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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유적_고분

경주 선덕여왕릉 (사적 182호), 경주 낭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최초 여왕의 능

younghwan 2011. 10. 4.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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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덕여왕은 신라 27대왕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다. TV드라마를 통해서 잘 알려진대로 이름은 덕만이고 진평왕의 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덕여왕은 내정에서는 선정을 베풀어 민생을 향상시키고 구휼사업에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자장법사를 중국에 보내 불법을 들여여고 많은 유학생들을 파견하여 당나라 문물을 받아들이는데도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경주의 대표적인 유적인 첨성대를 건립하였고, 분황사를 비롯한 많은 사찰들을 창건하고 황룡사 목탑을 세우는 등 불교를 크게 진흥시켰다.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백제와 신라의 적극적인 공세를 김유신과 김춘추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당나라와는 외교적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선덕여왕의 능은 경주 남쪽 낭산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낭산은 남북으로 길게 누에고치처럼 누워 양쪽에 각각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높이는 108m의 그다지 높이 않는 산으로 서라벌의 진산으로 불렸던 산이다. 능은 낭산 남쪽능선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둘레 74m, 높이 6.8m의 둥긁 흙을 쌓아올린 형태이다. 아랫부분에는 능을 보호하기 위해 2~3단의 자연석으로 쌓은 둘레석이 있다. 삼국시대의 다른 왕릉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석물을 두고 있지 않으며, 봉분 앞에 상석이 있기는 하나 후대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선덕여왕릉이 있는 남산 아래쪽에는 문무왕이 세운 큰 사찰이 사천왕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경주 낭산 남쪽 능선 정상부에 자리잡고 있는 선덕여왕릉. 진흥왕릉이나 무열왕릉 등과 마찬가지로 봉분만이 남아 있고 별다른 장식이나 석물 등을 두고 있지는 않다. 주위에는 전형적인 경주지방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낭산 정상부에 있어서 봉분을 지지하는 자연석으로 쌓은 둘레석이 땅에 파 묻히지 않아서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다른 왕릉에서 이런 둘레석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왕릉 앞에놓여진 제단 상당히 왜소하며, 그 양식에 있어서 후대 사람들이 놓은 것으로 보인다.


경주 낭산 정상부 선덕여왕릉으로 오르는 숲길은 전형적인 경주 지방 소나무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소나무가 곧고 굴게 자라지 않고 있다.


경주 낭산의 소나무숲


낭산 선덕여왕릉으로 올라가는 길


사천왕사지 뒷편 낭산 소나무숲이 시작되는 길


낭산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문무왕이 세웠던 사천왕사 절터.


사천왕사 절터와 선덕여왕릉 사이에는 경주와 울산을 연결하는 철도가 지나가고 있다. 임해전지를 비롯하여 경주의 주요 유적들을 갈라놓고 있는 철도이다.


사천왕사 절터에서 본 경주 낭산


낭산 동쪽편 들판.


진평왕릉에서 본 선덕여왕릉이 있는 경주 낭산 남쪽편 정상부.



신라 선덕여왕릉 (사적 182호), 경주시 보문동 산 79-2
이 능은 신라 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 김덕만)이 모셔진 곳이다. 경주시 동남쪽에 있는 낭산의 남쪽 능선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밑둘레 74m, 높이 6.8m, 지름 24m되는 이 능의 겉모양은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형태이며, 아랫부분에는 능을 보호하기 위한 2~3단의 자연석 석축이 있다.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첨성대를 만들고, 분황사를 창건하였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하는 등 신라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또 김춘추, 김유신과 같은 인물들을 거느리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삼국유사'에는 "내가 아무 날에 죽을 것이나 나를 도리천에 장사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어느 곳인지를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낭산 남쪽이라고 말하였다. 그날에 이르니 왕이 과연 세상을 떠났는데, 여러 신하들이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30여년이 지난 문무대왕 19년(679)에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를 처음 건립하였다. 불경에 말하기를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므로, 그제야 선덕여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출처: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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