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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세황(1712~1791)은 조선후기 영.정조대에 활약한 대표적인 문인화가로 당시 한국 화단에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고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으며, 서양화법을 수용하는데도 기여한 인물이다. 재능이 뛰어나 시문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당대의 화가인 김홍도가 그의 제자라고 한다. 벼슬에 뜻이 없어 주로 작품활동에만 전념하였으며 60대에 과거에 합격하였다고 한다. 72세에 북경사행, 76세에 금강산 유람을 떠날 정도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진취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문인화가라 할 수 있다.

 강세황은 72세인 1784년에 늙은 몸을 이끌고 먼 북경 사행길을 떠났다. 젊어서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작품활동에 전념했던 강세황이 60대에 관직에 들어가 그가 꿈꾸었던 중국을 70대에 방문하게 되었는데, 새로운 문물을 대한 그의 열정을 느끼게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강세황은 조선을 대표하는 문인화가로서 그 명성은 중국에서도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의 중국사행길에서 본 느낌을 그린 대표적인 그림인 <사로삼기첩>과 <영대기관첩>은 박지원의 소설 <열하일기>와 함께 조선후기 사행길을 묘사한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당시 지식인들의 청나라에 대한 관념과 새로운 문물에 대한 열망과 관심사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사는 곳이 멀리 떨어진 궁벽한 곳이기에 지식을 넓힐 도리가 없다. 중국 학자들을 만나서 나의 막힌 가슴을 터 놓기가 소원이었다. 어느덧 백발이 되었는데 어떻게 하면 날개가 돋힐 수가 있을까"  - 강세황 -


강세황과 1784년 사행
72세에 드디어 평생 꿈꾸던 사행을 떠나게 된 강세황은 생생한 사행의 현장을 담은 <사로삼기첩>과 <영대기관첩>을 남겼다. 강세황이 산해관을 지나 북경에 도착할 때까지의 여정중에 만난 풍경을 화폭에 담고, 함께 갔던 정사 이휘지(1715~1785), 서장관 이태영 (1744~1803)이 함께 시를 읊어 시화첩으로 꾸민 것이다. 수묵으로 그린 스케치풍의 두화첩에는 북경 중남해의 얼어붙은 호수 위에 스케이트를 타고 펼치는 중국 전통 무예장면, 신기루가 펼쳐지는 장관으로 연행록에 자주 언급되었던 계주의 풍경, 고죽성, 강녀묘와 같이 역사와 충절의 뜻이 담긴 유적지 등이 함께 담겨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북경 영대의 기이한 경치 (영대기관첩), 강세황, 1784년. 영대기관첩은 영대기관첩은 강세황, 이휘지, 서장관이 사신으로 청나라 북경을 방문하여 초청 받았던 북경  중남해에서 열렸던 만주족 특유의 행사인 '빙의연'행사를 그린 그림을 중심으로 세사람의 시를 함께 묶은 서화첩이다.

영대기관첩
1784년 10월부터 1785년 2월까지 정사 이휘지, 부사 강세황, 서장관 이태영은 사행을 떠났다. 청 건륭제가 50년 동안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린 것을 하례하고 칙령으로 조선 사신을 1785년 1월 6일에 열리게 되는 천수연에 참석시킨 것과 중국에 표류한 조선인을 돌려 보낸 것에 대한 감사인사를 위해서 였다. 이때 강세황은 일정 중에 만난 청나라 관리들과 시를 지어 주고 받기도 하였고, 중국인들은 강세황의 글씨와 그림을 구하려고 모여들었다고 한다. <사로삼기첩>과 <영대기관첩>은 이 사행에서 접한 풍경과 명승지들을 강세황이 그림을 그리고, 강세황, 이휘지, 이태영의 시를 함께 묶은 시화첩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영대빙의. 영대기관첩 중 사행된이 초청된 청나라 연회인 '빙의연' 행사를 그린 그림이다. 북경 빙희연 행사를 그린 그림이다. 북경 자금성 동북쪽에 위치한 인공호수 중 겨울철 얼어붙은 중남해에서 화살로 홍살문에 흉심을 쏘는 무예를 선보이는 행사이다.


영대기관첩 중 이휘지, 강세황, 이태영이 쓴 세편의 시


영대기관첩 중 강세황이 그린 그림.

강세황이 부사로 참여한 사행단은 1784년 12월 21일 건륭제와 함께 북경 영대에서 펼쳐진 빙희연에 참여하게 되었다. 빙희는 북방에서 기마와 활쏘기에 능했던 만주족의 풍속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연회였다. 신발 밑바닥에 복편과 철인을 부착하고, 얼음 위에 홍상문을 설치하고 화살로 거기에 흉심을 쏘는 무예를 선보였다, 배경이 된 것은 겨울철 얼어붙은 지금 북경의 중남해다. 북해의 백탑이 오른쪽 멀리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실질적인 중국의 동쪽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산해관 성문을 들어서면 볼 수 있는 산해관 광장과 도시 거리. 옛 선인들의 사행길에서 보았던 도시적인 풍경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행길의 기이한 세가지 경치(사로삼기첩), 강세황, 1784년. 강세황이 그린 북경 사행길에 보았던 인상적인 중국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청나라의 관문이라고 할 수있는 만리장성 산해관을 지나 북경까지의 노정에서 본 풍경 중 계주의 풍경인 '계문연수', 백이숙제 묘가 있는 고죽성, 북경 이화원과 정절을 상징하는 강녀묘를 추가하여 총 4첩의 그림과 글로 구성되어 있다.

사로(사행길)에서 만난 세가지 기이한 경치를 담은 시화첩이다. 강세황이 그림을 그리고 삼사가 함께 시를 읊어 시화첩으로 꾸몄다. 세가지 기이한 경치는 신기루가 펼쳐지는 듯 보인다는 계주의 풍경인 '계문연수', 북경 청의원(지금의 이화원)의 풍경을 그린 그림, 서산 백이숙제의 묘가 있는 고죽성이다. 마지막에 정절을 상징하는 강녀묘를 추가하였다. 강세황의 도장이 있는 <영대기관첩>과 같은 화풍으로 그려져 강세황 그림으로 추정된다. <출처:중앙박물관>


계문연수. 산해관과 북경 사이의 여정에서 볼 수 있는 계주의 풍경으로 안개가 자욱하여 넓은 평원이 마치 호수처럼 보이는 풍경이라고 한다.


계문연수을 보고 적은 글. 세사람이 나란히 글을 적어 놓고 있다.

북경으로 향하는 사행노정 중 산해관을 지나 풍운현에 도착하기 전 목도하게 되는 아름답고 신비한 장간으로, 조선에서 파견된 사행단들의 연행록에 자주 언급되어 왔다. 일종의 착시현상에 의해 안개가 자욱하여 호수에 섬들이 출몰하듯 보이며 나무의 그림자가 계주까지 2백여리에 펼쳐지는 듯한 자연현상을 말한다. <출처: 중앙박물관>


중국 이화원이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건물 위주로 그림을 그렸기때문에 실제 이화원에 비해서 넓어 보이지는 않는다. 실제로는 훨씬 넓고 많은 건물이 호숫가에 세워져 있다.

이화원을 보고 세사람이 남긴 시


실제 이화원은 그림에서 보다 훨씬 넓고 웅장하다.


고죽성. 산해관에서 계주를 향해 가는 도중에 위치한 곳으로 백이와 숙제의 사당인 이제묘가 있다. 은나라 말기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의 왕자였는데, 주나라에 출사하지 않고 절의를 지키다 죽어 의로움의 상징이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고죽성을 보고 세사람이 남긴 시.


강녀묘. 강녀묘의 원래 명칭은 '맹강녀모정녀사'다. 강녀의 남편이 진시황 때 만리장성을 축조하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수천리 길을 남편을 찾아 온 그녀가 이곳에 올라 밤낮으로 울다가 홀연히 돌이 되고 말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이휘지가 쓴 글모음(이휘지연행시첩). 북경에서 쓴 이휘지의 시첩으로 그 사후에 북경에 사신을 갔던 이용인이 얻었다고 한다.

1863년 부사로 사행을 간 이용은은 북경에서 우연히 이휘지가 1784년 사행 때 쓴 시첩을 얻게 되었다. 이휘지가 강세황과 함께 연행한 1784년 이후 80년 쯤 지난 때였다. 그는 이를 소중히 여겨 이휘지의 현손 이덕녀에게 주고 그 후 집안에서 대대로 전하게 되었다. 시첩의 첫머리에는 이러한 사연을 기록한 이용은의 제발(1864녀)이 적혀 있다. 그 뒤로는 이휘지가 요동벌판에서 서장관 이태영의 운을 따라 쓴 <요야차서장운> 1수가 이어진다. 그 외에 기행경물에 대한 절구 3편과 <천수연시> 1편 등으로 구성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메마른 나무, 대나무와 바위 (고목죽석도), 강세황, 1789년

사행의 여정 중에는 평안북도 의주가 있었다. 의주에 머무는 기간 동안 사행단에 속한 문인들은 여흥을 담아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강세황의 <고목죽석도>는 그런 맥락에서 제작된 것이다. "교가기석, 표옹사우용만시, 갑진동"이라 적은 글을 통해, 강세황이 부사로 청에 사행을 떠난 1784년(갑진년) 겨울, 용만(지금의 의주)에 들러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사행의 고된 여정 중에도 붓을 놓지 않았던 화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강세황상. 18세기 후반

1784년 10월부터 1785년 2월까지 부사의 자격으로 사행을 다녀온 강세황의 초상화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으며, 강세황 얼굴의 특징인 광대뼈가 도드라지고 마른 얼굴, 크고 긴 코 등이 강조되었다. 관복을 입은 초상화라는 점에서 그가 관직생활을 시작한 61세 이후에 그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두운 청색 운보문 단행에 쌍학 흉배를 부착하였으며 정2품에 해당하는 삽금대를 착용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청나라 병사들 (호병도), 김윤겸 (1711~1775)

오른쪽 소나무 아래 인물을 그린 그림 바깥쪽에 김윤겸 이름이 적혀 있다. 김윤겸은 '노가재연행일기'의 저자 김창업의 아들이다. 화면 왼족에는 청대 복식을 한 두명의 병사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다. 오른쪽의 인물은 뒷모습으로 그려진 말 등 위에 팔을 걸치고 여유로운 자세로 서 있고, 왼쪽의 인물은 두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서 있다. 김윤겸은 사행을 다녀온 인물이 많았던 장동김문의 후손으로써 사행을 다녀왔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북유했다는 기록이 있어 중국기행을 다녀온 것으로 생각되며, 그때 보고 그려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출처: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