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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재(탑_석등_범종)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국보 37호), 효소왕이 신문왕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구황리 삼층석탑

younghwan 2011. 9. 29.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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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복사지는 신라에서 신성시 여기던 선덕여왕릉이 있는 경주 낭산 북쪽 끝자락 동쪽편에 있던 사찰로 경주에 있었던 많은 사찰 중에서도 큰 규모의 사찰에 속했던 사찰이었다. 황복사 옛절터에는 효소왕이 그의 아버지 신문왕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석탑으로 효소왕의 아들 성덕왕이 다시 사리와 불상을 넣으면서 두왕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1943년 이 탑의 해체복원 과정에서 금동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어 이 탑이 건립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들의 성격이 기록되어 있다.

 이 석탑은 높이 7.3m로 이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단에 각면에는 2개의 기둥이 새겨져 있고 탑신부도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붕돌은 윗면이 평평하고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고 있다. 통일신라 전기에 세워진 감은사지 동.서삼층석탑이나 고선사지 삼층석탑에 비해서 그 규모가 작아져서 정형화된 통일신라 삼층석탑으로 가는 전환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선덕여왕릉이 있는 경주 낭산 북동쪽 끝자락에 있는 석탑으로 2개의 탑이 세워졌던 감은사나 불국사와는 달리 1개의 석탑만이 있다. 이전의 석탑은 10m가 넘었던 것에 비해 이 석탑은 높이 7.3m로 삼층석탑이 정형화되어가던 전환기 석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층으로 이루어진 기단부는 아래층을 아주 낮게 만들었으며, 기단의 각면에 새긴 기둥도 3개에서 2개로 줄어 들었다.


3층으로 이루어진 탑신은 지붕돌과 몸돌을 각가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지붕돌은 밑받침은 5단으로 하고 있으며, 네귀퉁이를 살짝 들어올려 날렵한 느낌을 주고 있다.


몸들은 네귀퉁이에 기둥을 새겨 놓고 있으며, 별다른 조각을 새겨놓고 있지는 않다.


황복사지 삼층석탑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금동 아미타불좌상(국보79호)와 부처입상(국보80호). 신문왕과 효소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각각 넣은 것으로 보인다.


황복사지 삼층석탑 조성 내력이 적혀 있는 이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함 외함.


경주 황복사지 절터에는 지금은 삼층석탑만이 남아 있다. 맞은 언덕 아래에 진평왕릉과 설총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곳이 있다.



경주 구황리 삼층석탑 (국보37호), 경주시구황동 103
이 석탑은 높이 7.3m인데 이중 기단 위에 3층으로 쌓아올린 통일신라시대 전형석탑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1943년 이 탑을 수리할 때 순금으로 만든 여래 좌상. 여래입상과 금동사리함이 나왔다. 여래좌상의 높이는 12.2cm로 국보 79호이며, 여래입상은 높이 14cm로 국보 80호이다. 이 두 불상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사리함 뚜껑의 안쪽면에 있는 장문의 명문에 따르면 신라 효소왕이 부왕인 신문왕의 명복을 빌고자 692년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출처: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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