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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특별전] '145년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추모와 기억

younghwan 2011. 7. 31.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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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세상을 떠난 왕과 왕비에게 시호를 올렸으며, 왕이 사후에 받는 이름은 시호 외에도 묘호, 능호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왕과 왕비의 국장 이후 삼년상을 치른 후 혼전의 신주를 종묘로 옮겨지는 부묘가 있었으며 이로써 국왕의 장례절차는 마무리된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선왕이나 조상을 기리기 위해서 장례절차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국가적인 행사가 있었으며, 이를 통해서 왕실과 국왕의 위상을 강화하고자 했다.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영정은 별도로 설치된 진전에 모셨으며, 태조의 영정을 모시는 경기전이나 정조대왕의 영정을 모신 화성행궁의 화령전 등 특별한 의미를 갖는 왕들의 영정을 모시기도 하였다. 또한 왕실의 일원이지만 종묘에 모시지 못하는 세자나 세자빈 등은 별도의 사당을 마련하기도 하는데, 경복궁 북쪽편에 있는 영조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왕을 낳은 후궁들을 모신 육상묘가 대표적이다.

추모와 기억
세상을 떠난 왕과 왕비에게는 그 일생을 함축한 이름인 시호를 올렸다. 왕의 재가를 받은 시호는 시책과 시보로 만들어 종묘에 고하고 허락을 요청하는 의례를 거친 후 빈전에 함께 모셨다. 왕이 사후에 받는 이름은 시호 외에도 종묘에 올리는 묘호, 혼전의 이름인 전호, 왕릉의 이름이 능호가 있었다. 왕과 왕비의 국장은 삼년상을 치른 후 혼전의 신주를 종묘로 옮겨 모시는 부묘로 마무리되었다. 부묘는 별도로 부묘도감을 설치하여 진행하였는데, 신주.시책.시보를 새로 만들었다. 이 외에도 왕실에서는 진전을 별도로 설치하여 역대 왕의 영정을 모셨는데, 이러한 어진의 제작과 봉안을 통해 국조와 선왕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국왕의 위상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인조장렬왕후존승도감의궤, 1686년(숙종 12).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에게 존호를 올릴 때의 의식 절차를 기록한 의궤다. 원표지를 유지하고 있어서 어람본 의궤 표지의 재료와 장정 방법을 알 수 있다. 초록색 구름무늬 비단으로 표지를 싸고 놋쇠로 변철을 대고 5개의 박을 못으로 고정시켰다. 변철의 중앙에는 둥근 고리를 달았다. <출처:중앙박물관>


순강원상시봉원도감의궤, 1755년(영조31), 인빈 김씨에게 시호를 올리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원종(인조의 부친)의 생모인 인빈에게 경혜라는 시호를 올리고 그 묘소를 순강원으로 봉하고 사당과 묘소를 정비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그 중 묘우조성소의궤에는 신주를 모시는 장인 신장을 비롯해 신탑, 신의의 제작방법, 재료 등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문희묘영건청등록, 1789년(정조 13), 문효세자의 사당 건축

1789년 문효세자의 사당인 문희묘를 세우고 신주를 모신 과정을 기록한 등록이다. 등록은 <비변사등록>과 같이 각 관청별로 논의된 주요 사항을 날마다 기록한 일지를 뜻하는 경우가 많은데, <문희묘영건청등록.은 제목은 '등록'이지만 체재나 내용은 의궤와 동일하다. <출처:중앙박물관>


현사궁별묘영건도감의궤, 1824년(순조 24), 수빈 박씨의 신주를 현사궁의 별묘에 모심

순조의 생모인 수빈의 신주를 모실 별묘인 경우궁을 짓고 신주를 모신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현사궁은 장례 기간 동안 수빈 박씨의 신주를 모신 혼궁이었다. 책머리에 정당을 비롯한 경우궁 전체의 배치도와 신주를 모시는 감실, 혼령이 앉는 신탑의 채색 도설과 설명이 실려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어용도사도감의궤, 1713년(숙종 39), 숙종의 초상을 제작

숙종의 초상화를 제작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완성 어진의 정본 1건은 강화부의 장녕전에, 소본 1건은 선원각에 보관했다. 5월 22일 숙종이 비망기를 내려 주관화사 진재해는 품계를 올려주고, 동참화사 김진여, 장태흥, 장득만과 수종화사 진재기, 허숙에게는 상현궁 1장을 상으로 주었다. <출처:중앙박물관>


태조신의왕후태종원경왕후시호도감의궤, 1683년(숙종9), 선왕에게 시호를 올림
태조에게는 '지인계운성문신무정의광덕대왕', 태종에게는 성덕신공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이라는 시호를 더해 올리고, 태조 비 신의왕후와 태종비 원경왕후의 위판을 고쳐 쓴 과정에 대한 의궤다. 새 시호를 새긴 금보를 만들었는데, 이 때 태조의 시호는 이정영이, 태종의 시호는 김만기가 전서로 썼다.


명성황후부묘도감의궤, 1686년(숙종 12), 명성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모심

현종의 비 명성왕후의 삼년상이 끝난 후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과정에 대한 의궤다. 부묘행렬의 주요 구성을 살펴보면, 전반부에는 백택기를 비롯한 의장물이, 중반부에는 생전에 받았던 각종 교명과 책보, 시보와 시책을 실은 가마가 차례로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신주를 모시는 신여와 신연이 배치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현빈묘소도감의궤, 1751년(영조27), 현빈 조씨의 무덤 조성

영조의 첫째 아들 효장세자의 빈인 현빈 조씨의 묘소 조성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정조 즉위와 함께 효장세자와 효순현빈이 진종과 효순왕후로 추존되면서 영릉으로 격상되었다. 하급관청에서 상급관청으로 묘소를 조성하는 것에 관해 문의한 내용을 모은 품목질이다. <출처:중앙박물관>


현륭원원소도감의궤, 1789년(정조13), 사도세자의 새 무덤 조성

수원부 화산에 사도세자의 새 묘소인 현륭원을 조성한 내용을 정리한 의궤다. 원래 상.하 2책으로 구성되었는데, 본 의궤는 상책만 남아 있다. 책머리에는 원상각을 비롯한 건물, 녹로, 각종 석물 등 29개의 도설과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그린 사수도가 수록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영우원천봉도감의궤, 1789년(정조 13), 사도세자 무덤의 이장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소인 영우원을 수원부 화산으로 옮기는 과정을 기록한 7책의 의궤 중 일방과 이방의궤가 수록된 제4책이다. 새 무덤인 현륭원을 향해 가는 발인 반차도를 보면, 관을 모신 대여를 중심으로 좌우에 삽선, 집탁 호군, 오색 촉롱, 화철 촉롱을 든 사람들이 나누어 섰다. <출처:중앙박물관>


사도세자 휘지,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할 때 사용한 휘지

조선시대에 왕에게 대리청정을 위임받은 왕세자가 명령을 내릴 때 사용한 증표이다. 대리청정이란 왕을 대신하여 세자나 세손 등이 정사를 돌보는 것을 말한다. 1749년(영조 25)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에게 정치를 가르치기 위해 대리청정을 시키자 세자는 이 휘지로 정사를 처리하였다. 휘지에는 영조의 서명이 음각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영조가 지은 사도세자의 묘지명, 1762년(영조38).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의 현륭원으로 옮길 때 사실상 버리고 간 영조가 쓴 사도세자의 묘지명이다. 사실상 영조의 변명에 가까운 글이 적혀 있는 이 묘지명을 정조가 상당히 싫어했기때문에 고의로 버리고 간 것으로 보인다.

영조가 죽은 아들인 사도세자를 위해 직접 지은 묘지로 "늙은 아비로 하여금 만고에 없이 자식을 죽이는 일을 하게 했다"는 영조의 깊은 탄식과 변명이 적혀 있다. 이 묘지는 사도세자의 첫무덤인 영우원 터(서울 휘경동)에서 휘지 등과 함께 발견되었다. 수원 현륭원으로 이장할 때 옮기지 않고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중앙박물관>


경우궁도,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사당

정조의 후궁으로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의 사당이 경우궁의 모습이다. 국왕과 왕비의 신주는 종묘에 모셔졌지만 세자와 세자빈 그 외 왕의 친척인 경우, 경우궁처럼 따로 건립된 사묘에 모셔졌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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