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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특별전] '145년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외규장각 의궤의 귀환

younghwan 2011. 8. 1.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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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규장각은 외적의 침입에 따른 자료의 소실을 염려하여 정조가 강화도 행궁에 설치한 국가적으로 중요한 주요 서적을 보관하던 장소이다. 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서들이 소실되었던 경험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이며, 실록을 보관하던 전국의 4대사고와는 별도로 만든 것이다. 만주나 일본으로부터의 침입에 의한 경험으로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강화도에 문서들을 보관했는데, 아리러니하게도 기술의 발달과 세계정세의 변화로 서양세력의 침입에 가장 먼저 타겟이 되었던 곳이 서울을 향하는 수로 입구를 지키던 강화도였고 그 결과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강력한 함대로 무장한 서양세력에게는 강화도의 철저한 방비책은 무력화되었다.

 외규장각에는 여러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특히 어람용 의궤가 많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규장각 의궤 이외에도 의궤는 많이 남아 있는데 그중 조선시대 규장각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가장 많이 남아 있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도 많은 수의 의궤가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조선후기에 중요한 의궤를 많이 보관했던 강화부 외규장각에서 소장되었던 의궤들이 프랑스로 반출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되어 일본 궁내청이 소장한 것 또한 상당수 있다고 한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의궤는 재불학자 박병선 박사에 의해 그 존재와 행방이 알려졌으며, 오랜 외교적 노력 끝에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외규장각 의궤의 귀환
1866년, 프랑스는 천주교 탄압사건을 구실로 '병인양요'를 일으키고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의 분전으로 수세에 몰린 프랑스군은 대량의 은괴와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의궤를 비롯한 189종 340여 책, 기타 자료 등을 약탈하고, 강화도의 장녕전, 외규장각 등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퇴각하였다. 과거 속에 묻혀졌던 외규장각 의궤는 재불학자 박병선 박사에 의해 그 존재와 행방이 알려졌다. 이후 국내 학술단체와 정부가 중심이 되어 의궤의 반환을 추진하였고, 1993년에는 1권이 먼저 들어오게 되었다. 2010년 서울에서 개최된 'G20'정상회의 중 대한민국.프랑스 양국 정상의 합의와 이후 그 후속 조치에 따라 외규장각 의궤가 돌아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왔던 외규장각 의궤 297권은 145년 만에 모두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출처:중앙박물관>


강화도지도, 19세기 후반, 병인양요 이후 강화도의 모습. 강화도 해안 지역의 군사시설물을 상세히 그린 회화식 지도이다. 특히 제1폭에는 병인양 때 프랑스 함대를 대파한 양헌수 장군 승전비, 제6폭에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분전한 어재연을 모신 쌍충비각이 보인다.


위 그림은 강화도 관아 입구라고 할 수 있는 갑곶돈대 주변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는 병자호란 이후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해안 전체를 포대와 돈대를 쌓고, 진과 보를 설치하여 외적의 침입에 적극적으로 대비했으나, 산업혁명 이후 근대적인 무기와 전술로 무장한 서양함대에게는 무력한 존재였다. 그나마 이러한 방비체제가 있었기에 프랑스가 강화도에서 물러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규장각 의궤에 대한 최초의 한글목록집, 1985년, 박병선

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강화도 외규장각 의궤 191종 297책을 찾아낸 재불학자 박병선 박사의 저서이다. 이책은 저자가 당시까지 조사한 파리 소장의 외규장각 의궤와 국내의 규장각.장서각 소장 의궤를 서지학적으로 비교.검토해 목록화한 것으로, 1985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출간되어 조선왕조 의궤 연구의 초석을 닦았다. <출처:중앙박물관>

박병선(1929년 ~ , 일제강점기 경성부 출생)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이다. 프랑스 유학 기간 중 1967년부터 13년동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면서 직지심체요절과 외규장각 도서를 찾았으며, 직지심체요절이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라는 사실을 밝혀내었다.2008년 9월 직장암 4기 선고를 받았으나, 2009년 12월 7일 장암 수술을 받은 뒤 중환자실에서 회복하여, 현재 프랑스에 거주 중이다. <출처:위키백과>


프랑스어로 출판한 외규장각 의궤연구서,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의궤대한 박병선 박사의 서지학적 연구서로 1992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프랑스어로 출간하였다.


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 1822년(순조22년), 가장먼저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1822년 12월부터 1823년 3월까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현목수빈 박씨의 묘소, 휘경원 조성사업에 관해 기록한 의궤이다. 상.하로 이루어진 이 의궤의 상권은 1993년 9월 한국을 방문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직접 전달하였고, 하권은 2011년에 외규장각 의궤 296권과 함께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시대 규장각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대 규장각이다. 우리나라 기록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 각종 의궤를 비롯한 고문서들을 가장 많이 소장한 연구기관이라 할 수 있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의 침략과정을 묘사한 주간지,

1834년 창간된 프랑스 최초의 주간지이다. 병인양요에 참전했던 프랑스 해군 쥐베르가 기고한 1867년 1월 19일, 26일 기사에는 당시 프랑스군의 침략과정과 전투상황 등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외규장각으로 추정되는 건물 앞을 행군하는 프랑스군의 모습이 담기 스케치가 눈길을 끈다. <출처:중앙박물관>


규장각이 있던 강화행궁은 프랑스군이 불을 질러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외규장각 건물만이 복원되어 있다. 이 곳은 고려시대 대몽항전의 중심부였던 고려시대 궁궐터이기도 하다. 만약 복원을 한다면 강화행궁이 우선인지, 고려궁이 우선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강화행궁은 불타버렸지만, 강화유수부 동헌 건물과 이방청 건물은 수리하여 현재까지 남아 있다.


외규장각 의궤의 행방을 기록한 영문잡지. 1860년 창간된 여행 잡지이다. 1873년 쥐베르가 기고한 글에는 프랑스군이 강화도에서 많은 양의 서적과 비축용 종이 등을 발견하였는데 일부 서적이 놀라운 그림으로 장식되었으며, 대부분의 서적이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밝혔다.


당시 강화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규장각 의궤의 상세목록과 보관처를 소개한 책, 1894~1901년 모리스 쿠랑

프랑스의 언어학자이자 동양학자인 모리스 쿠랑이 지은 한국의 서지 목록이다. 2권에서는 병인양요 때 약탈한 외규장각 도서의 상세한 목록과 함께 그것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94년에 <한국서지>란 명칭으로 번역되어 간행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의 약탈 사실을 기록한 책, 1874년.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부인 딜레가 지은 조선의 천주교회사이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이 있는 행궁 등의 주요 시설에 불을 지른 사실과 불을 지르기 전 이곳에서 은궤와 의궤를 비롯한 도서들을 본국으로 우송한다는 내용등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오베르트가 본 병인양요의 원인과 과정. 19세기 오베르트가 지은 조선에 대한 소개서이다. 본래 이 책은 독일어로 출판되었지만, 후에 영어로 번역될 정도로 19세기말 서양인들에게 조선을 알리는 중요한 자료였다. 특히 이 책에서는 병인양요의 원인 및 과정에 대한 설명과 저자가 조선의 상업적 가치를 극도로 미화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충남 예산에 있는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 독일 상인 오베르트가 이 곳을 도굴함으로써 대원군의 분노를 일으켜서 많은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받고, 프랑스군이 침입을 불러들인 원인이 되었던 장소이다. 이 곳은 명당자리라고 알려져 있으며, 대원군이 이곳을 부친의 묘를 이장한 이야기 등 많은 사건의 중심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외규장각 의궤의 귀한 경과
1866.10.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에서 외규장각 의궤 약탈
1867. 1.19  프랑스 잡지 L'Illustration에 '강화 유수부를 점령한 프랑스 군대의 삽화' 등 수록
1867.      프랑스 해군성, 외규장각 도서를 기증형식으로 황립도서관(현 프랑스국립도서관) 이관
1895.      모리스 쿠랑, Bibliographie Coreenne 제2권에 외규장각 의궤에 대한 내용 기록
1975.   재불학자 박병선 박사,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중국도서로 분류된 외규장각 의궤 첫 발견
1991.10. 서울대학교, 정부에 외규장각 도서 반환 추진 요청
1991. 9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 <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구> (상)1권 전달하며 반환 약속
1999.      서울 및 파리에서 전문가 협상 진행
2000.10.19  외규장각 도서와 국내 고문서의 등가교환 추진
2000.11.3    국내 학술단체, '외규장각 도서 맞교환 협상의 중단을 촉구하며' 성명서 발표
2002.          전문가 실사단 1.2차 현지 조사
2003. 4. 15  외교통상부.실사단, <파리 국립도서관 소장 외규장각 의궤 조사연구> 발간
2010. 3.4     한불 간 협상 재개
2010. 4.28   파리7대학 총장 등 프랑스 지식인들 '반환 지지협회' 결성
2010.11.12  한.불 정상, 합의 공식 발표
2011. 5.27   외규장각 의궤 297책 귀환 완료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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