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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박물관

[경기도박물관] 한성백제 시기의 유물

younghwan 2012. 1. 6.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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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지역은 한강, 임진강을 비롯하고 크고 작은 강과 하천이 발달해 있고 넓은 농토와 서해안 갯벌 등 자연적 조건이 사람이 거주하기에 양호하여 구석기시대 이래로 사람이 거주해 왔으며, 신석기시대를 거치면서 정착농경생할에 따라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에는 삼한 중 마한 54개국이 자리잡았으며, 고구려에서 남하한 한성백제가 이 지역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이런 배경으로 경기도에는 많은 한성백제기의 유적들이 남아 있으며 주로 한성백제의 수도 위례성, 파주와 연천의 임진강 유역, 중국.일본과 무역활동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 고양 멱절산과 화성 당황성 부근에 한성백제의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다. 경기도 박물관에서는 한성백제 유물로 육계토성이 있었던 파주 주월리 유적지, 무역항이라고 할 수 있었던 당황성 인근의 화성 백곡리와 소근산성, 한강 하류의 고양 멱절산, 경기 북부지역인 포천지역에서 출토된 한성백제기의 유물들이 토기를 중심으로 많이 전시되어 있다.

역사시대의 경기도
역사시대의 시작은 초기철기시대(기원전 4세기~2세기) 내지 원삼국시대(기원전1세기~기원후 3세기 중반)까지 소급해 볼 수 있다. 초기철기시대 이래로 철기가 보급되면서 농업생산력이 증가하고 경기도를 중심으로 마한 54개국의 소국이 자리잡았다. 삼한시대는 고고학적으로 원삼국시대에 해당된다. 2세기 후반 이래로 각 소국들 간의 통합이 본격화되었으며, 이 가운데 한강 하류에 위치한 백제국이 점차 세력을 확대하여 3세기 후반에는 한강유역을 기반으로 하여 한성백제(기원전 18년~기원후475년)를 개국하였다. 한성백제의 문화는 무덤과 주거양식, 그리고 토기문화에 있어 서울.경기지역의 원삼국 문화를 계승하였으며, 중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다. 이를 토대로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대에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5세기 후반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따라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령하면서 경기도에는 여러 고구려 유적들이 분포하게 되었다. 6세기 중반 이후에는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삼국통일의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한 이후 확대된 영역을 다스리기 위해 전국을 9주로 나우었다. 이때 우리도는 한주에 속하여 당황성을 중심으로 당나라와의 교류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삼국시대의 여명, 초기철기시대~원삼국시대
경기도 지역에서 기원전 4세기경 철기를 사용한 사람들은 비교적 높은 산지에 마을을 조성하다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평지나 해안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마을에는 의례와 관련된 공간으로 추측되는 환호, 자연바위, 구덩이 등도 조사되었다. 집의 평면 형태는 타원 또는 네모난 모양으로 안에는 화덕이 하나씩 설치되어 있었다. 무덤은 고인돌과 돌널무덤에서 나무널무덤으로 점차 바뀌게 된다. 이 시기에는 토기의 아가리에 점토띠를 붙인 점토대토기와 흑도장경호, 두형토기 등과 세형동검이 사용되었다. 경기지역에서 조사된 원삼국시대 유적은 마을.무덤.생산유적.조개더미 등으로 구분된다. 이외에 토기와 철기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유적과 서해안의 조개더미 유적이 있다. 또한 인접한 낙랑.대방 지역과 일본에서 만들어진 왜래 물품이 경기 지역에서 발견된 경우로 보아 이들 지역과의 교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검파두식(남양주 삼패동).세형동검, 초기철기시대, 검파두식은 검자루 끝에 부착하는 장식으로 하단의 가로 부분은 둥글고 세로는 사각형 모양이다. 하단에서 위로 사각형의 기둥을 올렸고 사각형 사이에 세로로 홈이 파여져 있으며 그 위에 원통형으로 손잡이를 세웠다. 세형동검은 한국식동검 또는 놋단검이라 부르기도 한다. 세형동검은 경기도에서 양평 상자포리 지석묘와 안성 안정리 신기 유적의 목관묘에서 출토되었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세형동검의 제작시기는 기원전 4세기에서부터 기원전후한 시기까지로 이해된다. <출처:경기도박물관>


검은색 목긴 항아리(복제품)와 거푸집, 초기철기시대, 검은색 목긴 항아리는 토기의 표면을 매끄러운 도구로써 문지른 후에 구운 토기를 말한다. 몸체에 비해 목이 길고 구연부는 약간 밖으로 벌어져 있다. 한반도 중부 이남에서 단면 원형덧띠토기와 함께 출토되며, 대전 괴정동.아산남성리 등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원형덧띠토기, 굽달린접시모양토기 등과 함꼐 중국 랴오닝지역의 영향을 받았다. 거푸집(복제품) 용번, 혹은 거푸집의 접합면 가장자리에는 주물을 부어 넣는 구멍인 탕구가 마련되고 합법인 경우 양면을 맞추기 위한 합인 표시가 있어 짝을 맞추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초기철기시대에 오면 오히려 한반도에서 거푸집의 출토예가 많아진다. <출처:경기도박물관>


포천 영송리 부뚜막유적. 포천 영송리 유적은 한탄강 지류인 영평천을 따라 형성된 원삼국시대 마을 유적이다. 이 부뚜막은 1호 집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조사 완료 후 이동 복원한 것이다. 조사 당시 부뚜막 내부의 솥걸이 부근에는 경질무문토기가 사용 상태 그대로 걸려 있었으며, 작은 돌로 토기 바닥면을 받치도록 하였다. 이 부뚜막 유구는 주로 취사를 목적으로 사용된 노지 시설이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중도식경질무문토기과 중도식경질무문토기항아리, 원삼국시대, 중도식경질무문토기는 중도 주거지 유적 출토 토기를 표지로 하는 중부지역의 초기철기 또는 원삼국시대 토기를 말한다. 토기 연대는 기원후 1~2세기로 볼 수 있다. 중도식경질무문토기항아리는 원삼국시대 주거지에 부착되어 있는 중도식 경질무문토기항아리이다. 음식을 보관하기 위해서 곡식을 저장하는 용도로 쓰인 것이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수레바퀴 연결축(한성백제, 파주 주월리 유적(육계토성)), 거여구의 일종으로 수레바퀴를 수레에 고정시키기 위해 사용된 부속이다. 이 유물이 발견되어 물건 운반시 수레가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슬(원삼국시대, 포천 성동리 유적). 옥제 목걸이는 무덤에서 세트로 출토되나 집자리에서 출토된 경우에는 일부만 발견된다. 무덤에서 출토되는 보석장신구는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고 완전하고 멋진 삶을 의미한다. <출처:경기도박물관>


굽다리접시와 가락바퀴, 원삼국시대, 파주 주월리 유적(육계토성), 굽다리접시는 나팔모양으로 벌어진 짧은 대각이 붙은 토기로 백제의 굽다리접시와는 형태상 차이가 있다. 뚜껑이 있는 유개식과 뚜껑이 없는 무개식으로 나뉜다. 가락바퀴는 실을 뽑을 때 사용하는 도구로 가락바퀴의 가운데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 이 구멍에 긴 둥근 막대를 끼워 축을  만들고 섬유를 축에 이어 회전시켜 꼬여진 실을 만든다. <출처:경기도박물관>


파주 주월리 유적
경기도 파주시의 임진강변에 위치한 주월리 유적은 1996년 7월말 내린 집중호우로 발견되어 유구와 유물의 훼손을 우려하여 긴급조사를 실시하였다. 경기도박물관은 96년에 주거지 3기를 포함한 7기의 유구, 97년에 주거지를 6기를 포함한 총 17기의 유구를 조사하였고, 한양대학교박물관에서는 '凸'자형 주거지 2기, 방형 주거지 1기, 완전히 파괴된 주거지 1기와 추정 부뚜막 시설2기 및 유물산포지 등을 확인하였다. 유물은 당시의 생활 상태를 알 수 있는 시루.고배.철기 등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한양대학교에서 발굴한 2호 주거지에서는 백제토기 이외에 고구려 계통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이 유적의 연대는 96-7호 주거지 출토 목탄의 탄소연대가 각각 AD 260~400, AD 240~425년으로 측정되었으며, 2호 주거지 출토 고구려 계통의 토기를 5세기 중엽 경으로 보는 점 등으로 미루어 4~5세기대로 편년하고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손잡이 달린 시루, 원삼국시대, 파주 주월리 유적(육계토성). 부뚜막에 올려 음식을 찔 때 쓰는 조리용 토기로 바닥에 수증기가 올라가도록 하기 위한 구멍이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뚜껑과 접시.입 큰 토기항아리, 원삼국시대~한성백제, 파주 주월리유적


손잡이 달린 동이, 한성백제, 포천 자작리 유적. 물동이로 사용된 토기로 성형시 물을 따르는 부분에 얕은 밑그림을 그린 다음 접어서 만들었다. 손잡이 달린 동이는 남부지역에서는 자주 발견되나 중부지역에서는 흔하지 않은 기종이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중도식경질무문토기항아리, 중도식경질무문토기, 원삼국시대. 원삼국시대 주거지에 부착되어 있는 중도식 경질무문토기항아리이다. 음식을 보관하기 위해서 곡식을 저장하는 용도로 쓰인 것이다. 중도식경질무문토기는 중도 주거지 유적 출토 토기를 표지로 하는 중부지역의 초기철기 또는 원삼국시대 토기를 말한다. 토기 연대는 기원후 1~2세기로 볼 수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깊은바리토기, 한성백제, 파주 주월리 유적, 포천 자작리유적, 화성백곡리유적. 음식을 간단하게 끓여 먹었던 조리용 토기로 속이 깊고 바닥은 평평하며 원삼국시대 말기에서부터 백제시대까지 유행하였다. <출처:경기도박물관>

경기도의 한성백제
'삼국사기'에 따르면 기원전 18년 고구려 시조 주몽의 아들이 온조가 남하하여 위례성(지금의 서울)에 백제를 세웠다고 한다. 이후 백제는 한강유역과 지금의 경기도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주변 세력들을 통합하면서 성장하게 된다. 백제는 도읍의 위치에 따라 한성기, 웅진기, 사비기로 시기를 나누는데, 그 중 한성기는 백제의 등장 이후부터 475년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는 때까지를 가리킨다. 한성기의 백제는 고대국가의 출현, 영역의 확장, 국가 체제의 정비, 불교 수용 등 중요한 사건들이 집중되었던 시기이다. 또한 3세기 중반 고이왕 때의 안정과 발전을 바탕으로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백제는 4세기 말부터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타격을 받아 임진강 유여과 한강 유역을 차례로 빼앗기고 475년 급기야 도읍을 금강 유역의 웅진으로 옮기게 된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백제인의 식생활과 토기
한성백제기의 토기는 원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두드림무늬)의 전통이 계속되며, 국가가 출현되는 3세기 중반부터 새로운 기종의 한성 양식토기가 제작되어 위세품과 함께 중앙에서 지방으로 전해진다. 귀족은 삼족기와 고배 등 뚜껑이 있는 고급기종과 다양한 종류의 토기를 사용했지만 평민은 조리용기(심발형토기.장란형토기.시루)와 생활용기(완.동이.접시) 등 단순한 기종을 주로 이용하였다. 음식은 집안에 설치된 부뚜막에 토기를 올려 그 안에 식재료를 넣고 긇이거나 쪄서 조리해 먹었으며, 이때 곡물은 쌀.조.팥.보리.밀.콩.녹두 등을 애용하였다. 때떄로 곡식과 함께 과실이나 견과류를 함께 섭취하였는데, 소.말 등 가축과 멧돼지 같은 야생동물, 어패류 등 다양한 동.식물성 음식을 골고루 먹으며 건강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음식물은 집 안의 큰 항아리에 넣어 놓거나 집 바깥에 적정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플라스크 모양의 저장구덩이에 두어 오랜 기간 보관할 수 있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화성 백곡리 고분 유적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남양반도의 해안가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는 백제 한성기 고분군이다. 남양만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 해상교통의 요지로 중요하였다. 이 유적은 토기와 철제무기.마구.농공구.옥 등의 장신구류가 출토되었다. 이 중 토기류는 목이 곧은 단지와 알모양의 독, 새끼줄 모양에 횡침선이 있는 깊은바리모양 토기, 꼭지가 없는 뚜껑, 넓고 편평한 바닥의 입큰항아리 등이 있는데, 서울 지역에서 출토되는 한성기 백제토기와 동일하여 백제토기 문화의 영향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 유적은 유물로 보아 대략 4세기 중.후반에서 5세기 초 무렵에 걸쳐 조영된 것이다. 이 고분군은 전문화된 한성기 백제토기 제작전통이 직접적으로 반영되고 있으면서, 실용적인 철제 무기와 마구를 위주로 부장되어 있다. 백곡리 유적은 한성백제의 중앙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으면서, 서해안의 해상교통 요지를 장악하고 있던 지역 집단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다.<출처:경기도박물관>


큰 토기항아리, 원삼국시대~한성백제, 화성 백곡리 1호 2호 5호 고분. 항아리는 곡식을 저장하는 용기로 활용되었고 토기들을 화성 백곡리 무덤에 출토되는 이유는 사자도 살아 있을 때 생자의 삶처럼 똑같이 살 수 있길 바라는 믿음에서 부장했을 것이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짧은 목 토기항아리, 원삼국시대, 파주 주월리유적.화성 백곡리 5호고분. 토기를 제작할 때 겉면을 도구로 두드려 만든 타날문토기이다. 겉면을 두드리면 바탕 흙에 남아 있는 기포가 제거되면서 문양이 남아 장식성이 높아진다. 음식을 저장하는 용도로 쓰이는 토기이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장란형토기, 한성백제, 화성 백곡리 5호고분. 장란형 토기는 시루에 올려놓고 쌀을 쪄서 밥을 할 때 쓰이는 토기로 활용되었다.


평기와, 한성백제, 포천 자작리 유적. 가옥의 지붕을 덮는 옥개용의 건축 부재를 말한다. 원래 목조건물의 지붕에는 이엉이나 볏짚, 그리고 나무껍질 같은 식물성 부재를 사용하였는데 내구력이 약하여 자주 교체해야 하기 때문에 방수효과나 강도가 높은 반영구적인 점토소성품인 기와가 3세기말 이후에 출현하게 되었다. 백제에는 기와만을 점담하는 와박사의 직제가 있었고, 백제 위덕왕 35년(588)에는 일본에 와박사를 파견하였다. <출처:경기도박물관>

 
고양 멱절산 유적
고양 멱절산 유적은 한강 하류의 고양시 일산구 법곶동에 위치해 있다. 지정학적으로 서해로 나가는 관문에 존재하고 중국과의 문물교류 뿐만 아니라 한강 상류 지역과 한반도내 다른 지역 간의 중심지 중계무역을 할 수 있는 한성백제시대 유적이다. 2003년 제1차 발굴조사 결과로 수혈주거지 8기, 수혈유구 2기, 구상유구 1기, 적석유구 5기 등이 확인되었지만 유적의 성격이나 기능 등은 정밀 발굴조사 이후에 규명될 수 있을 것이다.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흑색마연토기와 다양한 문양의 부호들이 찍힌 토기 편들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이 유적의 연대는 기원후 4세기경에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화성 소근산성유적
화성 소근산성 유적은 화성시 양감면 신왕리 일대에 위치한다. 소근산성은 경기 남부 지역에서 확인된 한성백제시대의 토성 유적이다. 경기도박물관에서 2차에 걸쳐 발굴한 결과 수혈주거지 6기, 구덩이 19기, 구상유구 2기 등에서 돌절구, 가락바퀴, 검은간토기, 굽다리접시, 항아리 등이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한성백제의 수도인 풍납토성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소근산성은 경기 남부 지역의 중요한 거점 도시를 방어하는 시설임이 확인되었다. 이 유적은 한성백제가 475년 웅진으로 천도하기 직전까지 활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세발달린 토기, 한성백제, 고양 멱절산 유적.화성소근산성 유적. 둥그런 배신 아래에 짧은 다리가 3개 달려 있는 것으로 백제토기의 가장 전형적 기종 가운데 하나이다. 한성기 초기에는 세발토기가 서울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 홍성 신금성 백제유적에서 출토되며 제사나 공헌용에 쓰이는 의기로 생각된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이형토기, 한성백제, 고양 멱절산 유적. 백제토기 중 자주 발견되지 않는 특이한 기종으로 용도는 명확하지 않다. 이러한 유형의 이형토기는 주로 일본에서 발견되므로 교역품일 가능성도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굽다리접시, 한성백제, 고양 멱절산유적.화성 소근산성 유적. 굽다리접시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일대의 선사시대 및 고대 용기문화에서 자주 보이는 그릇의 한 종류이다. 중국식 명칭으로는 '두 豆'라고 하는데 주례를 참조하면 나물 혹은 고기를 담는 그릇이며 제기로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깊은바리토기와 토기병, 한성백제, 화성 소근산성, 깊은바리토기는 음식을 간단하게 끓여 먹었던 조리용 토기로 속이 깊고 바닥은 평평하며 원삼국시대 말기에서부터백제시대까지 유행하였다. 토기병은 병모양의 회청색 경질토기로 동체에 평행 타날 흔적이 남아 있으며 자연유가 흡착되어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가락바퀴, 한성백제, 고양멱절산유적.화성소근산성유적. 신석기시대에는 흙으로 만든 것이 많으며, 청동기시대에는 돌로 만든 원판 형태의 가락바퀴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신석기와 청동기, 철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집자리나 조개무지 등 생활유적에서 출토되나 청동기시대 고인돌 등의 무덤에서 껴묻거리로 발견되기도 한다. 삼국시대에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출토된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돌절구.공이, 한성백제, 화성 소근산성. 곡식이나 약 등을 찧거나 빻는데 쓰는 도구로 돌을 파내서 만들었다.한성백제시대에 막절구는 풍납토성에서 처음으로 출토된 이후 소근산성에서 두번째로 발굴된 것이다. <출처:경기도박물관>


토기완, 한성백제, 고양 멱절산 유적. 구연부를 의도적으로 깬 흔적이 발견되어 신앙의식과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이다. 중국의 북조에서도 토기를 깨는 신앙이 있었다고 한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숫돌, 한성백제, 고양 멱절산 유적. 숫돌은 간석기의 형태를 잡거나 완성된 도구의 날을 세우는데 사용했던 도구이다. 숫돌은 집자리와 관련된 생활유적에서 대부분 출토되고 있으며 그 존속 시기는 신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굽달린 토기, 한성백제, 화성 소근산성유적. 연질의 회백색 토기로 일부 운모가 섞인 정선된 태토를 사용하였다. 八자형의 대각이 부착되었으며 저부와 대각 사이에 깍기 조정 흔적이 보인다. <출처:경기도박물관>


긴 목 토기항아리, 한성백제, 고양멱절산 유적. 목이 긴 항아리로 아가리 끝 부분은 요철모양으로 처리하였고 외면에 녹청색의 자연유약이 흡착되어 있다.


토기뚜껑, 한성백제, 화성 소근산성, 토기 뚜껑의 손잡이는 단추모양이며 몸통의 외연은 물묻은 손으로 문지른 흔적이 있다.


작은토기 항아리, 한성백제, 고양 멱절산유적. 화성소근산성 유적, 곡물이나 음식을 저장할 수 있는 작은 항아리로 고양 멱절산 유적에서 출토된 소호와 화성 소근산성에서 출토된 소호는 형태와 크기 등이 서로 차이가 있다.


흑색마연토기뚜껑, 한성백제, 고양 멱절산. 검은간토기는 흑색을 띠는 광물질을 바른 후 간 것으로 표면에는 광택이 나며 정선된 흙을 사용하였다. 토기의 성형이 완료된 뒤 토기의 표면에 산화철의 액체를 바르고 매끄러운 도구로 문질러 소성한 토기이며 주로 귀족들이 사용한 위세품이다. <출처:경기도박물관>


큰 토기항아리, 한성백제, 화성 소근산성, 곡물을 저장하는 기능을 가진 큰 항아리로 아가리 부분이 깨진 것이 특징이다. 한성백제시대에  토기를 깨는 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대형 토기항아리, 포천 자작리 유적. 파주 주월리 유적(육계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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