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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유적_고분

경주 진평왕릉 (사적 180호), 수.당 교체기 신라를 안정적으로 이끈 선덕여왕의 아버지

younghwan 2011. 10. 5.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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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평왕은 신라 26대왕 (재위 579~632)으로 진흥왕의 손자이자 선덕여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신라 중흥기를 이끌었던 진흥왕 이후 신라가 삼국간 경쟁에서 승리하고 통일을 이루는 과정이었던 선덕여왕대까지의 과도기를 이끌었던 국왕으로 재위 기간이 52년에 이른다. 고구려의 장수왕, 조선의 영조에 비견할 만큼 오랜 기간 왕위에 머무르면서 국가의 안정을 꽤했던 왕이다. 진평왕 재위기간동안에는 수나라와 고구려간의 전쟁으로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서는 등 국제적으로 격변기였다고 할 수 있는 시기였다. 진평왕은 국내젹으로 여러 관청을 설치하는 등 내정을 안정시키고, 명활산성과 남산산성을 쌓는 등 경주 방위에 많은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수나라.당나라와의 외교에 힘써 삼국통일이 기틀을 마련하고 불교를 진흥시킨 국왕이다.

 경주시 보문동에 위치한 진평왕릉은 경주의 궁성이었던 월성과 황복사지에서 정동방향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주를 중심으로 남쪽 방향으로 왕릉을 조성하기 시작한 첫번째가 아닌가 생각된다. 진평왕릉과 선덕왕릉이 이 지역에 왕릉을 조성한 것은 문무왕대 이후와는 달리 남쪽으로부터 예상되는 백제의 공격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진평왕릉은 높이 7.6m의 둘글게 쌓은 봉분을 동시대의 다른 왕릉과 마찬가지 자연석으로 둘레석을 쌓았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몇개만 드러나 있다. 왕릉 주변에는 석물이나 특별한 장식이 없이 후대에 심어진 것으로 보이는 오래된 고목들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봉문만 남아 있는 진평왕릉. 후대의 왕릉이나 진흥왕릉과는 달리 평지에 봉분을 조성해 놓고 있다.


왕릉주위에 배수를 위해 파 놓은 물길.


경주도심 동쪽편 넓은 평야지대에 조성된 진평왕릉. 주변에 설총묘, 보문사지, 황복사지 등이 있었다. 지금은 주위가 대부분 논.밭이지만 박물관에서 본 모형에 의하면 서쪽편 월성 주변에는 고분들이나 사찰 등이 많았던 데 비해서 진평왕릉이 있는 이 곳을 기점으로 북쪽편 알천까지는 경주 도심의 주택가와 상가를 이루었던 지역으로 보인다. 선덕여왕릉과 함께 경주 도심을 지킨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평왕릉 봉분


진평왕릉 입구의 고목들. 송림으로 둘러싸인 다른 왕릉과 달리 일반적인 활엽수가 왕릉 앞을 지키고 있다.


진평왕릉에서 정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낭산의 북쪽 능선. 끝자락에 황복사지가 자리하고 있다.


진평왕의 딸로서 여왕의 자리에 오른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


진평왕릉 앞에는 큰 키의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는 작은 공원같은 분위기이다.


진평왕릉 앞 오래된 고목


진평왕릉에서 보이는 경주 도심부. 사진 중앙에 황룡사 목탑이 솟아 있고, 끝없이 주택가가 이어진 것이 통일신라시대 경주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 경주의 모습이 당시보다 더 왜소해 보인다.


황복사지에서 보이는 진평왕릉. 정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남산신성은 경주 남산 북쪽 산허리를 중심으로 여러 골짜기를 둘러싸고 있는 산성으로 진평왕 13년(591)에 경주의 남쪽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산성으로 축성해 참여한 사람들의 책임을 강조하기 위해 남산신성비를 세웠다고 한다.



신라 진평왕릉 (사적 180호), 경주시 보문동 608
이 능은 신라 26대 진평왕이 모셔진 곳이다. 봉분의 높이 7.6m, 지름 38m로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으로, 무덤 밑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둘렀으나, 현재는 몇개만 드러나 있다. 이 능은 아무런 시설없이 평야 가운데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진평왕은 남산성을 쌓았고, 명활산성을 개축하는 등 경주방위를 중요시하였다. 왕으로 있는 동안 고구려.백제와 싸움이 빈번했으며, 중국의 수나라.진나라.당나라와의 외교에 힘써 후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출처: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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