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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치주의와 유교적 사회를 추구한 조선은 건국초부터 문물제도의 정비, 지식의 보급, 인재 양성 등 국가 통치라를 위한 수단으로 다양한 도서를 수집, 편찬하였다. 조선시대 서적의 편찬은 중앙정부에 서적 편찬을 위한 관청을 두고 많은 종류의 서적을 발간하였으며, 지방정부인 감영과 민간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서적들을 출판하였다. 조선왕조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의궤', '일성록'은 그 자료의 방대함과 일관성 있는 기록 등으로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조선시대 문서 및 서적의 관리는 중앙 정부의 학술기관인 집현전에서부터 체계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하여, 홍문관, 규장각 등으로 계승되었으며, 전국에 사고와 외규장각을 설치하여 이런 방대한 자료들을 분산 보관하였다. 조선시대 서적의 편찬과 발간은 전시대에 걸쳐서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지만 특히, 조선후기 정조대에 규장각을 중심으로 양질의 서적들이 저술,수집되어 체계적으로 간행되었다.

 조선시대 국가에서 발간한 서적의 보관.관리는 다양한 기관에서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당대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는 실록을 보관하기 위한 지방의 사고(태백산, 오대산, 정족산, 적장산)와 공식적인 서적을 발간.보관하던 학술기관인 규장각, 국왕을 자문하는 행정부서인 홍문관, 세자의 교육을 전담하던 시강원, 구한말에 만들어진 집옥재 등이 있다.

조선의 왕실 도서관, 규장각
규장각은 조선 22대왕 정조가 즉위하던 해인 1776년에 창설된 국가 왕실도서관 겸 학술연구기관이다. 규장각은 숙종대에 어제(왕이 지은 글).어필(왕이 쓴 글씨)을 봉안하기 위해 지은 작은 건물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정조대에 이르러 창덕궁 후원에 2층의 누각을 새로 짓고 2층에는 주합루, 1층에는 규장각의 현판을 걸고 제도를 갖춘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기존의 어제.어필 관리 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방대한 도서를 수집하고 정리했으며 당대 최고 인재들과 함께 학문적 열정이 담긴 수많은 도서들을 간행하였다. 또한 과거시험을 주관하게 하거나, 젊은 관리를 재교육하는 '초계문신강제'를 실시하는 등 규장각의 기능을 확대시켰다. 이로써 규장각은 국가의 학술 및 출판을 겸하는 왕실도서관과 정책을 토론하는 중추기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 규장각과 부속기관 도서
 - 주합루.규장각: 정조의 어진, 어제, 어필, 보책, 인장 등을 보관하던 곳
 - 서향각: 도서를 포쇄(책을 바람에 쐬어 부식이나 충해를 방지)하던 곳
 - 서고: 국내 도서를 보관하던 곳
 - 열고관.개유와:중국 도서를 보관하던 곳
 - 봉모당:역대 임금의 글과 그림을 봉안하던 곳  <출처:고궁박물관>


왕실도서관 내부모습
조선시대 왕실도서의 수집과 정리를 위한 가장 대표적인 기관은 규장각으로 정조에 의하여 규장각의 제도가 완성되었을 때는 국내서적 약 1만여점, 중국서적 약 2만여점으로 약 3만여점을 소장하고 있었다. 부속으로 봉모당.서고.열고관 등을 두어 봉모당에는 역대 임금의 글과 그림, 서고에는 국내서적, 열고관에는 중국서적을 나누어 보관하였다. 정조 이후 기능이 축소되었으나 고장대에는 약 4만여점을 소장한 도서관으로 서양문물 관련 자료를 수집.연구하였다. 1908년 규장각을 비롯한 여러 기관의 소장도서 10만여점은 '제실 도서'로 통합되었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결국 규장각은 해체되고 조선왕실의 도서들은 조선총독부의 관리로 들어갔다. 1928년에 규장각 도서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경성제국대학 부속 도서관으로 이관되었고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로 넘어가게 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홍문관지, 1784년(정조8), 이노춘 등 지음, 홍문관의 연혁, 직관, 담당업무 등을 기록한 도서이다.


국내도서목록집(서고장서록), 19세기 중반~20세기초, 국내 도서를 보관했던 서고의 도서목록집이다. 서고는 규장각의 부속기관으로 창덕궁 주합루 서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규장각지, 1784년(정조8), 1784년에 정조의 명에 의해 편찬된 규장각 역사서로 규장각의 연혁과 제도, 기능, 의식, 보관서적 등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규장각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정조와 초계문신과의 문답서(초계강의), 정조가 초계문이나 경연관과 대학, 중용에 대해 서로 묻고 답한 것을 기록한 책이다.


정조 왕세손 책봉 옥인.함, 1759년(영조35년), 1759년(영조35) 정조가 왕위를 이을 왕세손으로 책봉되면서 만들어진 옥인과 함이다.

정조의 왕실도서편찬
정조는 규장각의 각신들과 초계문신으로 길러낸 인재들에게 문물을 재정비하는 편찬사업을 맡겼다. 정조는 세손 시절 15종의 책을 편찬하였고, 재위 기간 동안에도 엄청난 수량의 책을 편찬한 조선왕조 역대 임금 중 최고의 저술가이자 학자군주였다. 규장각의 자료 대부분은 정조시대를 정점으로 수집.간행되었고, 이것이 바로 조선 문예 부흥의 원천이었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의 '군서표기'에는 정조 대에 편찬된 도서 목록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군서표기
군서표기는 정조가 세손으로 있던 1772년부터 세상을 떠난 1800년까지 29년 동안 편찬한 서적들에 대한 종합목록이다. 여기에 소개된 도서들은 모두 151종 3,960권으로 정조가 직접 지은 도서인 '어정서(87종)'와 신하들로 하여금 편찬.간행하게 한 도서인 '명찬서(64종)'로 나눌 수 있다. 이번에 다시 찾은 도서 중에서 정조의 '군서표기'에 수록된 목록 중 어정서에 속하는 '영흥본궁의식(1795년)', '함흥본궁의식(1795년)'과 명찬서에 속하는 '홍문관지(1784년)', '이충무공전서(1795년)'가 포함되어 있어 정조대의 도서 편찬 사업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홍재전서
정조의 시문집이다. 1787년(정조11) 1차 편찬, 1799년(정조 23) 2차편찬, 1801년(순조1) 3차 편찬을 거쳐 1814년(순조 14)에 편찬.간행을 완료하였다. 정조는 즉위 후 영조의 어제를 편찬하는 사업을 시작하여 완성하였고, 이어 영조의 신례를 따라 생전에 자신의 어제를 편찬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함흥 태조 사당의 제례절차(함흥본궁의식), 1795년(정조19)
1795년에 함흥에 있었던 태조의 옛 집이자 조선 왕조의 발흥지인 함흥본궁에서 태조와 그 조상에 제향하던 의식과 절차를 수록한 도서이다. '군서표기'에 수록된 정조가 직접 지은 어정서이다.  <출처:고궁박물관>


단군 이래의 역사서(동사보유), 1646년(인조 24) 조정 지음
1646년 조선 중기의 문신인 조정이 단군이래의 역사 사실 중 기존의 역사서에 빠진 부분을 보완하여 편찬한 역사서이다. 삼한과 삼국 사이에 북부여와 동부여를 배치하여 북방의 역사를 중시하였고, 고려 이전 고대사의 비중을 높인 점이 특징이다. '교정청' 도장이 찍혀 있다. 교정청은 서적을 편찬하거나 교정.보완을 위하여 임시로 설치하는 관청이다. 1470년(성종1) '경국대전'을 최종 검토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가장 이른 것이며, 1681년(숙종7)에는 '선원록'을 간행하기도 하는 등 조선시대에 중요한 도서를 교정.보완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 왕명에 의해 임시로 설치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송시열 시문집(송자대선_ 1787년(정조11)
송시열의 시문집이다. 본래 우암의 시문들은 제자가 편집한 소강본이 있고 1717년 왕명으로 간행된 음각활자본이 있었다. 음각활자본 간행시 작업시일이 부족하여 빠뜨린 부분이 많아 새롭게 편집 간행한 것이다. '희정당' 도장이 찍혀 있다. 희정당은 왕이 경연을 열고 신하들을 만나 학문과 국정을 논하는 실질적인 국정운영의 공간으로 '정치를 잘하여 모든 일이 잘 되고 모든 백성이 화락하게 된다'는 뜻이다. 현재 건물은 1920년 경복궁의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중국 심양에서 쓴 소현세자 일기(심양일기)
1637년(인조15)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심양에 잡혀 갔다가 돌아올 때 까지 8년간의 편년체 기록이다. 연월일 순서로 기후, 일정 등 사실을 기록하였다. 병자호란 시기 대처외교의 전말을 살피는 데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관물헌'과 '중광지장' 도장이 찍혀 있다. 관물헌은 성정각과 함께 왕이 신하들과 토론을 하거나 왕세자가 학습을 하던 전각으로 <동궐도>에는 '유허청헌'으로 나와 있다. 1783년 초게문신의 경서 감독이 이루어졌고, 1813년에 세자의 서연 처소로 사용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송시열 시문집(우암집), 1847년(헌종13)
송시열의 시문집이다. 1717년(숙종 43) 왕명에 의해 167권 63책으로 간행되었다. 이후 몇 차례 증보, 간행되었는데, 1787년에 '송자대전;으로 집대성되었다. '홍문관'도장이 찍혀 있다. 홍문관(옥당)은 학술 기관으로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양사와 함께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도 하였다. '옥당'은 홍문관의 다른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사헌부.사간원을 합쳐 양사라고 하는데 여기에 홍문관을 합해 삼사라고 불렸다. 1908년에는 4,250책의 책이 소장되어 있었다.  <출처:고궁박물관>


고려시대 역사서(여사제강), 1736~1795년, 유계 지음
조선 중기의 학자인 유계가 쓴 고려시대 역사서이다. 왕세자의 교육기관이었던 '시강원' 도장이 찍혀 있다. 세자시강원은 세자의 교육기관으로 '춘방'이라고도 불렸으며, 왕이 특별하게 신경을 썼던 중요한 기관이었다. 연산군 대에 세자시강원을 혁파하고 춘궁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1907년경에는 약 20,119책이 소장되어 있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충무공 이순신 유고집(이충구공전서), 1795년(정조19)
충무공 이순신의 유고집이다. 1795년(정조19) 정조의 명으로 교서관에서 검서 유득공의 감독하에 편집, 간행하였다. 규장각의 사무행정공간인 '이문원'의 도장이 찍혀 있다. 이문원은 규장각의 부속기관으로 창덕궁 선원전의 서쪽, 궐내각사 영역에 만든 건물들 중 하나로 규장각 각신들이 사무를 보는 행정공간이었다. 이문원 우측에는 숙직공간인 대유재.소유재가 위치해 있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세 충신에 관한 기록(삼충록)
임진왜란 때 전사하여 개성에 있는 숭절사에 배향된 세 충신 송상현.김연광.유극랑에 관한 글들을 기록하고 있다. 왕세자의 교육기관인 시강원의 다른 이름인 '춘궁' 도장이 찍혀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임경업 행적에 관한 기록(임충민공실기), 1890년,  임순헌.윤행임 지음
임경업의 글과 그의 행적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임경업 개인에 관한 사실 뿐만 아니라 명.청 교체기 및 정묘.병자호란기의 정황들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고종의 서재였던 경복궁 '집옥재' 도장이 찍혀 있다. 집옥재는 '보물을 모아 놓은 곳'이라는 뜻의 집옥재는 고종이 어진 및 도서 등을 보관하거나 외국사신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이용하였던 곳이다. 경복궁 내 다른 전각들과는 달리 당시에는 신식이 중국풍의 서양식으로 지은 것이 특징이다. 1908년에 약 39,817책이 소장되어 있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철종의 장례를 기록한 의궤 (철종 빈전혼전도감의궤), 1863년, 오대산 사고본
1863년(철종4) 12월 8일, 철종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왕실에서는 국상을 거행하기 위하여 전례대로 삼도감을 설치하게 되는데, 본 의궤는 그 중 빈전혼전도감에서 준비하고 거행한 사실들을 기록한 것이다. 의궤청은 1864년 4월 9일에 설치되었으며, 이듬해 4월 수정을 마치고 총 6건의 의궤를 제작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창경궁 건축의궤(창경궁영건도감의궤), 1830~34년, 태백산 사고본


조선시대 법전 (대전회통), 1865년, 조두순 엮음
1865년에 조두순 등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조선의 마지막 법전이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경국대전 및 역대 법전과 '대전통편' 이후 교명.정식 등을 증보하여 엮었다. '경국대전', '속대전', '대전통편'의 본문을 모두 싣고 법전에는 실리지 않던 조례까지 보완하여 편찬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우라나라의 각종 제도와 문물에 관한 기록(증보문헌비고), 1908년, 박용대 등 엮음
1903년에서 1906년에 걸쳐 '동국문헌비고(1770년)', '증보동국문헌비고(1831년)'을 바탕으로 상고 이래 대한제국까지 우리나라 문물제도에 대한 전거를 총망라한 책이다. 1903년에 고종황제의 명에 따라 홍문관에서 찬집을 시작하여 1908년에 간행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조선시대 왕실도서

조선은 기록의 나라였다. 조선 사람들의 투철한 기록정신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방대한 양의 도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조선은 건국초부터 글로써 나라를 다스린다는 문치주의와 유교적 통치 이념 아래 문물제도의 정비, 지식의 보급, 인재 양성 등 국가 통치를 위한 다양한 도서들을 수집하고 편찬하였다. 교서관을 비롯한 중앙 부서나 지방의 감영에서 도서를 편찬하였으며 민간에서도 다시 인쇄하였다. 그 중에서도 왕실에서 편찬하거나 수집한 도서는 우리나라 도서문화의 정수에 해당한다. 특히 왕의 열람을 위한 어람용 도서의 경우 최고급 종이와 비단을 사용하고 최고로 글씨를 잘 쓰는 관리에 의해 쓰여져 민간의 책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조선 왕조의 대표도서인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의궤', '일성록' 등은 오늘날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조선왕실 도서의 관리
조선왕조는 일찍부터 궁궐 안에 많은 도서들을 모아 국가의 정책 운영에 참고하였다. 조선왕실의 도서는 세종 때 집현전이 설치되면서 체계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홍문관 (1463년), 규장각(1776년) 등 학술기관과 왕실도서관으로 계승되었다. 이외에도 왕실 서적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지방의 사고(태백산, 오대산, 정족산, 적상산)와 강화도 외규장각을 설치하여 분산 보관하였다. 이처럼 중앙과 지방에 분산되어 철저하게 관리되던 조선왕실 도서 및 기록물의 관리체계는 일제강점기 무너지고 일부도서는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