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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

경주 인용사지, 월성 남쪽 무열왕 둘째아들 김인문을 위해 세운 인용사 절터

younghwan 2011. 10. 2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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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반월성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인용사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절터이다. 인용사는 삼국통일에 큰 공헌을 한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을 위해 세운 사찰이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형성되었는데 김인문은 당시 볼모형태로 당나라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하며 당시 신라사람들이 그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인용사를 세웠다고 한다. 절터의 규모나 궁성 아래에 위치한 점 등으로 볼 때 김인문이 당시 신라 사람들에게 상당히 존경받았던 인물었던 것 같다.

 경주 인용사지는 2002년 발굴 조사를 시작한 이래로 현재까지도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절터에 남아 있는 석물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사찰 가람배치 양식인 2개의 탑을 중심으로 금당, 강당, 회랑 등으로 구성된 쌍탑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발굴조사되고 있는 절터의 규모로 볼 때 꽤 큰 규모의 사찰이었던 것 같다. 발굴조사 진행과정에서 목간, 청자편, 기와편 등 다양한 형태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데 그 중 우물터에서 출토된 목간이 잘 알려져 있다.



경주 월성 아래 위치한 인용사지 절털 발굴 현장.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절터 뒷편 강당 건물이 있었던 자리로 보인다. 농토로 사용되었던 지역같은데, 건물의 흔적인 석재들이 꽤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절터 중앙의 금당이 있었던 자리로 보인다. (?)


금당 앞 건물터의 흔적이 많지 않은 것으로 보아 두개의 탑이 서 있던 자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인용사지 절터 남쪽편은 중문을 비롯하여 회랑이 들어섰을 것으로 보인다.


인용사 절터 동쪽편 건물터.


인용사지 발굴현장 울타리에 그려진 그림


인용사지는 경주박물관에서 월성 남천 옆 도로를 따라 조금 가면 나타난다.


신라의 궁성이었던 경주월성과 남쪽편을 흐르는 경주남천


경주 월성 남서쪽에 있었던 월정교가 최근에 복원되고 있다.


인왕사지에서 출토된 목간(사진)


경주 서악동 태종무열왕릉 아래에 있는 김인문묘. 인용사는 김인문을 위해서 세워진 사찰이다.


김인문 무덤앞에 남아 있는 서악동귀부.


보령 성주사지 절터. 보령지역은 삼국통일후 김인문에게 영지로 내려졌던 지역이다. 당과 외교관계에 공이 많고, 오랫동안 당에 체류했던 그에게 당나라와의 뱃길이 있는 서해안지역을 영지로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성주사는 금당을 중심으로 4기의 석탑이 옛 절터에 남아 있고, 뒷편에 국보로 지정된 낭혜화상 백광보월탑비가 있다. 금당을 중심으로 한 사찰의 영역을 그리 넓어 보이는 편은 아니지만, 주위에 승려들이 묵었던 요사채 건물들이 있었던 터가 상당히 넓어 보인다.



반월성을 배경으로 남산을 바라보는 곳에 있는 절터이다. 인용사는 신라의 장군이며 외교가였던 김인문이 중국 당나라 감옥에 갖혀 있을 때, 그의 안녕을 빌기 위해 신라 사람들이 세운 절이라고 한다. 김인문은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당나라에서 22년간 생활하면서 많은 벼슬을 했다. 무열왕 7년(660)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고, 문무왕 8년(668)에는 고구려를 통합하여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현재 절터에 남아있는 석물들로 당시에 쌍탑식 가람배치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신라시대에 승려나 왕이 아닌 개인을 위해 일반인들이 세운 절로서는 처음이라는데 그 의의가 크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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