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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특별전] '145년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숙종의 일생과 의궤

younghwan 2011. 7. 2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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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기록문화 유산인 의궤는 실록과 함께 한 국가를 통치하는 국왕이 참석하는 주요 행사에 대한 기록이다. 국왕의 통치행위에 대한 전반적인 기록인 실록과는 달리 의궤는 국가적인 행사에 대한 세밀한 기록으로 행사의 절차와 준비해야 할 사항 등에 대해서 그림과 함께 아주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기록된 의궤를 통해 국왕의 일생을 통해 통치행위에 있어서 중요한 행사를 한번 살펴 볼 수 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조선 19대 왕인 숙종의 일생 동안에 있었던 주요 행사에 대해 별도로 구분하여 전시해 놓고 있다. 숙종대에는 국가적인 통치행위에 대한 기록인 의궤가 정형화되면서 그 내용에 깊이가 더해 가던 시기였다고 한다.

숙종의 일생과 의궤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은 현종과 명성왕후의 장남으로 7세에 왕세자가 되었고 14세에 왕위에 올랐다. 숙종의 등극은 첫째 왕비가 낳은 첫째 아들이 왕위를 승계한 이상적인 예였기에 숙종은 처음부터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는 붕당 간에 왕위 계승 및 학문적 견해에 대한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여 긴장감이 넘쳤다. 이에 숙종은 집권당을 일거에 바꾸는 이른바 '환국'으로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왕의 권위와 힘을 효과적으로 발휘하였다. 45년 10개월의 재위 기간 동안 약 65건의 의궤를 제작하였으며 아직 형식적 체재는 완성되지 않았지만 당당한 품격과 고전적인 깊이가 있다. 숙종은 1720년 6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숙종세자책례도감의궤, 1667년(현종8), 숙종 세자 책봉에 대한 기록으로 '왕세자로 임명하는 글, 교명문 敎命文'이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다.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 사이에 태어난 원자를 왕세자로 책봉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나이 7세가 된 원자는 먼저 관례를 행하고 창덕궁 인정전에서 세자로 책봉하는 의식을 가졌다. 다음날 백관들이 하례를 올리고, 이어 세자가 뜰에 나가 사례하는 전문과 표리를 올렸으며 죄인을 사면하는 대사령이 반포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왕세자로 임명하는 글, 교명문 敎命文
... 원자는 자태가 수려하고 기질이 창명하다. 궁 안에서 아끼고 공경함을 스스로 도탑게 하여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게 드러나고, 영특한 슬기가 어려서부터 드러나 면면히 날마다 진취하였다. 옷을 가누고 절하고 나아감에 능히 예절을 익혔고, 보양관을 두어 가르치니 '효경'을 이미 통달하였다. 이 어찌 등을 어루만지는 나의 사적인 마음뿐이겠는가, 실로 목을 늘여 고대하는 백성들의 바람이 달려 있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뭇 사람들이 세자로 세우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이 좋은 때에 이르러 주창(세자를를 뜻함)에게 성대한 전례를 마땅히 거행하고 이극(왕세자의 별칭)의 자리를 바로 하여 만세의 기업을 맡기노라. 이에 너에게 명하여 왕세자로 삼는다. <출처:중앙박물관>


숙종인경왕후가례도감의궤, 1671년(현종 12), 숙종과 인경왕후의 혼례. 왕세자에 책봉된 숙종의 나이 11세 때, 세자빈을 맞이한 혼레식 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동뢰연을 치르기 위해 별궁에서 대궐로 가는 세자빈의 연과 이를 호위하는 행렬을 그린 반차도다.


숙종인현왕후가례도감의궤, 1681년(숙종 7), 숙종이 인현왕후를 계비로 맞이한 혼례식 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국왕의 혼례식을 기록한 의궤인 만큼 이전의 왕세자 가례의 의궤보다 구성항목이 늘어났고 내용도 보다 짜임새 있게 제작되었다. 왕비의 연과 호위하는 내시, 시녀의 행렬을 그린 반차도이다.


정종정안왕후시호도감의궤, 1681년(숙종7). 조선 2대왕 정종에 묘호를 올리는 의궤로 도감의 구성과 명단이 적혀 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각종 의식 및 행사를 집행하기 위해서 우선 임시기구인 도감을 설치하였다. 도감은 여러 관청의 관리들을 망라하여 조직하였으며 총책임자인 도제조 1인은 정승급에서 임명하였다. 조선의 제2대 왕에게 '정종'의 묘호를 올리는 의궤로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수항이 도제조를 맡았다. <출처:중앙박물관>


보사녹훈도감의궤, 1682년(숙종8), 역모를 막은 신하에게 공신의 칭호를 내리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1680년(숙종6) 허견 등의 역모 사건을 막은 신하들에게 공신의 칭호를 내린 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김만기.김석주의 1등 공신 2인을 비롯하여 총 6명의 공신을 3등급으로 나누어 녹훈하였다. 그 중 3등 공신이었던 정원로는 역모의 공모자로 몰려 공신에서 삭제되고 죽음을 당했는데, 이 사건과 관련한 기사에 한글 세주가 있어 주목된다. <출처:중앙박물관>


태조신의왕후태종원경왕후시호도감의궤, 1683년(숙종9), 선왕에게 시호를 올림

태조에게는 '지인계운성문신무정의광덕대왕', 태종에게는 성덕신공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이라는 시호를 더해 올리고, 태조 비 신의왕후와 태종비 원경왕후의 위판을 고쳐 쓴 과정에 대한 의궤다. 새 시호를 새긴 금보를 만들었는데, 이 때 태조의 시호는 이정영이, 태종의 시호는 김만기가 전서로 썼다. <출처:중앙박물관>


명성황후부묘도감의궤, 1686년(숙종 12), 명성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모심

현종의 비 명성왕후의 삼년상이 끝난 후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과정에 대한 의궤다. 부묘행렬의 주요 구성을 살펴보면, 전반부에는 백택기를 비롯한 의장물이, 중반부에는 생전에 받았던 각종 교명과 책보, 시보와 시책을 실은 가마가 차례로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신주를 모시는 신여와 신연이 배치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경덕궁수리소의궤, 1693년(숙종19), 경덕궁의 수리공사

경덕궁의 대전과 광명전을 수리한 과정에 대한 의궤다. 경덕궁은 인조 대 이후 창덕궁의 이궁으로 역할을 했다. 1760년(영조 36)에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공사를 담당한 공장의 명단을 보면 광명전 수리에 목수 65명, 석수 34명, 기와장 29명, 화원 18명을 비롯하여 총 180명의 장인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보사복훈도감의궤, 1694년(숙종20), 삭제되었던 공신의 칭호를 회복시킴

1689년 남인이 집권하면서 삭제되었던 보사공신을 1694년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다시 회복시킨 과정에 대한 의궤다. 5월 29일 숙종이 복훈을 명하였고, 10월 12일에는 인정전에서 보사공신을 회복시키는 교서축을 반포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부 공신의 명단은 조정되기도 했다. <출처:중앙박물관>


어용도사도감의궤, 1713년(숙종 39), 숙종의 초상을 제작

숙종의 초상화를 제작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완성 어진의 정본 1건은 강화부의 장녕전에, 소본 1건은 선원각에 보관했다. 5월 22일 숙종이 비망기를 내려 주관화사 진재해는 품계를 올려주고, 동참화사 김진여, 장태흥, 장득만과 수종화사 진재기, 허숙에게는 상현궁 1장을 상으로 주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숙종빈전도감의궤, 1720년(경종즉위), 숙종의 시신안치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숙종이 사망한 후 설치된 빈전에서의 의식절차를 정리한 의궤이다. 빈전도감에서는 시신을 안치하는 빈전을 설치하고 시신에 수의를 입히는 염습을 준비하였다. 영좌만정골도, 찬궁도 등의 도설, 숙종의 승하 직후부터 장례를 치른 후 혼전으로 신주를 모시고 돌아오기까지의 일시가 기록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숙종 승하 후 올린 옥책, 숙종의 승하 후 숙종의 묘호와 시호를 올리며 금보와 함께 제작한 옥책이다. 숙종의 공덕을 기리는 글을 음각하고 금색으로 칠하였다. 14장으로 되어 있으며 75행에 걸쳐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숙종 승하 후 올린 금도장(금보), 숙종의 승하 후 숙종의 묘호와 '장문헌무 경명원효'의 시호를 올리며 제작한 금보다. 존호를 올릴 때 왕과 왕비가 살아 있을 때에는 옥보와 옥책을 올리고, 승하 후에는 금보와 옥책을 올렸다.


숙종산릉도감의궤, 1720년(경종 즉위), 숙종의 산릉조성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숙종의 능인 명릉을 조성하는 의식 절차를 기록한 의궤다. 재궁(관)을 두는 찬궁의 네면에 청룡(동), 백호(서), 주작(남), 현무(북)의 채색 사수도가 그려져 있다. 명릉은 1701년(숙종 27)에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능소를 마련하면서 미리 조성되었고 숙종이 승하한 후 이곳에 나란히 묻혔다. <출처:중앙박물관>


숙종 왕릉 배치도 (영릉도), 18세기 중반에 그려진 그림이다. 숙종의 영릉은 서울 서북쪽에 위치한 서오릉이다.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 그리고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인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명릉을 그린 것이다. 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뒤에 이곳에 묘지를 정하고 명릉이라 하였다. 그 뒤 1720년 숙종이 승하한 후 이곳에 나란히 묻었으며, 1757년에 인원왕후의 상을 당하여 그 오른쪽에 묘를 썼다. <출처:중앙박물관>


숙종국장도감의궤, 1720년(경종 즉위). 숙종의 장례. 숙종의 재궁(관)을 실은 대여를 100여명의 가마꾼이 메고 장지로 향하는 발인 반차도다. 휘장 안에 곡을 전담하는 궁녀 20여명이 따르고 있다. 숙종은 재위 46년(1720)에 60세를 일기로 경덕궁 융복전에서 승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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