 서 있던 지석영의 행보가 결정되기도 하였지만, 그는 꾸준히 새로운 의학 보급에 힘썼다. 1885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학책이라고 볼 수 있는 '우두신설'을 간행하였고, 1891년에는 위생과 예방의학을 쉽게 설명한 '신학신설'을 지었는데, 일반 민중들도 일기 쉽도록 국문으로 지어졌다. 1895년에는 '종두규칙'을 제정.공포하여,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생후 70일부터 1년 사이에 의무적으로 접종을 실시하고, 어른들도 차례로 접종하도록 규정하였다. 이후로도 그는 종두 부급을 노력할 뿐 아니라, 서양의학 보급과 전염병 예방을 위한 계몽활동에 앞장섰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종두실시광고, 1880년

웃대 중인들이 바라본 한양의 보통사람들
조희룡의 '호산외기', 유재건의 '이향견문록', 이경민의 '희조일사'에는 의.역관 등 전문직 중인에서 가객.책장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다.

이언진, 시선으로 추앙받다.
이언진(1740~1766)은 18세기 중반의 역관으로, 시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1759년(영조35)에 역관이 된 이언진은 1763년(영조39)에는 24살의 나이에 물건을 관리하는 압물판사로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다. 일본에 도착한 이래 이언진은 시를 짓는 재주로 큰 관심을 끌었는데, 이곳에서의 일화가 '이향견문록'에 상세히 전하고 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송목관신여고, 이언진, 1860년. 이언진의 시문집으로 손자 진거와 종인.경민 등이 편집.간행하였다. 이언진의 시는 분량이 방대하였으나 괴벽성이 있던 그가 모두 불살라 버려서 아내가 빼앗은 일부만이 이 책에 수록되되어 전한다. '타다 남은 원고'라는 책이름도 이 때문에 붙여졌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최북, 너희가 나느냐 내그림값을
한 귀인이 최북에게 그림을 요구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자 장차 위협하려 하였다. 최북이 분노하여 말했다. "남이 나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리는구나!" 곧 자신의 한눈을 찔러 멀게 하었다. 늙어서는 한쪽에는 안경를 낄 뿐이었다. 나이 49세에 죽으니 사람들이 '칠칠七七(이름 북北 글자를 나눠 만든 이름)'의 징조라고 하였다. - 조희룡, 최북전, 호산외사 -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산수도, 최북, 1784년

백광현, 마의에서 어의로
백광현(1625~1697)은 처음에는 말의 병을 잘 치료하였는데 오로지 침을 써서 낫게 하였다. 처방책에 근거하지 않았지만, 오래될수록 더욱 손에 익어 사람의 종창에 시도하여서도 이따금 신기한 효과가 있었다. 드디어 전적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것에 힘쓰게 되어, 여염에 두루 다니며 사람들의 종창을 본 것이 많았으므로, 그 앎이 더욱 정치해지고 침을 더욱 잘 놓게 되었다. 무릇 부스럼의 독이 성하고 뿌리가 깊은 것은 옛 방문에 치료법이 없었는데, 광현이 그것을 대하면 반드시 큰 침으로 찔러 터뜨려 독을 헤치고 뿌리를 뽑아서 죽어가던 사람도 능히 살려내었다. 숙종 초의 선발되어 어의로 임명되었다. 공로가 있을 때마다 문득 품계를 더해주어 종1품에 이르고 여러 직책을 거쳐 어느 고을 원님이 되니, 동네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여겼다. - 유재건, 백태의광현, 이향견문록 -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신편집성마의방, 조선, 각종 마상.마병에 관한 치료서


말침과 말침통, 조선후기

김수팽, 청렴결백한 조선의 공무원
김수팽은 영조 때 사람으로 호조서리로 일했다. 당시 경아전의 부정은 다양하게 행해졌는데 병조의 경우 군문서를 조종하여 뇌물을 받고 산 자를 죽은 자로 꾸며 문서에서 누락시킨다든지, 쌀.베 등을 관리하던 내수사 서리는 백성으로부터 관청으로 유입되는 상납에서 부당하게 챙기는 것이 상당하였다. 김수팽은 이러한 시대에 청렴결백으로 유명했던 호조서리로, 그의 대쪽 같은 강직함을 보여주는 몇가지 일화가 전하고 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장우벽, 거침없이 노래하다
장우벽은 음악의 이치를 깨달아서 스스로 노래박자의 '매화점'을 마련하였는데 그것이 음악의 훌륭한 지침이 되기도 하였다. 날마다 인왕봉에 올라가 거침없이 노라하다가 돌아오곤 하여, 사람들은 그곳을 가르켜 '가대'라고 하였다. - 유재건, 장풍죽헌우벽, 이향견문록 -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증보가곡원류, 1956년, 박효관.안민영. 매화점 장단은 5개의 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치 매화나무 가지에 핀 매화잎을 닮았다하여 이름 붙여졌다. 매화점장단은 여러가지 복잡한 장단구조를 음점과 양점으로 이분화시키고 이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조생, 한양의 책은 내가 판다.
조생은 해만 뜨면 저잣거리로, 골목으로, 서당으로, 관청으로 달렸다. 위로 높은 벼슬아치부터 아래로 '소학'을 읽는 어린 아이에 이르기까지 찾아다니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달리는 것은 나는 듯 했고, 그의 가슴과 소매에 가득한 것은 책이었다. 책이 팔리면 그 이문을 가지고 술청으로 달려가 마셔 취하고 날이 저물어서야 달려 돌아갔다. 사람들은 그가 사는 곳을 알지 못했고, 또 그가 밥 먹는 것을 보지도 못했다. 베옷 한 벌 집신 한 켤레로 달리면서 계절과 해가 바뀌어도 변함이 없었다. 영조 신묘년(1771) 주린이 지은 '명기집략'에 우리 태조와 인조를 모독한 말이 있어 중국에 알리고 전국의 책을 다 거두어들였으며 그 책을 파는 자는 죽였다. 이때 나라 안의 책 장수가 모두 죽게 되었는데 조생은 이에 앞서 먼 지방으로 달아나 홀로 죽음을 면하였다. 뒤에 한 해 남짓 지나 조생은 다시 돌아와 옛날처럼 다시 달렸다. - 유재건, 조생, 이향견문록 -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일사유사, 장지연, 1922년


여유당전서, 정약용, 1934~1938년. 책장수 조생의 이야기는 각계각층 사람들의 문집이나 전기집에 실려 전하고 있다.


심청전, 19세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