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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아

경주 사마소, 젊은 유림들이 지역 여론을 형성하고자 조직한 자치기구

younghwan 2011. 10. 5.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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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소는 조선 중기 지방의 생원.진사들이 설립한 자치기구로 사마시 출신의 젊은 유림들이 지역 여론을 장악하고자 세웠다. 원래는 고려시대 사심관제도에서 시작하여 지방의 유력인사들이 조직한 유향소라는 자치조직이 있었으나 주로 중앙에서 고위관직을 지내다 낙향한 인사들 위추로 구성되어 지방 수령보다 그 직위가 높아서 수령을 능멸하는 일이 잦아서 오랜기간동안 혁파되었다가 다시 생겨나기도 하였다고 한다. 사마소나 유향소 모두 지방수령들의 전횡을 막기 위해서 조직되었지만, 실제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 조직 모두 공권력을 능멸하거나, 탐관과 합작하여 백성을 착취하고 사적인 처벌을 하는 등 많은 민폐가 있어서 오랜 기간 동안 없어졌다가 다시 생기기도 한 지방자치기구이다. 대표적으로 이들은 대동법을 반대했던 세력으로 보이며, 대동법 시행이전에 공납이나 세금의 횡령 등을 통해서 지역 토호들이 부를 축적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던 곳이다. 아마도 조선중기 이후에는 지역의 서원들이 그 기능과 폐해를 계승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 또한 서원철폐령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불러들인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그 폐해는 없어지지 않고 자치단체장과 시.도의원들로 구성된 지역의 토호들이 많은 민폐를 끼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국적으로 유향소나 사마소가 여러곳 남아 있는 것 같은데, 대부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경주 월성 서남쪽에 위치한 교동은 이 지역에 최대의 부호로 알려진 최부잣집, 경주향교 등이 위치하고 있는 경주에서 여론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었던 것 같다. 경주 사마소도 원래는 경주향교 부근에 있었던 것을 1984년에 옮겨왔다고 한다. 건물의 구조는 전면에 유생들이 모여서 토론을 하던 사마소건물이 있고, 그 옆에 작은 정자인 병촉헌이, 뒷편에는 부엌이 있는 살림집이 있다. 조선시대 사마소나 유향소는 대부분 관아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며, 자체적으로 토지를 소유했었다고 한다. 좌수 등으로 불리었던 지역 유지들이 관리처럼 이 곳에 출근하면서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경주 사마소. 앞쪽에 토호들이 출근하여 머물던 사마소와 병촉헌이 있고 뒷편에 살림집이 배치되어 있다.


경주 사마소 건물. 앞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대청마루가 중심 공간이 되는 관아 동헌이나 서원 강당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사마소는 가운데 2칸에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으며, 이 곳에서 지역 토호들이 출근해서 정치토론이나, 재테크 등을 토론했을 것으로 보인다.


서쪽편에는 앞면 2칸에 큰 대청마루를 두고 정자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 병촉헌이 있다.


뒷편에는 사무소에 출근하는 토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서 살림집을 두고 있다.


사마소와 병촉헌이 나란히 있는 전경


사마소 서쪽편에 있는 재매정.



경주 사마소, 경주시 교동 89-1
사마소는 조선시대의 과거에 합격한 그 지방의 생원과 진사들이 유학을 가르치거나 정치를 토론하던 건물이다. 지위가 높은 사람도 자기 수양을 위해 이 곳을 찾아 왔다고 한다. 연산군 때에는 생원.진사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고 백성에게 양식을 빌려주기도 하였다는 곳이다. 처음 세워진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뒤 영조 17년(1741)에 다시 지어 풍영정이라 부렀다. 옆면의 사마소라는 현판은 영조 38년(1762) 당시 부윤 홍양한이 쓴 것이다. 함께 있는 병촉헌은 순조 32년(1832) 생원 최기영이 지은 것이다. 이 건물은 원래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300m 거리에 있는 신라시대 월정교터의 북쪽 교대 위에 세워져 있던 것을 1984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건물 안에는 이 건물을 고쳐 온 내용이 담긴 현판들이 걸려 있어 그 내력을 알려주고 있다. <출처: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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