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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특별전]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 명필 김생과 명문 최치원의 글과 글씨

younghwan 2011. 11. 10.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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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문자, 그 이후:한국고대문자전"이라는 특별전시를 하고 있다. 같은 시기에 진행하는 "초상화의 비밀"에 비해서 관심도는 낮아 보이지만, 전시하고 있는 유물들은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통일신라시대까지 한국인의 문자생활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광개토대왕비 탑본, 다라니경,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책이나 미디어를 통해서 볼 수 있었던 역사적인 유물들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고 있다.  실제 이런 유물들은 그 내용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는 있지만, 실제로 접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으며, 통일신라시대까지 문자의 사용에 대해서 체계적이고 광범위하게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전시회라고 여겨진다.

 한반도에서 문자를 사용한 이후 통일신라시대까지는 한국인이 문자를 사용한 흔적은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는데, 그 중 대표적으로 많이 남아 있는 것이 비석에 새겨진 글씨인 금석문일 것이다. 삼국시대 한문을 널리 사용하게 되면서 서예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신라의 명필 김생을 들 수 있다. 김생(711~791)은 예서.행서.초서에 능하여 '해동의 서성'이라고 불렸던 명필로 그의 필적은 '전유암산가서', '여산폭포시', '낭공대사비'에 남아 있는데, 그의 글씨는 지금 사람의 입장에서도 매우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통일신라를 대표한 유학자이자 문인인 최치원은 당나라에서도 문장가로 큰 이름을 떨쳤으며, 그의 글로는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와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에 남아 있다. 특히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는 최치원이 직접 쓴 것으로 글씨에도 매우 뛰어남을 보여주고 있다.

명필, 명문
삼국은 한문을 널리 사용하면서 서예도 발전하였다. 광개토대왕 비문은 웅건한 서체로 쓰여졌고, 신라 김생은 질박하면서도 굳센 신라의 독자적인 서체를 열었다. 예서.행서.초서에 능하여, '해동의 서성'이라 불렸고, 중국 송나라에서도 왕희지를 능가하는 명필로 이름났다. 그의 필적은 '전유암산가서', '여산폭포시', '낭공대사비' 등에 전한다. 요극일 또한 김생에는 미치지 못하나 필법에 능통하였다고 하며 시중겸시서학사로 있으면서 흥덕왕릉비, 삼랑사비 등을 썼다. 통일 이후 신라와 당의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당에 건너가 공부한 유학생이 많아졌다. 그 중 최치원은 당의 빈공과에 급제하고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친 후 귀국하여 뛰어난 문장과 저술을 남겼다. 왕명으로 지은 '대숭복사비문' 등이 있으며, 글씨도 잘 써서 쌍계사의 '진감선사비문'이 유명하다. <출처:중앙박물관>



金生(김생)의 글씨,


태자사 낭공대사 탑비 탁본, 954년


태자사 낭공대사 비석, 이 비석의 글씨는 김생의 행서를 집자해서 새겨 넣은 것으로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를 볼 수 있는 많지 않은 유물 중 하나이다.

이 비석의 정식 명칭은 '태자사 낭공대서 백월서운탑비'이다. 통일신라의 효공왕과 신덕왕의 국사였던 낭공대사를 기리는 비석으로 고려 광종 5년(954) 지금의 경북 봉화군 태자사에 세워졌다. 비석의 글씨는 김생의 행서를 집자한 것인데, 중국 왕희지와 안진경의 글씨체 등 8세기 당시 통일신라 서예의 경향을 여실히 반영하면서도 굳세고 강건한 힘을 집어 넣어 활달한 필치와 기운이 훌륭히 표현되었다. 집자는 고려의 승려 단목이 하였다. 비석 앞면에는 낭공대사의 일생과 업적이 기록되었는데, 글은 최인연(고려때 최언위로 개명)이 썼다. 뒷면에는 승려 순백이 쓴 후기가 새겨져 있다. 한국 서예의 신품사현 가운데 한 사람인 김생은 '해동의 서성', '신라의 왕희지'로 추앙받던 명필로서 한국 서예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김생의 글씨는 전하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 낭공대사 비석은 어느 작품보다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출처:중앙박물관>



삼랑사비 조각, 통일신라


흥덕왕릉비 조각, 836년. 이 비석의 글씨는 통일신라시대 명필로 알려진 요극일 쓴 글씨이다. 요극일 또한 김생에는 미치지 못하나 필법에 능통하였다고 하며 시중겸시서학사로 있으면서 흥덕왕릉비, 삼랑사비 등을 썼다.


통일신라숭복사지비 조각, 896년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 탑비 탁본첩, 890년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강 탑비 탁본, 890년


성주사지에 있는 문화재 중에서 국보로 지정된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성주사를 크게 중창한 낭혜화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 낭혜화상은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당나라에서 선종을 배우고 와서 이 곳에서 성주산문을 창설한 인물이다. 이 탑비가 세워진 시기는 통일신라 말기인 진성여왕때라고 하며,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탑비 중에서는 가장 웅장하고 완성도가 높은 것이라 한다. 탑비에 새겨진 글씨는 당대의 문인이자 유학자인 최치원 선생이 지은 글이라 한다.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 탁본, 887년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는 진성여왕 원년(887)에 세워진 것으로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직접 글을 썼다고 한다.


대동서법, 17세기


대가들의 서체를 모은 '대가서법', 통일신라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
문자는 시각적인 의사전달 수단으로 더 정확하게 뜻을 전달할 수 있다. 문자 사용으로 인간사회의 정보전달은 크게 진보하였으며, 문자사용으로 인류는 역사시대로 진입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문자는 중국과의 교류과정에서 수용되었는데, 수용 초기에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지배층에게 권위의 상징이었다. 법령공포나 행정문서, 장부가 작성되면서, 문자 사용층은 행정관리나 지방 지식인으로 확대되었다. 문자 사용의 폭이 점차 늘어나 행정영역을 넘어 음식, 건축 등 일상 기록이나 메모, 또 마음이나 신앙적 바램 등 생각을 표현하게 되었다. 고대 사람들이 남긴 문자는 천년이 지난 오늘, 후세 사람들에게 당시 사람들의 생활모습 등은 물론 관심사, 고민 등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준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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