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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아

강화유수부(江華留守府) 동헌, 국가 비상시 행궁(行宮)의 역할을 기대했던 관청 건물

younghwan 2011. 9. 10.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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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 고려궁지는 고려시대 몽고와의 항쟁 기간동안 궁궐 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강화유수부 관아에는 여러 관청건물이 세워졌다고 한다. 광해군 14년(1622)에는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는 봉선전이 세워졌다가 병자호란때 소실되었고, 인조 9년(1631)에는 행궁이 건립되었고, 그 이후 유수부 동헌, 이방청, 만녕전 등에 세워져 궁궐의 형태를 하고 있었으며, 정조 6년(1782)에는 왕실 의궤를 보관하던 외규장각이 세워졌다. 행궁을 비롯한 대부분의 건물들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불태웠다고 한다. 

  조선후기 강화에는 수도 이외에 군사적 요지나 행궁에 있던 곳에 유수부라는 관직을 두었다. 조선초기에는 고려의 옛 수도인 개성과 태조의 고향인 전주에 유수부를 두었고, 조선후기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에 광주유수부를 강화도에 강화유수부, 수원화성에 화성유수를 두었다. 원래 강화유수는 종2품의 상당히 높은 관직으로 전임 강화유수와 경기감사가 공동으로 관리하도록되어 있다고 하며, 한강입구 일대의 국방도 같이 책임지도록 하였다고 한다. 

 강화유수부 관청 건물 중 동헌과 이방청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그 건물의 규모나 모양이 일반 지방의 관청 건물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다. 건물의 규모가 클 뿐 아니라 모습도 지금의 창덕궁이나 덕수궁 등에 있는 부속건물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방관청 건물로 사용되었지만 비상시 궁궐로서 역할을 고려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강화 고려궁지에 있는 강화유수부 동헌건물. 앞면 8칸의 큰 건물로 가운데 4칸은 강화유수가 공적인 업무를 처리하던 대청마루로 사용하고 양쪽에 2칸, 3칸씩 방을 두고 있다. 전체적을 온돌을 설치하지 않고 마루를 깔아놓고 있다.


고려궁지의 출입문이자 실제로는 동헌의 출입문으로 사용된 승평문이라는 현판이 걸린 출입문입니다.


이 건물은 정면 8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큰 건물로 조선시대 관아건물 중에서는 상당히 큰 편이다. 강화유수부에는 행궁이 설치되어 있었기때문에 원래 객사는 설치하지 않았으며, 동헌건물 또한 다른 고을에 비해서 상당히 큰 편이다. 비슷한 경우로 화성유수가 근무하던 동헌인 화성행궁의 유여택은 상당히 큰 규모를 하고 있다.


'명위헌(明威軒)' 이라고 쓰여진 동헌의 현판입니다. 당시 명필이었던 백하 윤순이 썼다고 한다.


행궁이 설치되었던 곳이기 때문 동헌 건물에 단청으로 하고 서까래를 이중으로 설치한 겹처마를 하고 있다. 이는 궁궐건물에만 사용하는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동헌 창호와 기둥. 다른 지역의 동헌과는 달리 앞면 전체에 분합문을 달아 놓고 있다.


가운데 대청마루에는 강화유수가 근무하는 모습을 내부에는 재현해 놓고 있다.


강화유수가 근무하던 방입니다. 온돌이 아닌 마루가 깔려 있다. 지방 수령이 근무하는 방으로는 큰 규모이다.


옆쪽에서 본 동헌 건물 모습입니다. 측면 4칸 규모를 하고 있다.


동헌 앞 마당에 설치된 우물


강화유수부 동헌




조선시대 관아의 하나로 강화지방의 중심업무를 보던 동헌이다. 영조 45년(1769)에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이라 이름을 붙였으며, 여러 차례 보수해서 본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앞면 8칸·옆면 3칸의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명위헌(明威軒)’과 ‘이관당(以寬堂)’이라는 현판은 당시의 명필이자 학자인 백하 윤순(1680∼1714)이 썼다.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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