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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중인들이 모여살았던 웃대라 불렸던 인왕산 자락 아래 마을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한시를 향유하는 모임인 시사를 들 수 있다. 이들 시모임은 17세중반 삼청동 일대 의관,역관 등이 중심이 된 6인의 시모임에서 시작되어 관청 서리 등으로 확대되었다. 이들은 중인이지만 통역을 하던 역관이나 의관, 중앙부처의 서리들로 오늘날의 견해로 볼 때도 의사,중앙부처 공무원, 외교관 등 상당히 높은 수준의 지식을 요하는 전문직에 속하는 직업군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경제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이며, 시사 이외에도 이들의 계모임이 상당히 활성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인들의 시모임은 18세기 옥계시사를 통해 절정을 맞았는데 이들은 공동시집을 만들고 또한 그들만의 전기를 만들어 그들의 작품과 행적이 후대에 남겨지기를 바랬다.

웃대의 시사

조선 전기만 해도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한시를 향유하는 모임은 점차 중인들에게 가지 확대되었고, 이들은 시사를 통해 문화적 역량을 드러냈다. 17세기 초 중인들의 시사는 삼청동 일대 의관.역관 등이 중심이 된 육가(6명의 시인모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17세기 중반~18세기 초에는 역관과 서리가 중심이 된 낙사가 삼청동 백련봉부터 필운대에 이르는 지역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러한 모임은 단순한 문학적 교류로 결속력 있는 동인 모임으로 보기 힘들었다. 18세기 중.후반에는 승문원 서리 마성린이 중심이 된 구로회가 필운대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시사의 무대는 비로소 삼청동 일대에서 웃대로 옮겨졌다. 그리고 웃대의 시사는 1786년 규장각 서리들이 중심이 된 옥계시사를 통해 절정을 맞았다. 옥계시사는 30여년 동안이나 모임을 이어가며 중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후 옥계시사의 영향은 웃대에서 활동한 서원시사.비연시사.직하시사.칠송정시사 등으로 계승되었다. 이들의 활동은 '한경지략'에 '필운대풍월'로 기록될 정도로 당대인들에게 하나의 커다란 문화적 움직임으로 인식되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중인들의 계모임을 기록한 글과 그림, 금란계첩(중앙박물관 전시). 중인들의 모임을 그린 그림인데 당시 이들의 상당한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있는 계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옥계시사의 결성
<옥계십이첩>에 의하면 옥계시사는 1786년 7월 16일 옥계 청풍정사에서 결성되었다. 옥계는 도성안 금교 입구에서 서북으로 몇리 거리에 있던 인왕산 속의 계곡으로 이 일대에 살고 있던 13명이 모여 시사를 맺은 것이 옥계시사다. 이들은 본격적으로 규약을 만들어 시사를 결성한 지 3개월이 지난 10월에 시사첩을 만들었다. 이것이 <옥계십이승첩>이다. 옥계시사 동인들은 모임을 오래도록 공고히 하기 위해 22조항의 범례를 만들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인 모임을 갖거나, 시를 잘 지어 연이어 3번 장원을 하면 기분 좋게 술 한 단자를 내게 하고 잇달아 꼴지를 하면 벌주로 술 두 단자를 내게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또 모임에서 완성된 시를 모아 책을 만들기도 했는데, <옥계십이승첩>도 이러한 범례에 의해 제작된 것이었다. 옥계시사의 동인들의 직업을 보면 맹주였던 천수경은 서당 훈장으로 중인 자제들을 가르쳤고, 장륜은 감인소 사준으로 책을 교정보는 일을 하였다. 그리고 이양필은 승정원 서리, 김낙서.임득명.김태한.노윤적은 규장각 서리로 중앙 관청에서 일선 행정을 맡아 보았다. 옥계시사 동인들은 대부분 하급 공무원이거나 훈장으로 중인에 속하였으며 양반 못지않은 풍부한 문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옥계시사는 이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동인으로 활동하며 30여년이나 지속되었다. 이러한 옥계시사의 오랜 활동은 웃대라는 동일한 거주 공간과 중인이라는 신분적 동류의식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옥계십이승첩, 1786년, 삼성출판 박물관. 18세기 중인들의 시모임이 절정기를 이루었던 옥계시사에서 만든 시집으로 옥계시사의 결성을 알려주고 있다.

옥계시사의 활동
옥계시사의 활동은 <옥계십이승첩>과 같은 옥계시사첩을 통해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옥계시사첩은 시사의 결성을 알려주는 <옥계십이승첩>, 시사의 분위기를 잘 전달해주는 <옥계청유첩>,  시사의 재결성을 보여주는 <옥계십경첩> 등이 있다. 특히 1804년.1818년 옥계시사 동인들의 기록이 남아 있는 <옥계십경첩>은 18~19세기에 결쳐 30년 이상 활동한 시사의 면모를 잘 알려주고 있다. 옥계시사는 1791년까지 주로 '옥계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791년 즈음 천수경이 옥계에서 서북쪽으로 십리 정도 떨어진 송석원으로 이사온 뒤에은 시사가 천수경을 중심으로 재결성되었는데, 이떄부터 그의 호인 송석원을 따서 '송석원시사'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즈음부터 시사의 규모도 커지며 이른바 백전이라는 새로운 시사의 모습이 등장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옥계십이승 목차
청풍산 산기슭에서의 수계, 초가을, 음력7월
국화핀 동산에서 모임하기, 한가을, 음력8월
높은 산에 올라 꽃구경하기, 한봄, 음력2월
흐르는 물에 갓끈 씻기, 늦여름, 음력 6월
다리밟으며 달구경하기, 초봄, 음력 정월
성루에서 초파일 등 구경하기, 초여름, 음력 4월
한강 정자에의 풍취 있는 놀이하기, 늦봄, 음력3월
산사에서 그윽한 약속하기, 늦가을, 음력9월
눈속에 가까이 마주앉기, 초겨울, 음력 10월
밤비에 더위 식히기, 한여름, 음력 5월
섣달 그믐에 밤새우기, 늦겨울, 음력, 12월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높은산에 올라 꽃구경하기, 산사에서 그윽한 약속하기. 옥계시승첩 중 한봄과 늦가을의 정취를 묘사한 그림이다.


다리 밟으며 달구경하기, 눈속에 가까이 마주 앉기, 초봄과 초겨울의 정취를 묘사한 그림이다.


존재시집, 박윤목, 1874년, 국립중앙도서관. <존재시집>은 박윤목의 손자 박창선이 1874년에 본집인 <존재빕>에서 일부만 선별하여 등사한 것이다. <존재집>에는 옥계시사의 활동이나 동인들과 관련된 시 또는 기록이 많이 실려 있어 옥계시사와 동인들의 행보를 추적하는데 도움이 된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사명자시집, 차좌일, 1914년.

차좌일은 선조대 이름난 문인이었던 차천로의 6대손으로 서얼 출신으로 추정된다. 옥계시사 동인으로 활동하며 많은 시를 남긴 차좌일의 시는 후손들에 의해 <사명자시집>으로 묶여졌다. 그는 술을 무척 좋아하였으며 시의 소재도 술에 대한 것이 많은데 그에게 술은 신분차별을 잊기 위한 수단이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중인문화의 절정, 옥계시사와 백전
옥계시사에서 주관하던 백일장에는 중인 시인 수백 명이 참가하였고, 여기에 참가하는 것 자체를 영광으로 여겼다. 이를  '백전'이라 하는데, 무기없이 맨손으로 하얀 종이를 펼쳐 놓고 글재주를 겨루는 싸우미라는 뜻이다. 백전에서 겨룬 시들을 모은 '백천첩'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옥계시사 동인 박윤묵 문집에 '백전첩발'이 남아 있어 그 일면을 알 수 있다. 또 '희조일사'에 실린 천수경의 전기를 통해 백전의 규모와 중인들의 결집력, 시를 통해 발산했던 그들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중인들의 시모임인 시사 활동 중 백일장에 해당하는 백전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이다.

"이 싸움을 군자의 싸움이다. (우리를 일러서) 문장의 의병이라고 말하더라도 또한 옳다. ..... 만약 사관이 있어서 이 시 가운데 만에 하나라도 채집한다면 열국 하리의 가요와 같이 왕조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 박윤묵, 백전첩발, 존재집 권 23.
"옥계사 백전의 성황을 이렇게 전했다. 천수경.장흔.왕태가 송석원에서 시사를 크게 여니 모인 사람이 수백명이었고 돌아가며 모이는 자도 매일 30~50명을 밑돌지 않았다. 매년 봄과 가을 좋은 날이면 글을 띄워 날짜를 잡아 중서부 연당에 모였는데, 연궤는 아름답고 붓과 연적을 늘어 놓으니 그 진기함이 지극하였다. ....." - 이경민, <천수경>, <희조일사> 권하.<출처:서울역사박물관>


19세기 중반에 직하시사 동인들이 중심이 되어 중인과 그 이하 계층의 이야기를 실은 공동 전기집이 발간되었다. 조희룡은 <호산외기, 1844년>에서 연대순으로 42명의 사람들의 행적을 정리하였고, 유재건은 308명이라는 방대한 인물의 전기를 <이향견문록,1862년>으로 엮어내었다. 이어 이경민은 <희조일사,1866년>에 84명의 전기를 실었다. 이들 공동 전기집에는 역관.의관.화원.서리들 뿐 아니라 바둑꾼.책장수.협객 등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범위의 사람들의생애나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희조일사, 이경민, 1866년

공동시집
중인들의 시사활동은 다수의 시 창작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중인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사회적으로 이름도 벼슬도 없는 자신들의 시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을 우려했던 이들은, 선대 중인 시인들의 시가 후세에 전해질 수 있도록 이를 모아 공동시집을 간행하였다. 첫 공동시집의 발간은 1712년(숙종38) 홍세태의 <해동유주>이다. <해동유주>간행에 힘입어, <소대풍요>가 1737년 간행되었다. 태평성대의 노래라는 뜻의 <소대풍요>는 9권2책으로 구성되었는데, 조선 초.중기의 중인 시인들의시에서부터 17세기 말 삼처옹에서 활동했던 6명의 중인 시인, 이른바 육가 시인들의 시까지 162명의 시 685수가 실려 있다. 이 책의 편찬을 계기로 60년마다 중인 시인의 공동 시집을 엮는 관례가 생겨 중인 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는데, 옥계시사의 천수경과 장혼이 엮은 <풍요속선,1797년>과 직하시사의 최경흠이 중심이 되어 엮은 <풍요삼선, 1857년>으로 이어졌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풍요삼선, 초경흠.유재건, 1857년, 국립중앙도서관


소대풍요, 채팽윤편, 1737년, 화봉 책 박물관

"동문선과 더불어 표리를 이루면서 일대의 풍아가 빛나니 가상하다. 귀천의 나뉨은 사람이 지어낸 것, 하늘이 준 선명은 한 가지로 울린다."
고시언은 <소대풍요>를 조선전기 서거정 등에 의해 편찬된 양반들의 한문학을 총괄한 시집인 <동문선>에 빗대었는데 중인문학에 대한 자부심이 드러난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풍요속선, 천수경편. 장혼 교정, 1797년, 국립중앙도서관

옥계시사 이후의 시사
1786년 결성되어 30여년간 계속된 옥계시사는 1818년 천수경이 죽고 동인들이 나이가 들면서 활동이 뜸해졌다. 하지만 생존해 있던 동인들은 여전히 중인 시사의 선배로 활동하였고, 19세기 중반에는 옥계시사를 뒤 이은 새로운 시사들이 여럿 생겨났다. 웃대에서 새롭게 결성된 시사는 서원시사.비연시사.직하시사.칠송정시사 등이 있다. 그러나 옥계시사처람 하나의 응집된 문단을 만들지는 못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비연상초, 장지완, 1857년.

비연시사 동인들 중에서 가장 활동이 활발하였던 사람은 율관 장지완이었다. 비연시사란 명칭도 그의 호인 '비연'에서 따온 것이며 동인들 중에서 가장 많은 문집을 남겼다. <비연상초> 외에 <침우당집>등이 전해지며 <풍요삼선>의 간행을 협찬하고 발문을 쓰기도 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